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호 이야기-100화 (100/234)

100화

“하.... 이러다 입술 닳겠네, 정말.”

빈틈이 보이자마자 입술을 갖다 댄 태혁을 힐끔대며 중얼거리는 소리에 그는 슬쩍 웃고 말았다. 공공장소에서 애정행각을 한다는 것에 스트레스를 받는 것을 알았지만, 며칠 전 택배를 받고 나서 느꼈던 분노를 생각했을 때 이것만큼은 봐줄 수 없었다. 그는 조각조각 찢어버린 사진을 떠올리며 진호의 어깨에 올린 손에 힘을 줬다. 그에게만 특별히 사진을 보낸 것은 아니었을 테니, 멍청한 남궁 후는 그를 포함한 모두를 제대로 자극한 것이다. 거기다 기껏 찍은 사진을 다른 사람에게도 주다니. 자랑하고 싶었던 마음은 알겠으나 그의 입장에선 그것 또한 이해가 안 되는 행동이었다.

태혁은 오늘 하루 동안 진호가 그와의 입맞춤에 질리다 못해 익숙해질 때까지 키스를 반복할 예정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마음에 드는 사진은 앨범으로 만들어 진호와 태혁, 단둘이서 소장할 계획이었다. 제 상사의 계획을 들은 재원이 진호가 사진을 받자마자 버릴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물었으나 태혁은 그러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가 진호 집에 머물러 있을 때 지나가듯 했던 말을 기억했다. 자기도 가끔은 앨범을 보며 추억을 되돌아보고 싶을 때가 있으나, 안타깝게도 그럴 만큼 사진이 없다는 이야기였다. 이번에 그에게 건넬 앨범은 최대한 많은 사진으로 채워 놓을 예정이었기에, 태혁은 진호가 제법 기쁜 얼굴을 보여주리라 기대하고 있었다.

“커피, 커피. 달달한 커피.”

진호가 커피를 흥얼거리며 본인이 가리킨 트럭으로 폴짝폴짝 뛰어갔다. 태혁은 신나하는 진호를 보며 걸음의 보폭을 더 넓혔다. 원래 걷던 속도 차이가 있어서 그런지 그렇게만 해도 나란히 걸어갈 수 있었다. 방금 전까지 '말'에 대한 자신의 진지한 태도를 무게 있게 말하며 세상 다 산 사람 같은 얼굴을 하던 건 누구였는지. 제가 좋아하는 걸 먹을 생각에 기분이 한껏 업 되어 방방 뛰는 모습이 영락없는 강아지였다. 단순한 건지 단순하려고 노력을 하는 건지. 최근 들어 들어오는 정보들에 의하면 후자에 더 가까운 것 같으나, 어느 쪽이든 귀여운 것은 매한가지였으므로 상관없긴 했다. 이 정도 내숭에 장단 맞춰주는 건 일도 아니었다.

태혁은 자기가 사겠다며 꽤 앙칼지게 왕왕거리는 진호를 내려다보며 못 이기는 척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원래라면 형식적으로만 하려고 했던 통화는, 이 일정 때문에 급하게 마무리 지어야 했던 기업 쪽 업무와 어머니의 귀국에 관련되어 생긴 문제 때문에 의도치 않게 길어졌다.

- 그럼 그 건에 대해서는 지시하신 대로 처리하겠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던 티켓 수배되었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바로 사모님께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래. 아, 멀지 않은 곳에서 대기하도록. 또 부를 것 같으니.”

- ...알겠습니다.

아까 이름을 외우는 건으로 불편한 심기를 그대로 드러냈던 것 때문인지 돌아오는 대답이 좀 늦었다. 태혁은 골똘히 생각하는 얼굴로 열심히 다른 놈들의 이름을 중얼거리던 진호를 떠올렸다. 언제 봤다고 차에서 내리자마자 세 명을 챙길 때부터 거슬렸다. 불편하게 하지 말라 그랬지 친해지라고 한 것은 아니었는데, 그의 부하직원들이 언제부터 그렇게 사교성이 좋았던 건지 알 수 없었다. 일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기 전까진 같이 다녀야 할 일이 많아 얼굴을 익혀놓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태혁은 진호에게 가서 그들과 굳이 가까워질 필요 없다고 한 번 더 당부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뒤를 돌았다.

그가 줄에서 벗어나 있던 시간 동안 앞으로 간 것인지 진호는 어느새 주문을 하고 있었다. 이상했던 것은 음료 메뉴를 물어보기 위해서인지 그를 찾으며 뒤돌아선 진호의 표정이 이때까지 봤던 것 중에 가장 주눅이 들어 있었다는 점이었다. 태혁은 그를 불러놓고 그냥 돌아서는 진호를 보고 걸음을 서둘렀다. 그리고 무언가에 쫓기듯 급하게 주문하는 그의 어깨에 손을 얹어 진정시키면서 대신 주문했다. 조금 침착해진 것 같아 보이는 진호의 눈엔 여전히 불안이 서려 있었다. 그 원인은 누가 봐도 그의 강아지 옆에 서서 느물거리는 얼굴을 하고 있는 저 남자인 듯했다.

“소심한 새끼.”

제 딴엔 진호에게만 들리도록 중얼거렸다 생각했겠지만, 안타깝게도 귀가 좋은 태혁 역시 명확히 들었다. 태혁은 그 남자가 어쩌면 진호의 친구일 수도 있다는 가정은 지웠다. 아까 손을 부러트리지 않고 살짝 꺾기만 한 건 친구였을 경우를 생각해 나름 참은 것이었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던 것 같다. 그를 힐끔대며 경계하면서도 진호에게 할 말 다 하는 꼴이 매우 거슬렸다. 그는 근처에서 자신들을 보고 있을 종혁을 찾았다. 멀지 않은 곳에 있던 그는 태혁의 간단한 눈짓만으로 의도를 눈치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 박상혁, 26살, 그의 부친은 시멘트를 생산하는 중소기업 사장으로, 어렸을 때부터 부족함 없이 커온 모양입니다. 한 동네에서만 거주하고 있으며 초, 중, 고 모두 진호 씨와 같은 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작년에 제대 후 쭉 휴학 중인 관계로 아직 대학생 신분입니다.”

진호와 헤어진 후 곧바로 사무실로 복귀한 태혁을 기다리고 있던 종혁은, 그가 의자에 앉아 손짓하자마자 들고 있던 종혁에 대해 조사한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주변에는 유학을 위해 휴학한 거라고 말하고 다니는 듯하지만, SNS 뒷 계정에는 본인의 급에 어울리는 인생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글과 함께 다른 대학에 편입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사진을 다수 올렸습니다.”

“편입?”

“네. 정확한 학교명은 없었지만 고등학생일 때의 게시물에 자주 언급되었다는 점과, 다른 형제들은 모두 같은 대학을 졸업한 것으로 보아 그가 편입을 희망하는 곳은 팀장님과 김진호 씨가 졸업한 대학일 확률이 높습니다.”

가만히 듣고만 있던 태혁이 책상 위에 놓인 문서에 손을 뻗었다. 종이에는 간단한 신상정보와 그의 집안배경, 졸업한 학교들과 성적, SNS 게시물 등을 기반으로 해석한 그의 성격 등이 정리되어 있었다. 진호에게 잔뜩 으스대던 얼굴을 하던 버러지의 인생은 A4용지 두 장도 채 못 채웠다. 주요 사항만 적었거나 조사할 시간이 모자랐나 싶었으나, 훑어본 결과 그것도 아니었다. 이 서류에 적힌 것 중 종혁이 언급하지 않았던 것은 성적밖에 없었기에 그 부분만 유심히 읽는데 코웃음이 나왔다. 고등학교 점수로는 박상혁이 들어갔던 대학에 간 것만 해도 기적일 정도였다. 그런데 ‘급’ 운운하면서 편입하겠다고 휴학이라. 심지어 다니던 대학 학점도 엉망진창인 것을 보아 헛된 꿈이 아닐 수 없었다. 태혁은 서류 옆에 있던 한강에서 술판을 벌린 사진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어울리는 것들도 죄다 비슷한 인상이었다.

“그의 성격에 대한 평판은 사교적이다, 재밌다, 놀 줄 안다 등 대체로 좋은 편이었습니다만,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지나치게 티를 낸다, 말을 함부로 한다, 돈으로 사람을 차별하는 것 같다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이 점 때문에 틀어진 사이도 있는 것 같고요.”

“진호랑은.”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조사한 범위 내에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었습니다. 친했다, 같이 잘 다녔다, 박상혁이 진호 씨를 잘 챙겼다 등의 의견이 있었던 반면 진호 씨가 괴롭힘을 당했다거나 소위 말하는 셔틀 노릇을 했다는 등의 평도 있었습니다.”

“손버릇도 나쁜 것 같던데.”

“음.... 사진에서 보이는 모습을 보면 평소 어깨동무 등의 가벼운 스킨쉽을 선호하는 듯 보인다는 것 외엔 그런 쪽의 보고는 없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더 알아보겠습니다.”

태혁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놈에 대한 정보는 이만하면 충분했다. 어차피 진호에게 손을 대려고 했던 걸 그가 본 이상, 그놈이 평소에 손버릇이 있고 없고는 중요하지 않았다. 종혁의 보고와 진호가 했던 말을 종합해 보자면 버러지는 그의 생각보단 영악한 놈이긴 한 것 같았다. 전형적인 강약약강인 놈 치고 평판이 좋다는 것은 적어도 이미지 관리를 할 만큼의 머리는 돌아가는 놈이라는 소리니까. 진호와의 관계 역시 잠깐 본 그도 수평적인 친구 관계가 아닌 것을 단번에 알 정도였는데, 정작 주변 사람들의 의견이 갈린다는 것을 보면 평소 어떤 식으로 굴었을지 눈에 선했다. 태혁은 정작 손을 꺾은 그에게는 한 마디도 못했으면서 진호에게는 욕을 했던 놈을 떠올리며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박상혁은 뱀도 아니고 쥐의 머리였다. 본인이 호랑이가 아닌 것을 알면서도 호랑이 노릇을 하고 싶어 하고, 여우처럼 똑똑하지도 않으면서 여우 같은 짓을 하며, 정작 호랑이나 여우가 되기 위해 필요한 노력은 할 생각이 없는 사람. 결국 그들은 호랑이에 치이고 여우에 치이다 자존심에 상처만 받고 시궁창으로 쫓겨나 쥐들 사이에서 우두머리 노릇을 한다. 열등감을 없애기 위해 주변의 유약하고 착한 사람들을 짓밟아 가면서. 개인적으로 태혁이 가장 혐오하지만 굳이 제재를 가하지는 않는 부류였다. 엮여봤자 그만한 보람도 없고, 성가실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놈에게 당하는 사람들에게 느낄 동정심 역시 닳아 없어진 지 오래였다.

그러나 그놈이 자신의 발밑에 두려고 하는 상대는 그의 강아지였다. 태혁이 없었던 고등학생 시절이야 놈이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었을지 몰라도, 지금 진호는 그의 품에 있었다. 버러지는 타깃을 잘못 잡았다.

그가 보기에 진호가 무서워하는 것이 많은 것은 비단 겁이 많아서만은 아닌 것 같았다. 그가 무서워하는 것들은 분명 특정한 기억들에서 기인한 것이리라. 특유의 단순함으로 잘 이겨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따금씩 보이는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것 같은 모습은 그냥 넘길만한 정도의 수준이 아니었다. 그들 다섯을 받아들이는 데만도 적지 않은 정신력을 소모하고 있을 진호였다. 그러므로 태혁은 이 이상 그를 정신적으로 힘들게 할 만한 상황을 만들 생각은 없었다. 진호가 바라왔던 크고, 세고, 듬직한 사람. 그의 앞에 서 있는 벽이 되어주는 건 태혁에겐 정말 어려울 것 없는 일이었다.

마음 같아선 아예 처음부터 그가 데려다 위험 요인을 제거하고 진호에게 데려다 놓고 싶었으나 일단은 스스로 해보겠다고 하니, 그건 존중해줄 생각이었다. 원래 복수란 건 스스로의 힘으로 하는 것이 가장 속 시원한 법이니까. 그러나 그놈이 버러지인 걸 아는 상태에서 진호만 덜렁 보내는 것은 영 불안했으므로, 그는 그가 생각하는 동안 다른 업무를 처리하고 있던 종혁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 모임에 애들 몇 명 들여보내. 밖에도 대기시키고.”

“네, 알겠습니다.”

태혁은 그가 진호를 위한 세고, 크고, 듬직한 형 같다고 수줍게 말하는 말간 얼굴을 회상하며 웃었다. 진호에게는 그런 얼굴이 어울렸다. 적당히 시끄럽고, 멍청할 정도로 순하다가, 한 번씩 눈치 빠르게 구는 정도가 딱 좋았다. 내일 있을 동창회에 가지 않는 것이 좋겠다면서 보였던 메말라버린 눈은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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