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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호 이야기-104화 (104/234)

104화

“문란...?”

이해가 되지 않는지 되묻는 최태혁의 눈썹이 하늘로 치솟아 있었다. 그래, 녀석들이 연애를 몇 명이랑 어떻게 했는지 아는 게 없으니, 정말 문란한지는 모르지. 아니라면 억울해 하는 게 맞긴 해. 근데 내가 보기엔 문란해 보였다고. 행동을 그렇게 하잖아, 행동을.

“툭 하면 키스하고, 방심하면 옷 속으로 손 쑥 들어오고! 쫌만, 아주 잠깐만 방심해도 홀라당 알몸 만들고! 막 지네 좋을 대로 이리저리 만져대고 괴롭히고. 얼마나 경험이 많으면 아주우 뻔뻔한 얼굴로 확확 그러냐구.”

답답한 마음에 소리를 질렀더니 머리가 더 징징 울렸다. 나는 반쯤 일으켰던 상체에 힘을 빼고 침대 위에 엎드려버렸다. 이씨, 기분 좋았는데 또 짜증 나네. 슬슬 졸음도 몰려오는데 이대로 그냥 자버릴까.

“경험이 없는 사람이 좋은 건가?”

아니지. 그건 또 아니지. 최태혁 넌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에이씨, 머리 겁나 아프네. 부딪히기는 같이 부딪혔는데, 왜 나만 아파하는 것 같지. 힐끔 쳐다보니놈은 벌써 괜찮아 보였다. 이건 뭔가 불공평해. 아프기도 나만 아프고, 이야기도 구구절절 나만 하고 있고. 나는 두개골이 징징대는 게 가라앉을 때까지 입을 다물기로 했다. 내가 뭐, 질문받으면 다 답해줘야 해? 몰라, 나 아파.

그렇게 손에 얼굴을 묻은 채 엎드려 있자 녀석도 별말 없이 침묵을 지켰다. 얼마나 조용히 있었을까, 시간이 지나니 머리 아픈 건 나아졌는데 이제는 입이 근질근질하기 시작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말이 하고 싶냐. 결국 나는 충동적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비밀인데.... 이거 진짜 비밀이다?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특히 다른 네 명! 걔네들이 알면 큰일 나.”

“그래.”

“솔직히, 아주 솔직히 말하면, 내가 누굴 만난다면 경험이 많은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긴 해.”

스스로도 변태 같아서 혼자 생각하기만 한 비밀은, 어찌 보면 당연한 거였다. 내 상상 속의 남자는 대부분의 것들이 나와 정반대였으니까. 나는 언제나 내가 가지고 싶었으나 가지지 못한 점, 혹은 스스로 모자란다고 생각한 점들을 보완해줄 수 있는 사람을 상상하곤 했다. 때문에 스스로 못난 점을 발견할 때마다, 상상 속의 남자는 점점 잘난 모습이 되어갔다. 그 점은 관계에 대한 상상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관계, 특히 첫 경험에 대해서 많이 아프지 않고, 너무 어색하지 않고, 서로 충분히 기분이 좋을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려면 경험이 아예 없는 나를 데리고도 서로 좋은 추억을 만들 수 있게끔, 능숙하게 리드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부분에서조차 기대려고 하는 스스로가 한심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둘 다 서툴면 대참사가 일어날 것 같았기 때문에 언제나 내 상상 속의 남자는 경험이 많았다.

“말이 앞뒤가 안 맞는데.”

기껏 비밀 하나 알려줬더니 녀석은 인상을 한껏 찌푸리는 걸로 화답했다. 앞뒤가 안 맞기는. 경험이 많은 거랑 문란한 거는 전혀 다르거든?

“아니, 봐봐. 자연스러운 리드랑, 너네처럼 막 어? 불도저처럼 꼬추부터 만지고, 찌찌부터 만지고 그러는 거랑 같아? 첨엔 수줍게 뽀뽀하고, 또 로맨틱하게 키스하고, 그리고 난 다음에 멜랑꼴리해지고 그르면 그때 딱! 이거저거 응? 막, 어?”

“이거저거?”

“알잖아 멍청아! 아무튼 그렇게 차근차근 발전해나가면서 그 순간순간에 실력을 발휘하는 걸 원하는 건데! 너네는 그냥 눈 뜨면 알몸이고 자기들 내키는 대로 아주 찌찌에 꼬추에 저번에는 거기까지… 이래선 장난감 인형 취급이랑 다를 게 뭐냐고요!”

말하면서 열이 확 올랐다. 내가 맨날 싫다고, 하지 마라고 하는데도 자기네들 하고 싶은 대로 하다가 내가 울거나 해야지만 겨우 멈춰주고. 마치 나는 막 대해도 되는 사람처럼 거칠게 몰아붙이고. 생각할수록 서러웠다. 내가 원하는 첫 경험은 그런 게 아니었단 말이야. 좀 더 부드럽고, 로맨틱하고, 사랑받는 그런 거였는데. 지금까진 그래도 끝까지 가지 않은 걸로 첫 경험이 아니다- 하며 위안을 삼고 있지만, 정새빈이 섹스할 거다 말한 것도 있고, 저번에 쌍둥이들이 한 걸 생각하면 머지않아 그런 날이 도래할 것 같았다. 억울해. 서러워.

“짜증 나! 너네 다 미워! 씨이, 내가, 내가 이 집을 떠날 수만 있었어도. 내가 멀리 있어도 날 잊지 않을 거라고, 완전히 타인이 되는 건 아닐 거라는 확신만 있었어도 진작에 너네 한 대씩 때렸어. 싸움은 못 해도 뒤통수라도 때리고 멀리멀리 도망 갔...!”

“김진호.”

별안간 입이 막혔다. 내가 소리를 지르고 질문을 무시해도 표정만 바꿀 뿐, 나에겐 별 재제를 가하지 않았던 최태혁이 말하고 있는 도중에 내 입을 막아버렸다. 내 얼굴의 반을 다 덮고도 남는 큰 손은 무감정한 얼굴과 함께 매우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조금 전과 완전히 달라진 분위기에 덜컥 겁이 나 아무 말도 못 하고 올려다봤다. 녀석은 그런 나를 얼마간 관찰하듯 응시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도망은, 없어.”

한 음절씩 끊어 말해서 그런가, 말이 귀가 아니라 뇌에 직접 박혀 들어오는 기분이었다. 어차피 가지도 못하는 도망이지만 간다고 해도 사실 쟤네들 입장에선 크게 아쉬울 것 없을 것 같은데. 왜 저렇게 살벌하게 구는 거야. 정말 누가 보면 나에 대한 감정이 깊고 깊어 집착이라도 생긴 줄 알겠다. 근데 그런 거 아니잖아. 그러니까 그렇게 자꾸만 마음대로 만지는 거잖아. 내 의견은, 내 로망은 다 무시하고 그러는 거잖아. 나는 대답을 종용하듯 빤히 보고 있는 최태혁에게서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러자 녀석은 한숨을 쉬더니 내 몸을 번쩍 들어 올렸다.

“이게 뭐 하는...!”

날 이리저리 움직여 자기 다리 위에 앉힌 녀석은 어느새 축축해진 내 볼을 훔쳐 주면서 속삭였다.

“해 봐.”

“...뭘.”

“내가 너한테 어떤 식으로 해줬으면 좋겠는지.”

그러니까 뭘. 도망은 없다느니 하면서 사람 겁주더니 갑자기 뭘 하라는 거야.

“불도저 같은 건 싫다고 하지 않았나. 막 다뤄지는 것 같아 싫다며. 그러니까 네가 알려 줘. 어떤 순서와 방식으로 해야, 네가 원하던 자연스럽게 리드하는 경험 많은 남자가 될 수 있는가.”

반칙이었다. 웃는 얼굴은 순해 보인다는 말이 이걸 보고 한 말이었나 보다. ‘내 강아지가 서럽게 우는데, 그 정도는 해줘야지.’ 하고 속삭이면서 웃는 얼굴을 보는데, 내가 정말 예쁨 받는 강아지가 된 기분이었다. 내가 멍하니 있으니 녀석은 재촉하듯 엉덩이를 토닥였다. 어, 아니, 그, 스킨십을 해보라는 거야? 내가 원하는 방법을 알려 달라는 게, 그런 소린 거지?

“알려주지 않으면, 하는 수 없이 내 방식대로 하는 수밖에.”

아팟! 나는 갑작스러운 통증에 다급히 몸을 일으켰다. 뒤를 돌아 확인해보니 방금 전까지 토닥이던 손이 내 엉덩이를 터트리기라도 할 것처럼 꽉 쥐고 있었다. 이러지 말라고 방금, 방금 말했는데. 나는 또다시 치미는 서러움에 아랫입술을 앙 깨물고 녀석을 째려봤다. 그러나 녀석은 그저 한 쪽 입꼬리만 올릴 뿐 손을 놔주지는 않았다. 벗어나려 움찔거려 봤으나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결국 엉덩이는 내 의지와는 달리 녀석의 다리에 털썩 주저앉고 나서야 자유가 되었다.

“이거 아니야. 이런 거 아니고, 내가 싫다 그러면, 그러면 놔줘야 해. 아까 말했잖아.”

“놔줄 순 없어.”

“...그러니까 나는 장난감이 아니라고...!”

“알아. 아니까 묻는 거다. 그래서 묻고 있는 거야. 내가 너와 이런 걸 하고 싶을 땐 어떻게 해야 네가 서러워하지 않을지. 진호야. 내가 널 장난감으로 여기고 있었다면, 넌 이미 망가졌어.”

네가 보기엔 내가, 물건 같은 걸 소중히 여기는 타입으로 보이나? 녀석은 내 눈가를 쓸며 그렇게 속삭였다. 어딘가 섬뜩한 말인데 이상하게 소름이 돋지는 않았다. 스스로 생각해도 좀 미친 것 같긴 한데, 망가트리니 어쩌니 하는 얘기보다 내가 서러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이 먼저 귀에 들어왔다. 게다가 지금도 결국 제멋대로 구는 주제에 이게 무슨 말같지도 않은 쇼인가 싶으면서도, 무작정 만져대기만 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는 생각도 들었다.

최면인가. 저 파란 눈에 최면 기능도 있는 건가. 아니, 아니다. 아무래도 내 몸이 문제인 것 같다. 어지러운 것도, 몸에 열이 오르는 것도, 혀가 꼬이는 것도 많이 나아졌는데, 이상하게 심장은 원래 자리로 돌아오지 않고 여전히 머리에서 쿵쿵대고 있었다. 뇌가 쿵쾅대서 그런지 온몸이 쿵쾅대는 느낌이다. 이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녀석의 어깨를 짚고 일어난 것은, 그 쿵쾅대는 소리에 사고가 흐려졌기 때문이었다. 나는 녀석의 파란 눈에 담긴 나를 보면서 작게 말했다.

“우선은, 우선은 입을 맞추기 전엔 분위기를 잡아야 해. 얼굴을 쓸어주고, 예쁘다는 듯이 보다가, 그러다가 다가가는 거야.”

나는 망설이다가 눈을 질끈 감고 입을 갖다 댔다. 살짝 어긋나서 녀석의 윗입술과 인중에 닿은 것 같았지만, 어떻게 하는지만 보여주는 거니까- 하고 되뇌면서 얼른 얼굴을 떨어트렸다. 가볍게 대기만 한 거라 쪽 소리도 나지 않았다. 녀석을 내려다보며 원래 뽀뽀는 이렇게 로맨틱하게 하고 싶었다고 말하자, 최태혁은 슬쩍 눈썹을 들어 올렸다 내리더니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키스는?”

“키, 키스는 여기서 더 오래 입 맞추게 되면, 그냥 분위기 봐서 자연스럽게....”

이번엔 말로만 설명하려 했는데 녀석의 손이 무릎으로 서 있던 내 골반을 잡고 아래로 잡아당겼다. 그리고는 녀석과 마주 보게끔 내 턱을 들어 올렸다. 눈을 마주치면서 한 손으로는 앞머리를 쓸어주고, 웃는 얼굴로 내 코에 코를 부빈 녀석은 그대로 고개를 기울여 입을 맞췄다. 닿자마자 떨어졌던 나와 달리 계속 붙어 있는 입술에 당황한 내가 놈을 밀쳐내기 직전, 녀석의 혀가 쑥 들어와 내 입안을 진득하게 훑더니 질척한 소리와 함께 떨어져 나갔다. 그러더니 녀석은 나를 향해 물었다.

“이렇게 하면 되는 건가?”

과제를 확인받는 학생 같은 질문에 나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고개 왜 끄덕인 거야, 김진호.

“그럼 이다음은, 어떻게 해주면 될까.”

응? 진호야. 그렇게 말하는 녀석의 손은 내 셔츠 단추를 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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