소설리스트

진호 이야기-109화 (109/234)

109화

다섯 놈들이 원하는 스킨쉽이, 그러니까 ‘관계’라는 것이 최태혁이 내게 보여줬던 정도의 마음으로 하는 것이라면 나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게 했던 그날 이후. 나는 녀석들을 만날 때마다 알게 모르게 각오를 다지고 비장한 마음을 먹었다. 정 해야 한다면, 녀석들의 곁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결국 피할 수 없는 거라면, 어영부영 당하는 것이 아니라 그날처럼 어느 정도는 내게도 주도권이 있는 관계를 맺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마음을 먹은 것이 무색하게도 녀석들은 틈만 나면 들이대던 것과 다르게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만남이 이루어질 때까지도 포옹과 가벼운 지분거림, 진한 키스 이상의 진도를 나가지 않았다.

최태혁은 약속을 지키라면서 망측스러운 것들을 챙겨 보낸 것과는 달리, 그 뒤로 더 바빠진 모양인지 만나면 밥 먹기도 애매할 정도로 짧은 시간만 보내다 갔고, 민선우도 거의 다르지 않았다. 녀석들은 같이 있는 시간 동안 충전이라도 하듯 나를 끌어안고 눈을 붙이거나 내 이야기를 듣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호는 둘보단 긴 시간을 함께했지만, 그 시간 동안 정말 진지하게 영어를 가르쳐주면서 같이 논문 같은 걸 펴놓고 같이 공부를 하기 시작했고, 후는 뭐에 자극을 받았는지는 몰라도 정말 커플들이 데이트 갈만한 곳을 데리고 다니며 사진 찍는 것에 열을 올렸다. 이 둘도 스킨십이라곤 숙제를 잘했거나 어려운 문제를 혼자 풀어냈을 때 상처럼 내리는 가벼운 입맞춤 혹은 공공장소에서도 할 수 있을 법한 것들이 전부였다. 그러나 나를 가장 김빠지게 한 것은 제일 많이 긴장을 하게 했던 정새빈, 그놈이었다.

다른 녀석들은 각자의 일로 바빠져서 만날 수 있는 시간이 극단적으로 짧아졌다거나 하는 이유라도 있는데, 정새빈은 백수에다 하고 싶은 거라곤 ‘섹스’가 전부인 놈이었다. 내가 알기에도, 그리고 그 본인이 말하기에도 그런 놈이었는데, 다른 네 녀석들보다도 더 스킨십이라고 할 만한 무언가가 없었다.

둘이 같이 집에서 멍때리다가 내가 밥을 하려 하면 자기를 만나는 시간까지 뭔가 하려고 애쓸 필요 없다면서 밖에 나가 밥을 먹고 다시 집에 와서 멍을 때렸다. 심심해서 드라마나 영화를 틀면 옆에 앉거나 누워서 같이 그걸 보다 잠들고, 일어나면 놈은 다음 약속 날짜를 적은 메시지만 하나 남겨놓고 사라져 있었다. 진짜,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이쯤 되니 정작 놈들은 전혀 관심도 없는데 내가 그런 일이 있기를 기대했던 건가 싶어 너무 창피했다. 나는 갑자기 치솟아 오르는 쪽팔림에 참지 못하고 정리하던 쿠션을 향해 주먹을 한 방 날렸다.

“진호야, 이건 어떻게… 쿠션은 왜 때리고 있어?”

한 번으로는 쪽팔린 게 가시질 않아 대여섯 번을 연속으로 쿠션을 때리고 있는데, 뒤에서 채예령의 목소리가 들렸다. 맞다, 나 청소 중이었지. 그것도 그냥 청소가 아니라 대청소를 하기 위해 바쁘다는 채예령까지 불러내 도움을 받고 있었다. 하아, 정신 차리자 김진호. 네가 지금 그놈들 생각하고 있을 때야? 어제 그만큼 이불킥 했으면 이제 그만 떨쳐낼 때도 됐잖아.

“먼지 좀 터느라고. 한동안 안 털었더니 많이 붙어있네. 하하하.”

“그래도 적당히 해, 망가지겠다. 이건 어떻게 할까? 나와 있던데.”

나는 머쓱하게 웃으며 괜히 더 조심히 쿠션을 내려놓고 녀석이 들고 있는 것에 시선을 옮겼다. 얼마 전에 최태혁에게 입 떡 벌어지는 사진으로 꽉 찬 앨범을 받고 충동적으로 꺼냈던, 내 진짜 앨범이었다.

“이리 줘. 내가 넣어 놓을게.”

“...그래. 이것만 정리하면 안방은 청소 다 끝났어. 저 정도면 아마 아주머니도 만족하실 만큼 먼지 한 톨 없이 깔끔해.”

내게 앨범을 건네고 나서 채예령은 허리에 손을 얹고 으스댔다. 부러 더 장난스럽게 구는 것을 알기에 나도 씩 웃으며 그렇게 말한 이상 먼지 한 톨이라도 나오면 약속한 밥은 없을 거라고 받아쳤다. 나는 치사하다고 소리치는 녀석을 뒤로하고 앨범을 제자리에 두기 위해 방으로 들어왔다. 검사 운운하긴 했지만 청소한 사람이 채예령인 이상 정말 먼지 한 톨도 없을 걸 알았다. 그렇게 해주리라 믿었기에 스테이크까지 걸고 불러내서 특별히 안방을 맡겼던 거니까. 안방으로 들어선 나는 바로 장식장으로 직행했다. 그리고 자국 하나 없는 투명한 유리에 닿지 않도록 손끝으로 손잡이만 잡아 열고 원래 꽂혀있던 위치 그대로 앨범을 꽂아 넣었다. 항상 변함없는 순서. 이게 틀어지는 순간 집안의 평화도 미묘하게 틀어지는 것을 깨닫기까지 참 오래도 걸렸었는데. 알고 나서도 헛된 기대와 희망으로 얼마간을 허비했었다. 관심을 받고 싶어서, 특별함을 증명 받고 싶어서 했던 행동들이 결국 나를 아프게 할 건 생각 못하고 바보같이.

“또, 또.”

“악!”

고개가 기울어지는 것도 모를 만큼 정신없이 과거를 추억하고 있다가 바로 귀 옆에서 들리는 소리에 놀라 주저앉아 버렸다.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네. 쿵덕쿵덕 난리를 치며 뛰는 심장 부근에 손을 얹고 우뚝 서 있는 채예령을 노려보자 녀석은 혀를 차며 잔소리를 했다.

“너, 그 청소하다가 생각에 빠져서 딴 길로 새는 버릇 좀 고쳐라. 이러니까 청소 한 번 하는데 하루를 다 보내지.”

“아씨, 놀랐잖아!”

“잘됐네! 몇 번을 불러도 계에속 멍때리고 있길래 한번 놀래보라고 한 거거든.”

나는 툴툴대면서도 손을 내미는 녀석을 잡고 일어섰다. 혹시 넘어지면서 유리를 건드렸을까 봐 장식장부터 확인했다. 다행히 아무 자국 없이 투명한 상태 그대로였다. 안도감에 절로 나오는 한숨을 쉬면서 가자미눈을 하고 녀석을 보니, 자긴 잘못 없다는 듯이 두 손을 들어 보인다. 그래, 청소 도와달라고 불러놓고 자꾸 딴짓하는 내가 잘못한 게 맞긴 하지.

“내가 미안하다, 미안해. 이젠 딴짓 안 하고 성실히 청소할 테니까, 머리카락 떨어지기 전에 얼른 나가자.”

채예령이 안방을 끝내고, 내가 거실 청소를 마쳤으니 이제 부엌과 화장실만 하면 된다. 내 방과 서재는 어차피 들어가지 않을 걸 알아서 채예령 수준으로 깔끔할 필요는 없는 곳이었다. 잠깐 문을 여닫을 동안에 보일 곳은 채예령 기준이 아니라 내 기준에서 최대한 깨끗해 보이는 정도만 해도 통과였다.

“근데 왜 또 이렇게까지 청소하는 거야? 청소 지긋지긋하다고 다신 안 할 거라며.”

녀석은 부엌으로 향하는 나를 쫄래쫄래 따라오며 물었다. 식기류는 어제 다 꺼내서 설거지한 다음 건조 시켰고, 그러면서 빈 선반이랑 서랍들도 한 번씩 다 닦았다. 이제는 마른 식기 다시 집어넣고, 겉에 닦을 차례다. 나는 멀뚱히 서 있는 채예령에게 테이블과 장식장을 가리키고 건조된 식기를 순서에 맞춰 정리하기 시작했다. 내가 한쪽 선반을 다 채울 때까지 가만히 답을 기다리던 녀석은 한숨과 함께 몸을 움직였다. 그 모습을 힐긋 확인하고 나서 나는 최대한 평온한 말투로 녀석이 기다리던 답을 해주었다.

“엄마 올 거야.”

바지 스치는 소리가 멈추고, 뒤통수가 뜨거워졌다.

“오신대?”

“오신다 그러진 않았는데, 올 거야.”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겪었으니까. 회귀 전, 온통 일그러진 얼굴로 거실에 서 계시던 엄마를 마주했었으니까. 연락이 없어서 올해도 정해진 장소 근처에서 만나 들어가겠구나 생각했는데, 예고도 없이 와 있었다. 채예령이 말한 대로 청소가 지긋지긋했던 내가 바쁜 삶을 핑계로 전혀 관리하지 않았던 집이 엄마의 마음에 들 리는 없었고, 나는 전에 없이 혐오감을 내비치는 얼굴을 갑작스레 맞닥뜨려야 했다. 그 뒤 아무 말도 없이 뒤돌아 나가는 뒷모습을 지켜만 봐야 했던 그때의 심정은 두 번 경험하고 싶지 않을 만큼 선득하고 우울했으므로, 나는 어쩔 수 없이 다시는 하고 싶지 않았던 청소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대로 말하면 안 되었기에, 채예령에게는 미리 생각해놨던 그럴싸한 이유를 댔다.

“곧 할아버지 생신이거든.”

“아.... 벌써 그렇게 됐나?”

“그래, 벌써 그렇게 됐더라. 작년처럼 그냥 생신잔치하시는 호텔 근처에서 만날 수도 있긴 한데, 혹시 몰라서.”

너도 우리 엄마 변덕 알잖아. 씁쓸하게 웃으며 하는 말에 물끄러미 나를 보고 있던 채예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지, 아주머니 가끔 엉뚱하신 거. 그리고 녀석답게 ‘엉뚱하다’고 나름 귀엽게 포장해주었다.

“알았으면 그만 쉬고 얼른 다시 하지? 스테이크 정도는 되어야 도와준다던 비싼 채예령 씨.”

“...거참, 잠깐 쉰 거 가지고 엄청 뭐라 그러네. 지는 아까 계속 멍때리고 있었으면서. 한다, 해! 스테이크의 힘으로 부엌도 먼지 한 톨 안 보이게 만들어 준다, 내가!”

녀석은 팔을 걷어붙이는 시늉을 하더니 비싼 그릇이 진열되어 있는 장식장으로 향했다. 손자국이 얼룩덜룩 묻어있는 유리문에 비친 녀석의 얼굴엔 방금 전에 내게 보였던 장난기 가득한 미소는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분노를 가득 담은 눈빛을 하고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 있는 채예령의 보기 드문 표정은 장식장 문이 열리면서 사라졌다. 나는 녀석의 뒤통수를 가만 보고 있다가 다시 하던 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묵묵히 각자 맡은 구역을 청소하다보니 부엌 청소는 생각보다 일찍 끝났다. 별다른 말을 하지도 않았는데 먼저 화장실로 가는 채예령을 따라나섰다. 녀석은 가던 길에 보이는 서재를 힐긋 보더니 지나가듯 물었다.

“아주머니만 오실 거 같아?”

“...그럼?”

“서재도 하는 김에 해놓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서.”

“내가 했어. 그 정도만 해도 돼, 거긴.”

그 말에 뒤를 돌아본 채예령은 할 말이 많은 것 같아 보였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화장실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동안 물 몇 번 뿌렸던 것이 전부인 화장실을 본 채예령의 잔소리를 잔뜩 들은 후, 화장실 타일에 누워서 자도 될 만큼 깨끗하게 청소했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선 최선을 다해 준비를 마쳤다.

드디어 할아버지 생신 하루 전날, 나는 요 몇 년간 중에 가장 긴장되는 마음으로 현관문을 보고 있었다. 손에 잔뜩 고인 땀을 눌러 닦는데, 열쇠 구멍에 뭔가를 넣는 소리가 들렸다. 왔다.

-딩동

곧이어 들리는 우리 집 초인종 소리. 나는 심호흡을 하며 걸어 나가 잠금장치를 풀고 문을 열었다.

“열쇠 바꿨니?”

현관에는 예상대로 약 1년 만에 보는 엄마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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