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고작 그거 마시고 이렇게 취하기도 쉽지 않았을 텐데.”
나 말짱한데. 식당에 막 나왔을 땐 좀 알딸딸하긴 했지만 지금은 눈만 감고 있으면 전혀 아무렇지도 않았다. 심장이 머리에서 뛰고 있는 것도 이렇게 가만히 있다 보면 뇌가 두근두근거리는 느낌이라 묘하게 신나고 좋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최태혁. 맨날 무게 잡고 자기 혼자 어른인 척 다 하지만 사실은 엄청난 변태인 거 다 소문내버릴라.
근데 그 소문은 어디다 내야 하는 거지? 지금은 같이 대학을 다니고 있지도 않고, 공통으로 아는 사람이라곤 예령이와 다른 네 명뿐인데, 걔네들한테 말한다고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우선 예령이한테는 말하는 순간 또 잔뜩 실망한 눈을 할 걸 알기에 내키지 않았다. 그리고 사실 게이라고 말한 것도 일반적으로 보면 큰 용기인데, 거시기를 만지는 둥 하는 자세한 이야기를 하기는 상상만으로도 소름이 돋았다.
그럼 남은 건 다른 네 놈들인데, 지네들도 비슷한 짓을 한 마당에 나한테 더 이상한 짓을 하려고 했으면 했지 최태혁 이상하다고 같이 뒷담 해주지는 않을 것 같았다. 아니 근데, 생각해보니까 걔네들이 얘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결코 최태혁 이상하다고 말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닌데? 당장 얼마 전에 쌍둥이가 한 짓하고만 비교해도 최태혁은 양반인 수준이었다. 아니, 양반까지는 아닌가. 한....
“중인. 응. 최태혁은 다른 놈들에 비하며는 중인이야.”
“하아.... 이젠 별....”
얘 왜 나 헛소리하는 사람 취급해? 이건 못 참아!
“야! 이씨, 칭찬을 해주는데 그건 모야! 너가 어? 내 꼬추를 마졌지마는, 그런 변태지만 그래두 막 이상한 데 손가락 넣었던 쌍둥이보다 낫다고 해주는 건데 왜 한숨 셔?!”
나도 모르게 몸에 열이 확 돌면서 욱하는 마음과 함께 몸에 힘이 돌아왔다. 여전히 어질어질했지만 그래도 힘을 빡 주고 몸을 일으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건방지게 비스듬히 누운 자세 그대로 눈만 굴려서 올려다보는 녀석을 향해 삿대질을 하면서 소리를 질렀다. 원래 싸움은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거랬어. 어차피 우리 집은 주택이라 층간소음으로 달려올 일도 없었다.
“손가락을, 넣어?”
“그래! 앞에서 후가 만져서 막, 정신 하나도 없는데 막, 뒤에서 갑자기 호가 입에 침 묻히더니, 막!”
“김진호. 숨.”
과하게 흥분해서 그런지 숨이 폐까지 들어가지 못했다. 머리에서 울리는 심장박동도 거칠게 쿵쾅거렸다. 점점 숨을 가쁘게 내쉬자 가만히 있던 최태혁이 몸을 일으키더니 쉬이-진정해야지, 하고 말하면서 등을 쓸어내렸다. 나는 쓸어내리는 속도에 맞추어 천천히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또, 또 버릇이 나왔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이것저것 다 기억나지. 나는 순간적으로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감정 없는 눈동자를 애써 떨쳐냈다. 그리고 흐느적거리는 내 몸을 받치고 있는 최태혁의 손 위로 조용히 손을 얹었다. 내 가슴 위에 올린 커다란 손 위에 올라가 있는 내 손. 지금은 심장이 가슴이 아니라 머리에 있어서 그런지 별다른 박동은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진정하는 김에 몸에서 힘을 완전히 빼버렸다. 최태혁의 손과 팔이 앞으로 늘어진 내 무게를 온전히 지탱하고 있었다. 흔들림 없는 편안함이네. 중력으로 인해 흉부가 좀 눌리는 느낌이 들긴 했지만, 그게 또 묘한 안정감을 주었다. 화났다가 침울했다가, 그러다가 또 편안했다가. 기분이 제멋대로 오락가락했다. 사춘기가 지금에서야 온 건가. 그래서 자꾸 야한 기억이 떠오르고 그런 건가. 나는 고등학교 다닐 때도 막 그렇게 혼자 위로하고 그러지 않았었는데, 왜 이제 와서 이런담. 이 정도면 뒤늦게 눈을 떴다고 얘기해야 하려나. 아니, 이 나이에 새삼스레 눈을 뜨는 건 또 뭐야. 내 생각인데도 어이가 없네.
이게 다 저놈들 탓이었다. 나는 참 성욕 없는 사람이었는데, 쟤네들이 이상한 거 알려주는 바람에 요즘엔 전보다 더 자주 자극적인 것들을 찾아보게 되었다. 문제는 혼자서는 아무리 애를 써도 만족스럽지 않다는 것이다.
“쓸데없이 능숙해선. 이 경험 대마왕 놈들.”
“...뭐?”
“도대체 얼마나 하고 다니면, 어? 그렇게 막 손이 막, 혀도 막, 어휴....”
내가 한숨을 뱉고 나서 최태혁도 따라서 한숨을 쉬었다. 오늘 유독 한숨을 많이 쉬는 것을 보아 녀석도 이래저래 숨이 차는 모양이었다. 나는 무게라도 줄여주자는 심산으로 무게중심을 옆으로 옮겨 녀석의 손에서 미끄러지듯 떨어졌다. 그러고는 다시 눈만 굴려서 최태혁을 봤다. 녀석은 어딘가 복잡한 표정을 하고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말이야, 너네가 나 애정 한다고 말해주고, 비밀도 알려주고, 풍선으로 절벽에서 구해주고, 또, 내 쿠션이 되어주고, 그래서 진짜 고맙거든? 나도 사람이라서 있잖아, 기쁘고 좋고 그래. 진짜루.”
뭔가 내가 원하지 않는데 말이 술술 나오는 느낌이었다. 이게 바로 속에 담아뒀던 말이 나온다는 것인가 보다. 내가 생각해도 맥락에 어긋나는 주제인데. 입을 여니 말이 나갔고, 그 말이 다시 내 귀로 들어오고 나서야 나도 내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알게 되는, 아무튼 이상한 상황이었다.
“근데 너네가 이렇게 백날 해봐라. 내가 너네한테 ‘어머나! 너에게 빠져버렸어!’ 하는 날이 오나.”
어, 이건 헛소리로 안 들리나 보다. 갑자기 최태혁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나는 말이야, 나를 너어어무 사랑하거든? 왜냐면은, 온 세상에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어서 그래. 그래서 내 사랑은 바빠. 나한테 주느라고.”
나는 턱을 치켜세우고 눈을 내려뜨면서 새침한 표정을 지어냈다. 웃으라고 한 건데, 힐끔 본 녀석은 여전히 진지했다.
“내가 주면, 올 거라고 믿고 하는 게 연애고, 사랑하는 방법 같은데, 나는 누군가가 나를 사랑해 줄 거라는 걸 못 믿겠어. 어렸을 땐 크면 생기겠지, 희망하면서 상상의 인물도 만들고 그랬는데, 다 부질없는 거 같아.”
“...상상의 인물?”
“그냥, 그냥 그런 거 있잖아. 나를 나대로 사랑해주는 사람. 나랑 있으면 행복해지고, 웃음이 나고, 내가 아프면 달려와 주고, 무슨 일이 있어도 옆에 있어주는, 내가 마음 놓고 화를 낼 수 있게 해주는 사람. 근데 이제, 동정심이 섞여 있으면 안 돼. 아니, 있어도 되는데 그게 사랑보다 크면 안 돼.”
어째서인지 나른해지는 분위기에 맞춰 나는 옆으로 돌아누웠다. 다시 새우처럼 몸을 말자 앉아있던 최태혁도 나와 마주보게끔 누웠다. 녀석은 손으로 내 뒤통수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나는 그런 최태혁을 빤히 보다가 씩 웃으면서 말했다.
“그런 의미에선 너네 합격이긴 해. 동정보단 소유욕이 나아. 내가 불쌍해서 주는 애정은, 내가 불쌍한 게 끝나면 같이 끝나더라고, 보통은. 그게 나쁘단 거는 아니고, 당연한 건데. 근데, 매번 아팠어. 아아, 내가 아니라 내가 처한 상황에 대한 애정이었구나. 내가 아니구나. 그게 너무 아팠거든.”
아닌 사람도 있는 걸 안다. 동정이 나쁘다는 건 절대 아니다. 그 동정심이라는 것에 구원받은 것도 몇 번이나 되니까. 그러나 연인으로서 본다면 싫었다. 연인이 나를 동정한다는 가정만으로도 불안했다. 그런 사랑을 받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생긴 건.”
“웅?”
“그 상상 속 남자. 어떻게 생겼었나.”
어떻게 생겼냐라. 말해주기 좀 그런데.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던 내 은밀한 취향이 까발려지는 느낌이라 영 찝찝했다. 말을 해줘, 말아. 입술을 한껏 오므리고 고민을 하고 있으니 연신 뒤통수만 쓰다듬던 녀석의 손이 앞머리를 크게 쓸어 올렸다. 그러면서 고개를 젖히게 만들어 자기랑 눈을 맞추게 만든 최태혁이 다시 한번 어떻게 생겼는데, 하고 물었다. 그래, 이게 뭐 중요한 거라고. 어차피 상상 속의 인물인데.
“일단 엄청 듬직했어. 항상 나보다 다 컸어. 그리고 엄청 세고, 직설적이고, 자기 욕망에 충실하고, 다 잘해. 공부든 운동이든 인간관계든 다. 또, 나 안 불안하게 약간의 집착도 있고, 솔직하고. 아, 이건 생긴 게 아니네. 음, 얼굴도 잘생겼었어.”
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양심적으로 눈을 마주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상상 속의 남자여도 이 정도면 전설의 동물 수준이었다. 이래 놓고 있을 리가 없어서 포기했네 마네 했다니. 아니 근데 상상하면서 일부러 단점 넣는 사람이 어딨어? 상상인데 다 좋은 것만 때려 넣는 게 당연하지. 나는 다시 당당해지기로 마음먹고 입을 앙다문 채 눈을 치켜떴다. 최태혁은 그때까지도 이마에 대고 있던 손을 볼로 옮기며 입을 열었다.
“그럼 생긴 것도 합격이겠군.”
“...잉?”
“키 크고, 몸 좋고, 힘세고, 공부나 운동도 잘했고, 인간관계야 여러 가지 형태가 있는 거니까. 직설적이고 욕망에 충실한 건 너도 이미 알 테고, 집착은.... 네 기준보단 조금 더 있는 것 같지만 그래도 되도록 네 신체를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부릴 생각인데. 어때.”
이만하면 합격점 아닌가? 최태혁은 이마가 맞닿을 만큼 가깝게 다가와서 그렇게 속삭였다. 말투도 은근한 것이 마치 악마의 속삭임 같았다. 잘생긴 데다 목소리까지 좋아서 더 그렇게 느껴졌다. 그러나 미안하지만 최태혁 씨. 요 몇 달간 너네들 덕분에 난 이제 어지간한 미남계엔 안 넘어가거든요? 나는 머리를 뒤로 조금 뺐다가 세게 앞으로 내려찍었다.
“윽.... 너!”
안 그래도 어지러웠는데 박치기를 하니까 뇌가 두개골 안에서 춤을 추는 것 마냥 어지러웠다. 천하의 최태혁도 머리에 박치기를 당하면 아프긴 한지,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더니 분노를 잔뜩 담은 낮은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나는 잡고 있으면 흔들림이 좀 멎을까 싶어 양손으로 내 머리를 쥔 채로 녀석에게 쏘아붙였다.
“합격은 무슨 개코나! 너네들은 임마, 아주 결정적으로 너무 대놓고 문란해서 다 탈락이야 이것들아!”
내가 분명 앞에서 말한 게 있는데 뒤에 나온 기준 몇 개에 부합한다고 어떠냐고 묻다니. 이 자식이 나를 아주 물로 본 것이 틀림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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