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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호 이야기-108화 (108/234)

108화

모든 것이 또렷하지는 않았지만, 굵직굵직한 일들은 기억이 났다. 남들은 술을 마시면 필름도 끊기고 그런다던데, 왜 나는 그것도 안 되는 거냐고. 차라리 기억이 안 나면 조금 찝찝하긴 해도 이렇게 혼란스럽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까지 했을 때, 나는 아픈 머리를 부여잡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아니지. 그건 아니지, 김진호.”

기억이 안 나면 뭐, 그런 일 있었다는 거 나 몰라라 하려고? 아니면 최태혁이 억지로 했다고 합리화라도 하게? 드문드문 끊겨있는 기억 속에서 나는 최태혁의 행동에 감정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일정 부분 순응하고 있었다. 녀석의 억지도, 강제성도 없진 않았지만 나는 녀석이 보여주는 다정함이, 그 모든 스킨십들이 격하게 거부할 마음이 들지 않았을 정도로 좋았다. 마지막에 녀석의 어마어마한 크기를 보지 않았다면, 나는 그대로 녀석과 끝까지 했을 것이다. 나는 끝까지 넣어지지 않았음에도 얼얼한 뒤에 공연히 힘을 주며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어제 박상혁한테는 술 마시고 컨트롤 못 할 것 같으면 안 마시는 게 맞는 거라고 그렇게 당당하게 말해놓고, 술에 기대려고 했다는 것이 한심했다.

“일단 일어나자.”

나는 몸을 움직일 때마다 웅웅 울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침대에서 벗어났다. 홀딱 벗고 있는 내 모습을 애써 외면하면서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는데 방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바지가 보였다. 대충 발로 건드려서 핸드폰으로 추정되는 물건이 발바닥에 닿는 것을 확인하고 허리를 숙였다. 바지 주머니를 뒤져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켰더니, 여러 통의 부재중 전화와 메시지 목록이 주르륵 떴다. 안 그래도 숙취 때문에 눈앞이 어지러운데 머리가 더 아파져 오는 기분이다.

하아, 안 되겠다. 나는 정신을 다잡고 봐야 할 것 같은 마음에 터덜터덜 화장실로 향했다. 찬물을 한참 끼얹고 나서야 어지러운 것이 조금 가라앉았다. 남들이 보면 코웃음 칠 정도의 양만 마셔놓고 술에 잔뜩 취해 진상은 진상대로 부려, 일은 일대로 쳐, 그것도 모자라 머리가 깨질 듯한 숙취까지. 내 몸뚱어리도 가지가지 한다 싶었다.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져 습관적으로 고개를 저으려다 뇌까지 흔들리는 기분에 겨우 동작을 멈췄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은 내버려 둔 채 손만 닦은 후, 다시 핸드폰을 들었다. 전화도 메시지도 대부분 채예령이었고, 그사이에 드문드문 다른 이름이 섞여 있었다. 나는 우선 빨간색 숫자가 두 자릿수인 채예령의 메시지창부터 켜서 내용을 확인했다.

[어디야?]

[집에 간 거야?]

[전화는 왜 안 받아]

[야!]

처음엔 시간이 띄엄띄엄하던 메시지가 뒤로 갈수록 핸드폰만 붙잡고 있었나 싶을 정도로 간격이 짧았다. 술 취한 놈이 말도 없이 없어져서 걱정을 많이 한 모양이었다. 거기다 말다툼이긴 해도 그런 일이 있었던 애가 밖으로 나간 후 돌아오지를 않으니 걱정이 될 만도 했다. 지금 이거 읽고 있을 때가 아니라 생존신고부터 먼저 해야 하는 건가. 채예령 성격에 경찰서에 실종 신고라도 하러 간 거 아닌가 싶어 급하게 맨 끝의 메시지만 확인하고 진짜 그런 거면 바로 전화부터 할 요량으로 화면을 빠르게 내렸다.

[연락받았어. 일어나면 전화해!]

“...뭐지?”

무슨 연락을 누구한테 받았는데 갑자기 얌전해진 거야. 메시지가 온 시간을 확인해 보니 그 전의 메시지들과는 시간이 꽤 벌어져 있었으나, 어쨌든 자정이 지나기 전이었다. 어제 최태혁이 따로 전화하고 그럴 여유는 없었을 것 같은데. 악, 잠깐. 아냐, 어제 일은 일단 떠올리지 말아보자. 아무튼 내가 무사하다는 건 알았다는 거니까 됐다. 나는 핸드폰을 선반에 올려두고 양치할 준비를 하고 나서 다른 메시지들을 확인했다.

[집에 잘 들어갔어?]

[갑자기 없어져서 놀랐잖아!]

[어제 일은 똥 밟았다고 생각해. 그리고 오랜만에 보니까 너무 반갑더라. 앞으로는 종종 연락하면서 지내자, 임마!]

강하민과,

[잘 들어갔냐?]

[어제 멋있더라!]

[일어나면 해장 ㄱ?]

김은수에게서 온 메시지들이었다. 많은 개수는 아니었지만 그 안에 담긴 뜻이 참.... 뭐라고 해야 하지. 참, 복잡했다. 어색하고 갑작스럽고 빈말이겠지 싶으면서도, 어제 일로 전보다 더 가까워진 것 같아서 마냥 빈말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뭐라고 답장해야 할지 몰라 대화창만 번갈아 보다 보니 이상하게 자꾸 잇몸이 근질거렸다. 나는 칫솔질을 멈추고 이를 꽉 즈려물며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문질렀다. 어제 술잔을 마주치며 느슨해진 분위기 속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눈 것이 생각났다.

‘와, 그래서 연락 안 한 거야? 진짜? 야, 씨 이건 너무 섭섭한데?’

‘아니, 아니 그런 게 아니라!’

‘학교 다닐 때야 네가 워낙 숫기 없고 낯가리는 거 아니까 우리처럼 시끌벅적한 애들이 들러붙으면 부담스러워할까 봐 알아서 자제했던 거고, 너 대학 가선 알바 하느라 바쁘다 그래서 먼저 연락 오길 기다린 거라고!’

‘뭐, 애초에 우리도 각자 일로 바빠서 서로 연락 자체를 잘 안 하긴 했지만.... 김진호, 우린 너 친하다고 생각했어! 처음에 친해진 건 예령이 덕인 거 맞긴 한데, 그래도 우리 같이 꽤 재밌게 놀았잖아. 그 정도면 친한 거지!’

이제껏 왜 연락을 하지 않았느냐는 타박에, 그냥 특별한 일이 없는데 연락해도 되나 싶은 마음에 안 했다고 말했을 뿐인데 테이블에 앉아있던 아이들이 일제히 한마디씩 섭섭함을 토로했다. 너무 당황스러워서 허둥지둥 손까지 내저어가면서 그런 뜻이 아니었다고 부정 아닌 부정을 해봤지만 그런 미약한 몸짓으로는 그들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결국 이제는 친한 친구라는 것을 건배로써 결의하자는 분위기에 휩쓸려 피하고 있던 소주를 한 잔 마시고 나서야 섭섭함 토로하기 전쟁은 잠잠해졌다. 그 뒤로는 마시던 맥주를 마저 마시고, 또 무슨 얘길 하다가 소주를 한 잔 더 마시려는데 마침 지나가던 채예령이 건넨 한 마디가 또렷이 기억났다.

‘김진호! 너 술도 약한 애가 소주 그렇게 확확 마시다 큰일 난다, 너! 그거 마시고 물도 꼭 마셔.’

그 말을 들었을 땐 아무리 그래도 한 잔 더 마시는 걸로 취하겠나 싶었는데, 그 뒤부터 모든 사건들이 블러 처리된 것처럼 기억나는 것을 보면 그 한 잔에 취한 게 맞았다. 그래도 대학 다닐 땐 이 정도는 아니었던 거 같은데.... 안 마시는 동안 안 그래도 알쓰였던 내 몸은 소주 두 잔에 취해버리는 몸이 되어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 후 나는 기분이 업 되어서 답지 않게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꺼내놓고, 시답잖은 농담에 미친 듯이 웃다가 점점 더 올라오는 취기에 몸을 가누지 못할 즈음이 되었을 때 최태혁의 전화를 받았던 것 같다. 그리고 나오라는 말에 냉큼 나가서 가게 앞에 서 있는 녀석의 얼굴을 만지작거리다가, 또 공주님 안기로 안겨서 차에 가고, 종혁 씨에게 뜬금없이 손가락 하트를 날리고....

“아니, 생전 안 하던 걸 왜 거기서 갑자기....”

황당해하던 종혁 씨의 얼굴이 떠올라 양칫물과 함께 자책하는 말을 뱉어냈다. 최태혁이 꿀밤을 날린 것이 십분 이해가 되었다. 그 뒤에는 기억이 잠깐 끊겼다가 눈을 떴더니 내 방 천장이 보였고, 그 뒤로는 한참 대화를 했던 것 같은데.... 나 진짜 별 소릴 다했구나. 점점이 떠오르는 말들에 얼굴이 빨개질 정도로 쪽팔림이 올라왔다. 진짜 미쳤어, 김진호. 아무 말이나 한 거라고 치부하기엔 말했던 것들 모두 평소에 자주 생각했던 것들이었다. 그렇다고 그걸 날것 그대로 술술 불어버리면 어떡하냐. 거기다 경험 많은 남자가 좋고 어쩌고 하는 것까지 말하고 먼저 뽀뽀를 했다는 건, 빼도 박도 못하게 ‘나 잡아 잡숴’ 한 거 아니냐고.

그런데 녀석은 마지막 순간에 본인의 욕망보단 내 의견을 따라 주었다. 힘들었을 텐데, 그런 경험이 없는 내가 생각하기에도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 같은데, 최태혁은 새끼손가락을 걸어주었다. 누군가의 주먹질이 있거나 통곡을 하거나 세이프 워드를 외치는 일이 없었는데도. 그리고 내가 잠들 때까지 화를 내거나 짜증 한번 내지 않고, 오히려 토닥이고 쓰다듬어주며 안심시켜 주었다.

나는 또다시 마음대로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진정시키기 위해 입을 헹구고 한참 동안 수건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녀석에게 소중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될 줄이야. 누군가에게 이 정도로 보호받는 날이 올 줄이야. 아침에 일어난 직후에는 너무 당황스럽고 부끄러웠는데 이렇게 찬찬히 생각해보니 어제는 내 인생에서 손꼽히는 행복한 날이었던 것 같다. 마음에 쌓여있던 것을 털어놓고, 마음을 편하게 주고받을 친구를 얻었으며, 말은 안 했지만 사실 가장 무섭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나를 어떤 형태로든 상처 입히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해주었다.

나는 거실로 나와 소파 앞에 양반다리를 하고 자리를 잡았다. 가장 먼저 채예령, 그 뒤에 강하민과 김은수 순으로 답을 보냈다. 강하민과 김은수에겐 어떻게 보내야 할지 곰곰이 생각하고, 몇 번이나 문장을 썼다 고치느라 메시지 간에 시간 텀이 나버렸지만, 그래도 꽤나 만족스러운 답을 보낼 수 있었다. 회귀 전이면 몰라도 요즘의 나에겐 나름대로 시간의 여유도, 심적인 여유도 있으므로 이 인연을 잘 이어 나갈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이 싹텄다.

나는 뿌듯한 마음을 담아 콧김을 한번 세게 내뿜고 마지막으로 최태혁과의 메시지창을 켰다. 일어나면 연락하라고 했던 녀석에겐 먼저 일어났다는 보고를 해야겠지? 나는 먼저 [저 지금 일어났어요]라고 보내놓고 어제 일에 관련해서 무슨 말을 해야 하나 고민하느라 이 말 저 말을 쓰다 지웠다. 그러다 일단 감사 인사부터 하자는 결론을 내리고 [어제 감사했습니다]를 치기 시작했는데, ‘했’까지 쳤을 때 앞에 보낸 메시지 옆의 숫자가 없어지더니 액정에 [최태혁]이라는 글자가 크게 떴다. 뭐야, 벌써 확인한다고? 거기다 바로 전화? 일하다 쉬고 있었나?

“여, 여보세요?”

- 숙취는.

어떤 소리를 들을까 긴장하고 받았는데, 다행히 녀석의 목소리는 평소와 같았다. 나는 작게 한숨을 뱉고 왠지 흐물거리는 입가를 내리누르며 답했다.

“조금 있는데, 괜찮아요. 참을만한 정도….”

- 애들이 숙취 약 사놨을 거다. 먹어.

“예? 사놨다고요? 어디에요?”

자는 사이에 집에 두고 갔다는 건가? 그 협약인가 뭔가를 하고 나선 마음대로 집에 들어오는 일은 없었지만, 그 뒤에 열쇠를 바꾸진 않았으니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조금 떨떠름한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이리저리 둘러보는데, 최태혁이 말을 정정해주었다.

- 문 앞에 나가봐.

들어온 것은 아니었나보다. 하긴, 본인들이 들어온 적은 있어도 누굴 들여보낸 적은 없었지. 녀석에게 보이진 않겠지만 나는 머쓱하게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문 앞에 나가보니 작은 상자가 있었다. 테이프로 봉해진 것이 아니라 그냥 닫혀있는 것을 보아, 택배가 아니라 누가 두고 간 것이 확실해 보였다. 숙취 약만 들어있다기엔 좀 거창한데. 나는 궁금한 것을 못 참고 그대로 쪼그려 앉아 핸드폰을 어깨와 귀 사이에 끼우고 상자를 열어봤다. ...응?

“형, 이게 뭐....”

- 아, 다른 것들은 방에 둬라. 네가 약속을 지키는 날 필요할 것들이니까.

상자 안에는 마시는 숙취해소제 한 병과 알약상자, 그리고 다양한 종류의 젤과 콘돔들이 있었다. 황당해서 입을 벌리는 내게 최태혁은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할 거다, 김진호.’하고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침을 꿀꺽 삼키며 상자를 들어 올렸다. 그것들은 긴 망설임과 약간의 자괴감, 필사적인 자기합리화와 자기 설득을 거쳐 내 방 한구석에 비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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