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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호 이야기-102화 (102/234)

102화

최태혁이 왔다. 전화해서 대뜸 공주님이라고 부르며 당장 나오지 않으면 쳐들어가겠다고 협박하더니, 정말 식당 문을 열자마자 녀석이 보였다. 짝다리를 짚은 채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 꼴이 뭔가 단단히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새였다. 나는 지금 기분 엄청 좋은데, 참 분위기 못 맞추는 놈이었다. 평소라면 쫄아서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갔겠지만, 오늘은 나에게 특별한 날이라 그런지 녀석도 같이 기분이 좋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자꾸 올라갔다 내려갔다 제멋대로 휘청거리는 길을 겨우 걸어서 녀석의 앞으로 다가가 손을 뻗으면서 타박했다.

“얌뫄! 이런 날엔 인상 찌푸리고 그르능 거 아이야!”

최태혁은 내 손이 자신의 눈에 닿을 만큼 가까워지는데도 깜빡임 하나 없이 내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잔소리 좀 한다고 눈으로 시위하는 건가. 눈빛으로 뚫어버리겠다, 뭐 그런 건가. 하지만 오늘의 김진호는 굴하지 않지. 나는 파란 눈동자를 향해 씩 웃어주고 ‘주름아 쫙쫙 펴져라’ 하고 주문을 외우면서 최태혁의 찌푸린 미간을 열심히 문질렀다. 그런 내 정성을 하늘이 알아준 것인지 다행히 팔이 아프기 전에 미간이 펴졌다. 이제 입꼬리만 올라가면 웃는 얼굴 완성이다. 입꼬리는 한쪽만 올라가면 비웃는 얼굴이 되기 때문에, 양손을 써야 할 것 같았다. 나는 몸을 지탱하기 위해 최태혁 가슴팍을 야무지게 쥐고 있던 나머지 손도 힘겹게 끌어올렸다. 그리고 몸이 앞으로 쓰러지기 전에 재빨리 녀석의 양 볼을 잡으려 했으나, 어쩐지 손이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를 않았다.

“넘어진다.”

그렇게 말한 최태혁은 내 손목을 잡아 내리더니 어깨를 감쌌다. 어깨동무하자는 건가. 고개를 비스듬히 하고 녀석의 어깨높이를 가늠하는데, 키가 워낙 커서 그런지 나보다 한참 위에 있었다. 저기에 팔을 올려놓으면 조금만 지나도 어깨가 뻐근할 것 같았지만, 어제 내 형이 돼주겠다는 말까지 한 놈에게 매정하게 굴고 싶지 않았기에 결연한 마음으로 팔을 뻗었다. 그러나 내 팔을 녀석의 어깨에 걸치는 것과 동시에 녀석이 내 몸을 훅 들어 올린 덕분에, 어깨동무가 아니라 목을 끌어안는 것처럼 되어버리고 말았다.

“어어...?”

이놈이 또 무슨 짓인가 싶어 인상을 확 찌푸렸더니 녀석은 반대로 피식 웃었다.

“그만 까불고 집에 가야지. 봐, 애들도 기다리잖아.”

최태혁이 턱으로 가리킨 곳에는 아는 얼굴이 서 있었다. 내 눈에 보이는 것은 한 명인데, 애‘들’이라고 하는 거 보면 또 어제처럼 나머지는 차에 타 있나 보다. 으음, 나한테 손을 흔들고 있다는 것은 정말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거겠지. 그렇다면 가주는 것이 인지상정! 찌푸렸던 인상을 펴고 가자는 뜻을 담아 차가 서 있는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최태혁이 걸을 때는 길이 얌전한 건지, 녀석은 긴 다리로 성큼성큼 잘도 걸어 금방 차에 도착했다. 그리고 종혁 씨가 문을 열어 둔 뒷좌석에 내려놓았다. 나는 자꾸 말을 듣지 않는 몸을 최태혁에게 반쯤 기대고 나서야 겨우 의자에 앉을 수 있었다. 녀석은 내가 제대로 앉을 때까지 지켜보더니 어딘가로 가버리고, 뒷좌석 문을 잡고 있던 종혁 씨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면서 천천히 문을 닫았다. 마치 왕자님이라도 된 것 같은 대접에 감사의 의미로 종혁 씨를 향해 잘 움직여지지 않는 손가락으로 하트를 만들었다가, 어느새 반대편으로 탄 최태혁에게 꿀밤을 맞았다. 제법 강렬한 통증에 째려보면서 소리를 질렀으나, 끝까지 시치미 떼는 녀석에게 삐져 집에 도착할 때까지 입을 꾹 다물며 시위했다. 그렇게 조용히 있다 보니 중간에 쏟아지는 잠 때문에 살짝 졸았지만, 다행히 뻥 뚫린 도로 덕에 완전히 잠들기 직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억...!”

비틀거리며 내리려다 발을 헛디뎌서 넘어질 뻔했는데, 다행히 단단한 뭔가에 걸려 겨우 몸을 가눌 수 있었다. 술기운과 잠기운을 떨쳐내려고 세차게 고개를 저은 후 올려다보니 사람 얼굴이 두 개로 보였다.

“헤헤...케루베로스다 케루베루스.”

까맣고 파란 것이 옛날 만화책에서 봤던 머리 세 개 달린 개를 똑 닮았다. 까맣고 파라니까 최태혁이겠지? 아직 시위가 끝난 게 아니었으므로 잠시 밀쳐내야 하나 고민했지만, 다리가 후들거려서 혼자는 못 걸을 것 같았다. 아까 나 때린 건 이제 봐주지 뭐. 나는 아주 큰맘 먹고 녀석에게 완전히 기댔다. 이래 봬도 어엿한 성인 남자인 내가 무겁지도 않은지, 녀석은 날 거의 들다시피 부축하면서도 아직도 올라갔다 내려갔다 춤을 추는 길을 똑바로 잘 걸어갔다. 기특한 녀석이군. 이 녀석은 말만 많이 하면 그나마 괜찮을 것 같은데. 아, 근데 왜 이렇게 눈앞이 빙글뱅글 돌지...? 안 되겠다, 눈을 감았다 떠봐야겠어.

“어어...?”

잠깐 눈만 감았다 떴는데 시야에 들어오는 풍경이 방금 전과 완전히 달랐다. 세상이 빙글뱅글 돌아가고, 심장은 머리에서 뛰고 온몸에서 힘이 쭉쭉 빠진다는 건 똑같은데, 보이는 것은 우리 집 천장이었다. 그리고 눈앞에 왔다 갔다하는 커다란 손. 누군지 몰라도 내가 눈을 뜬 건지 감은 건지 확인해보려는 것 같았다.

“뜨고 이써여.”

겨우 입을 열고 말하니 어지러워서 다시 감았지만, 뜨고 있는 건 맞았으니까 거짓말은 아니다.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빌어먹을 거짓말. 아버지의 말이 습관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자기들도 필요할 땐 거짓말했으면서. 할아버지 앞에선 나한테도 거짓말시켰으면서. 눈을 감고 있자니 떠올리기 싫은 것들만 떠오르고, 그렇다고 눈을 뜨자니 어지럽고. 왜 이러는 거더라?

“진호야.”

아, 나 술 마셨었지. 내 볼을 쓰는 거친 손길에 천근만근인 눈꺼풀을 살짝 들어 올렸는데, 시야 가득 최태혁이 들어왔다. 술은 친구들이랑 마셨는데 왜 얘가 내 앞에 있는 걸까.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가만가만 얼굴을 쓸어주는 손길이 좋아서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아, 맞다. 나 얘한테 자랑할 거 있었지?!

“어… 나, 최태혁, 나.”

신이 나서 말하려는데 너무 흥분해서 그런지 말이 잘 안 나오고 자꾸 맴돌았다. 말을 더듬으면 바보 같다고 엄마가 맨날 그렇게 얘기했는데, 애도 아니고 자꾸 왜 이러냐. 나는 항상 하던 대로 작게 숨을 들이쉬었다. 진정하자, 진정. 차분히 숨을 들이쉬기를 몇 번 반복하고 나니 확실히 좀 진정이 되었다. 흥분하지 말고, 짧게, 용건만. 그래야 착한 아이지.

“최태혁, 나, 오늘, 디따 잘했어.”

“...그래?”

다행히 녀석은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았다. 내가 말을 더듬으면 따라왔던 귀찮은 아이를 보는 눈빛이 아니었다. 안도감에 웃음이 나왔다.

“웅. 그러니까, 칭찬해 줘야 해.”

“잘했다.”

“칭찬할 땐 머리도 쓰다듬어줘야 해, 최멍청 씨.”

몸을 크게 움직이기 힘들었던 나는 꼼지락꼼지락하면서 볼에 있던 손에 머리를 가져다 댔다. 눈을 감은 상태라 녀석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머리칼을 살살 헤집는 부드러운 손길은 여실히 느껴졌다. 아까처럼 냅다 쥐어박으면 어쩌나 했는데 진짜 잘 쓰다듬네, 이 녀석. 하긴 최태혁이 뭘 만지는 건 참 잘해. 아침마다 내 거 만져준다고 생난리를 쳐서 수치사하는 줄 알았지만, 솔직히 그때도 기분은 진짜 좋았으니까. 근데 이 생각의 흐름 맞는 건가. 칭찬받고, 머리 쓰다듬 받다가, 거기 쓰다듬 받은 게 떠오르는 거 정상이야?

“더운 것 같은데. 창문 열고 오마.”

당황스러운 사고회로 때문에 찌푸린 건데 더워서 그런 건 줄 알았나 보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기분 좋던 손이 떨어져 나갔다. 마음에 안 들어. 놔 달라고, 떨어지라고 그렇게 얘기할 땐 귓등으로도 안 듣더니. 내가 해달라는 거 해줄 땐 왜 이렇게 쉽게 떨어져? 나는 불만을 잔뜩 안고 눈을 떠 멀리 떨어지려는 손을 찾아 고개를 들었다. 아직 잡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거리감. 흐물흐물 거리는 팔을 움직여 뻗으니 손가락 마디가 잡혔다.

“나 오늘 그냥 아니고, 디따, 어엄청 잘했다니깐? 그러니깐 칭찬도, 어어어엄청 길게 해줘야 해.”

지금은 창문 같은 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 그렇게 투덜대면서 손끝만 겨우 쥔 손에 힘을 주고 끌어당겼다. 워낙 덩치가 있어서 잡아당기면서도 끌려오긴커녕 잡은 손가락마저 놓쳐버리겠다고 생각했는데, 이게 웬걸. 커다란 덩치가 당기는 대로 쑥 딸려 왔다. 오늘의 김진호 진짜 좀 대단한데? 나 술 마시면 힘이 막 세지고 그런 타입인가?

“푸흐, 너 이제 큰일 났다 최태혁. 까불지 말고 얼른 앉아서 머리 쓰다듬어, 빨리.”

멋있게 녀석을 확 째려봐주고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러는 김에 좀 더 편하게 자세를 잡으려고 새우처럼 몸을 옆으로 돌려 동그랗게 말았다. 그 상태로 혼자 만족스럽게 웃으면서 녀석의 손길을 기다리는데, 한참을 기다려도 느껴지지 않아서 놈이 있을 만한 곳을 향해 손을 까닥였다.

“하.... 정말 주정뱅이가 따로 없군.”

시키는 일도 안 하고 꾸물대는 주제에 구시렁대는 녀석에게 어허, 하고 으름장을 놓았더니 이번엔 기가 찬 지 하, 하고 코웃음을 쳤다. 안 되겠다 싶어 인상을 확 찌푸렸더니 놈은 그제야 머리를 쓰다듬어왔다. 나는 말이야, 네가 우리 집에 있을 때 맨날 마사지도 해줬었다고. 이 정도는 충분히 받을 자격이 있다, 이 말이야.

그렇게 한동안 조용한 방에는 머리카락이 사락거리는 소리와 내가 이불에 볼을 비빌 때 마찰하는 소리만 들렸다. 간간이 녀석의 한숨 소리가 들리는 듯했지만, 눈치가 보인다기보단 오히려 전에 당했던 일들이 생각나면서 어쩐지 고소했다. 전에 당했던 일들 하니까 또 생각나네. 하긴 그 일이 보통 일이야? 잊어버리는 게 더 이상하지. 그래도 계속 떠올리고 있으려니 부끄러워서 못 살겠다. 나는 내 머릿속을 온통 차지해버린 부끄러운 기억을 떨치기 위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가자미눈을 하고 근처에 있을 최태혁을 찾아 눈을 굴렸다. 예상대로 녀석은 내 바로 옆에서 손에 턱을 괴고 비스듬히 누워있었다. 나는 방금 머리를 움직여서인지 살짝 위에 떠 있는 손을 가만히 노려보다가 녀석의 파란 눈동자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경고, 경고해야 해. 너 오늘은.

“머리만이야. 다른 데는 호온나!”

“다른 데?”

“꼬추 말이야, 꼬추! 이 변태야.”

좋아, 아주 제대로 무서운 경고였어. 아까 박상혁과 한 판한 걸로 내 입도 트인 건지, 이젠 직설적으로 말하는 게 전혀 어렵지 않았다. 나도 이제 사이다 인간이라 이거야. 나는 최태혁의 얼굴이 ‘이게 뭔 개소리야’라고 말하는 것처럼 일그러지든 말든, 녀석을 향해 뿌듯함의 콧바람을 한번 뿜어주고 다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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