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호 이야기-101화 (101/234)

101화

“...배를.”

“네. 죄송합니다.”

감히 발을 댔단 말이지. 태혁은 저를 향해 허리를 깊게 숙인 재원을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제 잔뜩 주눅이 든 모습에 걱정을 한 것 치곤 잘 하고 있는 것 같아 놔두려고 했더니, 그 버러지 새끼가 기어코 그의 성질을 건드렸다.

“술을 얼마나 마셨다고?”

“많이 마신 놈 기준으로 반병 정도라고 합니다.”

평소 술 파티를 할 정도면 고작 그 정도 양으로 취했을 리는 없고, 여차하면 취했다는 핑계를 대려고 술 냄새만 풍긴 것 같았다. 가만있는 애한테 제 열등감을 풀자고 그렇게까지 머리를 굴렸다고 생각하니 기가 찼다.

태혁은 사무실을 나서며 생각했다. 술김에 사고를 쳤다 그러기엔 양이 모자란 것 같으니 먼저 그런 상태로 만들어야겠다.

“타이밍 봐서 그놈들 끌고 나와. 밖에 대기시켰던 애들한텐 술 들고 있다가 놈들 나오면 데리고 가서 목구멍에 바로 부어버리라고 해라. 그렇게 하면 앞뒤 분간 못 할 만큼 취하는 것도 금방이겠지.”

“알겠습니다. 교통사고로 할까요, 집단 린치로 할까요.”

열려 있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태혁은 먼저 타서 버튼을 누르고 있던 재원을 향해 물었다.

“두 놈은 정신만 차리게 하면 될 것 같고, 한 놈은 다리 하나를 갈아버려야겠는데. 어떻게 할까, 재원아.”

“...술 취한 놈들이 사소한 일로 패싸움 하는 거야 일상이고, 인사불성 될 정도로 마시면 도로에 누워 있다 차에 다리 깔리는 일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재원의 대답이 퍽 마음에 들었던 그는 실행하라는 말만 짧게 남기고 대기하고 있던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출발과 동시에 종혁에게 덧붙이듯 말했다.

“아무 시멘트나 받지 마라.”

“네, 알겠습니다.”

종혁은 대답과 동시에 메모장을 켜 박상혁의 부친이 운영한다던 시멘트 회사의 이름을 적었다. 철없는 자식 놈의 경거망동으로 인해 이 회사는 앞으로 그가 소속된 회사와 관련된 일은 일체 받지 못할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건설회사에게 배척받는 것은 작은 중소기업의 입장에선 큰 타격이겠지만, 이 자리에 그걸 걱정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팀장님, 방금 들어온 상황 보고드리겠습니다. 진호 씨는 맞은 직후 몸을 지나치게 떨면서 웅크리는 모습을 보였으나, 다행히 금방 돌아와 박상혁에게 직접 몇 마디 말했다고 합니다. 더 때리려는 기세였던 박상혁은 두 명에게 잡혀 소리만 지르다, 지금은 애들한테 끌려 나온 상태입니다.”

“재원이는.”

“근처 다른 술집을 수배해서 가고 있다고 합니다. 세 명 다 애들이 억지로 잡아다가 술을 들이붓기에는 너무 안 취한 상태라, 차라리 난동 부리는 것을 적당히 달래서 다른 곳으로 데려갈 생각인가 봅니다. 일반인들이라 최대한 문제를 남기지 않으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 소문도 신경 써라. 진호 귀에 들어가도 괜찮을만하게.”

“알겠습니다.”

걱정했던 것이 무색하게 진호는 무사히 상황을 해결하고 다시 모임을 즐기기 시작한 것 같았다. 조금 누그러진 태혁의 표정을 확인한 종혁은 당장 결재가 시급한 기획안으로 주제를 바꾸었다. 태혁은 종혁이 기획에 대해 브리핑하는 것을 들으면서 창밖을 확인했다. 토요일 저녁이라 그런지 도로에 차가 많고, 하필이면 진호가 있는 곳은 막히는 곳으로 유명한 번화가였다.

미리 전화할까 고민하던 그는 브리핑 도중에 진호가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는 보고를 듣고 근처에 도착하면 그때 연락하기로 결정했다. 미리 전화하면 오지 말라며 고집을 부릴 수도 있었다. 진호 스스로가 자기는 매우 술이 약하다고 했으므로 조금만 마셔도 취할 게 분명한데, 그걸 다른 이가 수습한다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용납이 되지 않았다. 물론 오지 말라고 해도 갈 생각이지만, 그래도 굳이 전화하여 그런 소리를 들을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진호에게 아무 말도 없이 그가 있는 식당 앞에서 내린 태혁은 바로 전화를 걸었다.

- 무신 일이시죠.

역시 취한 건가. 짧은 한 마디만 들었을 뿐인데도 묘하게 한 톤 올라간 목소리와 어눌한 말투에서 취한 상태라는 것이 티가 났다. 맥주 한 잔에 소주 두 잔 정도 마셨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그 정도로 이렇게 된다니. 여러모로 참 귀여운 놈이었다.

“나와.”

- ...잉?

“데리러 왔다. 식당 앞에 있으니 정리하고 나와.”

사실 직접 들어가서 데리고 나오는 것이 빨랐지만 그러면 필요 이상의 주목을 받을 수도 있었다. 그야 다시 볼 사이가 아니니 상관없었지만, 안에 있는 사람들과 연결고리가 있는 진호에겐 별로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수도 있는 일이었다. 특히 사람들이 모두 들을 수 있을 만큼 큰 소리로 호모니 뭐니 떠들고 난 후, 장신의 사내에게 안겨 나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기 충분했다. 물론 그것 또한 그의 입장에선 그다지 개의치 않는 일이었으나 진호는 또 수치심 운운하면서 펄쩍 뛸 것이 분명했으므로, 그는 그의 강아지가 제 발로 나올 때까지 기다려주기로 마음먹은 것이었다. 태혁 나름의 배려였다.

“식당 입구 바로 앞에 있....”

- 싫은디용.

“...뭐?”

그런데 그 배려를 당사자가 걷어찰 줄이야. 그가 멍하게 되물은 것이 웃겼는지, 전화기 너머에선 진호가 대차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정말 제대로 취한 모양이었다.

- 푸흐흐흐, 싫은데용. 안 갈 건디이. 내가 어? 네 똥캉아지냐? 아니라 이고야! 나느은 오늘 짱 쎈 김진호 님이시다!

가관이군. 기세등등하게 자기소개를 하던 진호는 별안간 그가 오늘 한 일에 대해 자랑스럽게 늘어놓기 시작했다.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들 또한 하나같이 웃으며 맞장구를 치는 걸 보니, 같이 마신다는 인간들도 모두 얼큰하게 취한 것 같았다. 태혁은 어쩔 수 없이 조금 세게 나가보기로 했다.

- 그래서여, 형, 제가 그 쉐키한테 야 이 멍췅하고오 하안시만 쉐키야! 하고오-.

“김진호.”

- 멋쥐게 한 마...녜? 저여?

“10초 센다.”

- 에엥?

태혁은 술 취한 사람도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매우 천천히, 또박또박 말했다.

“10초 셀 동안 네 발로 나오지 않으면, 내가 직접 들어갈 생각이다. 그럼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공주님처럼 안겨서 나올 줄 알아라.”

- 에? 네? 모라고요? 공주님?!

“십.”

- 잠, 잠깡, 잠깐! 공주님? 왜? 아니, 나 지금 나가? 지금?

다행히 전부는 아니어도 ‘공주님’과 ‘10초 내로 나오라’는 말은 알아들었는지, 태혁이 숫자를 세기 시작하자 당황한 목소리와 함께 우당탕 소리가 났다. 넘어지기라도 한 건가. 태혁은 뒤를 돌아 차 옆에 서 있던 종혁을 보면서 식당 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그걸 본 종혁이 그에게 걸어오더니 들고 있던 태블릿을 내밀었다. 영상통화 중인 화면에는 식당 내부와 나가야 한다며 허겁지겁 무언가를 찾고 있는 진호가 보였다.

“진호야.”

- 나, 나가! 갈 거야! 갈 건데, 긍데 나 핸드폰! 핸드폰이 엄따고!

태혁은 헛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고 지금 나랑 통화는 뭘로 하고 있냐고 물었다. 그러자 화면 속의 진호가 눈을 크게 뜨며 맞네! 하고 외쳤다. 그러더니 민망했는지 뒷머리를 긁적이며 웃었고, 그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테이블을 두드리면서 박장대소를 하고 있었다. 그걸 보고 있자니 어쩐지 태블릿 액정에서 술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그는 가볍게 고개를 젓고 구, 하고 다음 숫자를 불렀다.

- 으아아아앙! 잠깐, 잠깡! 지금 가여, 숫자 멈춰어!

“팔.”

- 나 간다아! 재미써따! 간다아!

다급하게 나가려고 하자, 주변에서 어디 가냐고 묻는 것도 무시하고 진호가 옆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힘차게 손을 내저으며 인사했다. 물론 그 여유는 다른 사람을 향해 웃어주는 낯이 마음에 들지 않은 태혁이 이를 악문 채 칠, 하고 숫자를 뱉자마자 사라졌다.

진호는 비틀거리면서 문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더 이상 재촉하면 급하게 오다가 넘어지기라도 할까 봐, 태혁은 숫자 세는 것을 멈추고 지켜보기만 했다. 그리고 이내 진호가 문가에 다다르자 종혁에게 먼저 차에 타 있으라고 지시했다. 종혁이 고개를 끄덕인 후 차에 올라타자, 드디어 식당 문이 열리더니 한껏 상기된 얼굴의 진호가 튀어나왔다.

“네 이노옴 최태혁! 네가 찾던 진호 님 등장이시다! 이리 오너라아!”

나오기 싫다고 말하던 사람은 어디로 간 건지, 진호는 자기가 연 문에 몸을 기댄 채로 잔뜩 신이 나서 소리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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