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요즘 태혁은 정신없이 바빴다. 정확히 말하면 칼 맞은 이후부터 서서히 바빠지다가 근래에 들어 정점을 맞이하고 있었다. 본래라면 수년에 걸쳐 천천히 진행될 예정이었던 문제를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해결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태혁이 진호의 집에서 급하게 나와야 했던 이유는 사실 그의 어머니 때문이었다. 평소에도 불같은 성격을 자랑하는 그의 어머니는 아들의 실종 소식을 듣자마자 그의 직속 부하직원, 종혁에게 전화해 자초지종을 물었다. 원칙적으로는 모르는 상태라고 해야 했으나 그녀의 아들 사랑을 익히 알고 있던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잘 계신다.’라고 말씀드렸다. 다행히 그녀도 처음에는 그 정도 언질만으로 납득해주었다. 그러나 그 상태가 하루, 이틀, 몇 주가 지나갈 때까지 계속되자 점점 물어오는 간격이 짧아지더니 급기야 사무실에 직접 찾아오기까지 했다. 그녀의 싸늘한 표정을 마주해야 했던 종혁은 등이 축축하게 젖을 정도로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끝까지 태혁의 상태와 소재지를 발설하지 않았다. 갖은 협박과 회유를 해도 본인이 원하는 정보를 넘겨주지 않자 그녀는 제 아들이 쓸 만한 부하를 두었다면서 웃었다. 종혁은 그 미소를 보고 과연 조직의 안주인이셔서 이해해주시는구나-라고 생각했다. 지금 지내고 있는 청년의 집에 더 머물고 싶어 하는 것 같은 그의 상사에게 심려를 끼치지 않고, 자기선에서 잘 해결했다고 일견 뿌듯한 마음도 가졌다. 그러나 며칠 후 회장님, 즉 태혁의 아버지에게 불려가 태풍이라도 휩쓸고 간 것 같은 사무실을 보고 나서야 그게 얼마나 안일한 사고였는지 깨닫게 되었다.
최 회장이 종혁을 불러놓고 한 말은 간단명료했다.
‘그놈 오늘 내로 내 앞에 데려다 놔.’
마치 최후통첩처럼 들리는 단호한 어조에 비상임을 느낀 종혁은 그 길로 진호의 집으로 간 것이었다. 그날 저녁, 진호를 두고 오는 것이 못내 걸려 미적거리던 태혁이 사무실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날아온 것은 아버지의 은퇴 선언이었다.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회사와 조직을 물려받으라고 말하는 모습에서 데자뷔를 느낀 태혁은 또 어머니와 무슨 문제가 생긴 건가 싶어 한숨을 쉬었다. 저번에도 저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 앞에서 하는 바람에 칼까지 맞아 이제야 수습이 되고 있는데, 이게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그러나 최 회장은 말의 저의를 묻는 그에게 고저 없이 말했다.
‘싫으면 관두고 나가.’
지나치게 무감정한 태도에 다른 사람 같으면 긴장했겠지만 그동안 당한 것이 많았던 태혁은 그저 미간을 찌푸릴 뿐이었다. 누가 들어도 장난기가 섞여 농담 같이 들렸던 전과 달리, 이번엔 최 회장이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한 말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어깃장이든 뭐든, 저렇게 말한 것은 그게 아무리 헛소리처럼 들려도 이뤄내고 마는 사람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정말 최단기간 내 모든 것을 물려받을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뿐이었다. 결국 태혁은 앉아있는 아버지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알겠다고 읊조렸다.
그 뒤 최 회장의 축객령에 사무실을 빠져나온 그가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어머니의 행방이었다. 역시나 그의 어머니는 현재 한국에 계시지 않았다. 그날 저녁 태혁은 어머니가 조직원들을 통해 태혁이 칼을 맞았다는 것과 그 원흉이 남편이라는 것까지 알게 되었고, 극대노하여 이탈리아로 돌아갔다는 보고를 받았다. 이탈리아어와 한국어로 온갖 욕을 하면서 본가와 회장실의 모든 기물을 깨고 부셨다는 것은 덤이었다.
태혁은 종혁의 보고 내용과 어쩐지 회장실이 전과 달리 허했다는 것을 교차하여 떠올리면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이대로 그녀가 이탈리아에 계속 있으면 성격 나쁜 최 회장은 일의 진척도가 어떻든 더 조급하게 굴게 뻔했고, 그럴수록 불리한 것은 태혁이었다. 두통이 심해지자 미간을 한껏 모은 태혁은 핸드폰을 꺼내들어 어머니의 이탈리아 거주용 번호를 눌렀다. 벌어진 일을 물릴 수 없다면, 기간이라도 최대한 벌어야 했다.
일반 기업 쪽은 사실 큰 고민이 아니었다. 최대한 같이 물려받을 수 있도록 준비야 하겠지만, 바로 대표직을 맡기보단 나름의 승진단계를 밟을 동안 전문 기업인을 고용해 앉혀둘 생각이었다. 회사에 고용된 평범한 직장인들은 이러한 상부의 결정에 인정할 수 없다면서 반발하지는 않으니까.
문제가 되는 것은 조직에 관련한 일이었다. 음지쪽 일은 회장직 승계 문제처럼 간단히 해결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과거보다는 좀 더 체계적으로 성장했다고 해도, 여전히 다른 분야에 비해 힘과 알력 다툼, 의리나 우상화 같은 빌어먹게 추상적인 요소들이 판을 쳤다. 일반 기업처럼 조직 구도가 명확히 정해진 것이 아닐뿐더러, 있더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걸 뒤집고자 육체적인 공격도 서슴지 않는 곳이었다. 말 그대로 언제 어디서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인간 군상들 위에 서기 위해선 더 철저하고 압도적인 권력이 필요했다. 때문에 정치질은 물론이요, 얕보이지 않을 외형과 실력을 다듬고, 많은 이들이 인정하고 따를 수 있도록 이름값도 높여야 하는 상황이라 태혁의 일정은 빈틈없이 꽉꽉 채워졌다.
“형…이 아니라 팀장님, 마무리했습니다.”
“너 진짜 그 호칭 좀 입에 익혀라 제발.”
물론 회사에도 본격적으로 개입해야하긴 했으므로 태혁은 먼저 그와 그가 데리고 다니는 주요 직원들을 위해 조직의 개편을 감행했다. 새로운 부서를 만들고 적절한 팀에 소속시켰으며, 보여주기식이 아니라 정말 직책에 맞는 직무도 배정했다. 덕분에 각자 업무의 양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었지만, 조직원의 기본 마인드인 상명하복과 통장에 찍히는 액수를 바탕으로 볼멘소리를 하는 사람은 없었다. 거기다 태혁의 최측근들은 어머니의 등쌀에 못이긴 최 회장이 태혁을 위해 오갈 데 없는 아이들 중 직접 선별해서 키운 이들이었다. 그에 맞게 고학력자에 일머리도 있었기에 그들은 입에 붙은 호칭을 정정하는 일에만 좀 애를 먹고 있을 뿐, 회사 업무에도 빠르게 적응을 마쳤다.
“이동하지.”
“통화 더 하지 않으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태혁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재원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한 날짜를 변경해야 한다고 해서 무슨 일이 생겼나 싶었는데, 목소리가 멀쩡한 것을 보아 괜찮은 것 같았다. 확인할 것을 확인했으니 다음 일정을 이행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조금이라도 늦어지면 당장 금요일에 시간을 낼 수 있을지 불확실해지므로 태혁은 걸음을 더 빨리했다. 그러면서도 첫 통화 때 죽은 줄 알고 놔뒀던 놈이 달려드는 바람에 갑자기 끊어야 했던 것을 상기하며 한 마디 덧붙였다.
“끝낼 땐 확실히 해라.”
“네. 죄송합니다.”
무심한 한 마디에 아까 그 남자를 심문했던 귀염이 식은땀을 흘리며 답했다. 따로 징계를 줄 생각까진 없었던 그는 답을 듣자마자 다시 빠르게 걸으면서 문가에 서 있던 재원에게 손짓했다. 커다란 철문이 열리자마자 햇빛이 들어오면서 밖에서 대기하던 조직원들이 보였다. 태혁 일행이 문에 거의 당도했을 즈음, 재원을 필두로 모든 조직원이 허리를 깊이 숙이며 소리쳤다.
“고생하셨습니다!”
태혁은 익숙하다는 듯 잠시 서서 인사를 받았다. 그리고 먼저 허리를 편 재원에게 종혁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주로 뒤처리를 담당하는 재원은 간단한 신호만으로도 그가 일해야 할 차례라는 걸 알아들었다. 재원은 태혁에게 청소를 마치는대로 사무실로 복귀하겠다며 인사를 하더니 ’가자’는 말과 함께 창고 안으로 사라졌다. 문밖으로 완전히 나오자 밝은 햇빛이 눈이 부셨다. 태혁은 재원을 돕기 위해 어둠 속으로 사라져가는 처리반을 보며 진호를 떠올렸다. 어두운 곳도, 좁은 곳도, 너무 조용한 곳도, 정장 입은 사람도 싫어한다라. 안 그렇게 생겨서 정말 까다로운 강아지였다. 그는 차에 올라타 서류를 건네주는 종혁에게 지나가듯 말했다.
“실외 넓은 공간에서 즐길 거리가 있나 찾아봐. 사람은 많아도 상관없으나 복장은 캐주얼한 곳으로. 놀이공원은 제외다.”
뜬금없는 소리였지만 태혁의 모든 것을 다 꿰고 있던 종혁은 무엇에 관한 명령인지 바로 알아듣고 답했다.
“네. 예약해놨던 레스토랑은 취소해놓겠습니다. 따로 더 고려해야 할 사항은 없으십니까?”
“...장소가 정해지는 대로 근처 음식이 괜찮은 곳도 수배해 놔.”
먹는 것을 유달리 좋아하는 것 같았으니. 태혁은 그렇게 덧붙이며 손에 들린 종이 뭉치로 시선을 돌렸다. 그날 저녁 종혁이 그에게 제시한 곳은 한강에서 하고 있다는 푸드트럭 축제였다. 지나치게 오픈된 장소라는 것과 사람이 많아 이런저런 조치가 필요할 수 있다는 것까지 보고하면서 인력을 동원해야겠다는 말에 태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경호 인력과 보조 인력 모두 조직원의 트레이드마크인 정장은 물론이요 세미 정장, 심지어는 오피스룩을 입는 것까지 금지되었다.
“다른 애들 보내기 그러신 거면 저희가 가겠습니다.”
“네, 팀장님. 불편하시지 않게 잘 모실 수 있습니다.”
태혁은 미간을 문지르며 고민했다. 그의 똥강아지는 새로운 사람들과 있는 것을 불편해했으므로 그가 직접 데리러 가려고 했다. 그러나 오찬을 끼고 시작한 간부회의가 그의 예상보다 더 지지부진하게 늘어지고 있었다. 약속 시간은 5시인데 3시가 넘어간 지금에서야 조금씩 진전을 보이고 있다는 것은, 앞으로 약 1시간은 더 여기에 묶여 있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저녁이 되기 전엔 끝날 것 같았으나 여전히 진호를 데리러 가기엔 시간이 빠듯했다.
망할 여우새끼들. 조금의 손해도 보지 않으려고 각 부서별로 한 치의 양보 없이 뻗대니 이런 상황이 일어나는 것 아닌가. 다른 쪽이었으면 힘으로 눌러서라도 빨리 끝낼 수 있었을 텐데 여긴 또 그렇게 했다간 일이 커질 게 뻔했다. 태혁은 대중교통을 이용하게 하느니 이 셋이 낫겠다는 생각에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몇 분이 지났을까, 잠시 간의 휴식시간이 끝나고 멈췄던 회의가 재개되었다. 그때 종혁 대신 태혁을 보좌하기 위해 인수인계를 받은 직원이 태혁에게 작게 보고했다. 최대한 평범한 옷으로 갈아입은 세 명이 출발했다는 내용이었다.
“푸드트럭이 있는 광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저희 애들로 채워 놓은 잔디밭 구간이 있습니다. 그중에 핑크색 티셔츠와 청바지를 맞춰 입은 커플이 있는 돗자리로 가시면 됩니다.”
직원은 진호가 눈치챌 수도 있는 업무에는 그와 안면을 튼 세 명이, 원거리 경호 및 보조에는 조직원과 단기로 고용된 인력이 배치되었다고 이어 말하면서 태혁에게 캠핑 웨건의 손잡이를 건넸다. 돗자리 깔고 피크닉이라.... 이런 걸 하는 날이 오리라곤 상상도 하지 않았는데. 태혁은 본인이 허가한 스케줄임에도 작금의 상황이 기가 찼다. 그러나 이미 결정한 일정, 진호 일행이 거의 도착했다는 보고를 들은 게 방금 전이었다.
그는 상사의 비소에 긴장하며 내밀었던 손을 뒤로 물린 직원에게 손을 까닥였다. 직원은 쥐고 있던 것을 그에게 넘긴 후 즐거운 시간을 보내시라는 말을 남기고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혼자 남은 태혁은 공원 주차장에 들어서는 차들을 보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시야에 익숙한 롤스로이스가 들어왔다. 그들도 태혁을 발견한 모양인지 주차장에 들어서자마자 멈춰서더니 문이 열렸다. 내린 사람은 당연하게도 그가 기다리고 있던 진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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