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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호 이야기-98화 (98/234)

98화

“어…. 왜 갑자기 화를 내고 그래 진호야. 농담이 좀 심했다면 미안해. 우리가 지금 술을 마셔서 조절이 잘 안됐나 봐. 근데 이렇게까지 화 안 내도 그냥 기분 나빴다고만 얘기해줬어도 그만했을 텐데….”

박상혁은 곤란하다는 듯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다분히 시선을 의식한 행동인 것이 뻔히 보여 나는 이를 악물었다.

당황스러워하는 연기를 어찌나 잘하는지, 그 전의 발언은 못 듣고 내가 일방적으로 퍼부은 것만 본 사람들은 박상혁을 피해자라고 생각할 것 같았다. 거기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이런 상황일 때는 보통 자기가 친한 사람 편을 들게 되는 법인데 이곳에는 나보단 박상혁과 친한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실제로 시야에 들어온 몇몇은 나를 손가락질하면서 수군거리고 있었다. 옛날의 내가 가장 피하고 싶어했던 상황이 벌어진 것이었다. 나는 나만 보이게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내리는 놈을 보다 고개를 들어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채예령이 무표정한 모습으로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힘줄이 드러날 정도로 주먹을 꽉 쥐고 있는 것으로 보아 대충 무슨 이야기가 오가는지 들은 모양이었다.

나는 숨을 한번 크게 들이쉬었다. 그리고 다시 내쉬는 대신 자기랑 친한 사람과 눈을 마주치며 ‘왜 이러는지 잘 모르겠어’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박상혁을 향해 입을 열었다.

“말은 바로 해. 너 방금 학교 다닐 때 나 게이라는 소문 있었다고, 그걸 모두 알고 있었다고 했잖아. 그거 때문에 친한 친구가 욕구 해결해준다는 소문도 있었단 말까지 해놓고, 그게 농담이었다고?”

나는 최대한 많은 사람이 들을 수 있도록 일부러 목소리를 키워 말했다.

“거기까진 그래, 백번 양보해서 소문 이야기를 했다고 치더라도, 입양 얘기는 뭔데. 당사자 앞에서 입양아 처지가 불쌍하니 어쩌니 한 게 어떻게 좀 심한 농담이야. 기분이 나쁘다고 얘기했으면 그만했을 텐데-가 아니라 애초에 입에 올리질 말았어야 하는 말 아니냐?”

내 말이 계속될수록 박상혁의 표정엔 금이 갔고, 나에게 향해 있던 눈초리들은 박상혁에게로 옮겨갔다.

“술 마셨다는 핑계는 입에 올리지도 마. 그거 되게 비겁한 자기합리화니까. 술 마시고 말실수할 거 같으면 알아서 조절했어야지. 술기운 못 이겨서 아무 말이나 막 지껄인 게 자랑이냐? 사람이고 어른이면 자기 입 밖으로 나온 말엔 제대로 책임지고, 못 질 거 같으면 아예 안 하는 게 맞는 거야.”

이 정도면 내가 왜 화를 내고 있는지 모두 알았겠지. 미묘하게 달라진 주변 공기를 통해 또다시 내가 급발진 한 것처럼 만들려던 박상혁의 의도를 성공적으로 어그러트렸음이 느껴졌다.

나는 그동안 당하기만 하던 것을 조금은 대갚음한 것 같아 고소한 마음이 들었다. 조금 꺼림칙한 것은 박상혁이 답지 않게 너무 얌전히 듣고만 있다는 것인데, 당하기만 하던 나의 예상외의 모습에 벙찐 거라고 생각하면 납득이 가는 부분이었다.

나는 이대로 하고 싶었던 말을 더 쏟아내야 하나, 그만하고 마지막으로 사과를 요구해야 하나 고민이 됐다. 그리고 잠시 고민하느라 눈을 아래로 내리깐 찰나, 배에 가해지는 충격과 함께 시야가 반전되었다.

박상혁이 일어나서 내 배를 차 넘어트린 것이었다.

“윽…너, 이게 무슨….!”

“하, 씨발 진짜. 이젠 별 같잖은 새끼까지 지랄이네.”

놈은 욕을 중얼거리면서 주저앉은 채로 아픈 배를 감싸 안은 내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고분고분해서 적당히 봐줬더니 너도 내가 만만하냐? 채예령이 떠먹여 주는 거 아니었으면 대학도 제대로 못 갔을 새끼가 좀 좋은 대학 들어갔다고 기고만장해져서는. 동네 급 안 맞게 거지같이 굴어서 존나 거슬리는 거, 찐따 주제에 어울리지도 않는 애들 사이에 아등바등대는 꼴이 불쌍해서 놀아준 은혜는 모르고.”

갑자기 저게 무슨 소리야. 나는 지근거리에 있는 사람만 들을 수 있을 정도의 크기로 중얼거리는 놈의 말을 듣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퓨즈가 나갔는지 녀석의 눈은 맛이 가 있었다.

“그래, 김진호 너는 그렇게 바닥에서 빌빌대는 게 어울린다고. 구석에 처박혀서 찌그러져 있는 게 맞는 건데 왜 자꾸 쳐 나와서 눈에 거슬리고 지랄이야. 나보다 잘난 거 하나 없는 새끼가 노력도 없이 좋은 건 다 가지려고 구니까 결국 이 꼴이 나잖아.”

어느새 내 앞까지 온 박상혁이 발등으로 나를 툭툭 차더니 다리를 높게 들어 올렸다. 순간 전등을 가리는 다리와 내 얼굴에 드리워지는 그림자가 슬로우모션으로 보이면서 무언가가 떠올랐다.

말을 하면 할수록 날아왔던 발길질. 나는 덜덜 떨리기 시작하는 손을 들어 머리를 감싸고 몸을 한껏 웅크렸다. 아파, 아플 거야. 그리고 죽을 거야.

온몸을 덮쳐오는 무섬증에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으나 목이 턱 막혀 쇳소리 같은 숨을 뱉어내는 것이 다였다. 그 상태로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을까, 각오하고 있던 통증 대신 누군가 호통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 새끼가 보자 보자 하니까. 미쳤냐? 어디서 사람을 때려?!”

“뭐야 이 새끼는. 야, 이거 안 놔?”

“지랄하네. 너 같으면 놓겠냐?”

떠지지 않는 눈을 억지로 떴을 때 보이는 것은 여섯 개의 발이었다. 그리고 그 발에 이어진 다리를 따라 올라가니 박상혁의 멱살을 잡고 있는 강하민과 어깻죽지를 잡고 있는 김은수가 보였다. 아직도 떨림이 가시지 않은 손을 꾹 쥐면서 주변을 둘러보니, 멀찍이서 지켜만 보던 애들도 몇 발자국씩 가까워져 있었다.

나는 멍한 정신을 깨우기 위해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바닥에서 올려다보는 구도에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아무래도 자꾸 떠오르는 기억을 떨쳐내기 위해선 자세부터 바꿔야 할 것 같아 몸에 힘을 주는데, 마침 타이밍 좋게 부축하려는 손길이 느껴졌다.

“진호야 괜찮아? 일어날 수 있겠어?”

채예령이었다. 나는 녀석의 도움을 받아 자리에서 일어나 배 쪽으로 손을 뻗는 녀석을 살짝 밀어 떨어트렸다. 셔츠를 털어주려는 의도는 알겠으나, 지금은 누군가의 손이 닿는 것만으로 소름이 끼쳤다.

“응, 괜찮아. 좀 놀라서 그래.”

미간을 찌푸리던 녀석은 내가 힘없이 웃으며 알아서 셔츠를 터는 모습을 보이자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고 손을 물렸다.

그렇게 겁먹을 일이 아니었는데 왜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까. 옷매무새를 정리하면서 방금 전 아찔해졌던 순간을 떠올리자 또 속이 울렁거렸다.

...아니야. 지금은 일단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여기에 집중하자, 김진호. 나는 애써 생각을 떨쳐내고 긴장한 몸을 이완시키기 위해 주먹을 쥐었다 피며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었다. 그동안에도 박상혁과 강하민, 김은수는 서로를 잡고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언제부터 그렇게 정의의 사도셨다고 참견질이야. 이거 놓으라고!”

자기를 잡고 있는 둘을 밀치면서 소리를 지르는 박상혁을 보니 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다. 그와 동시에 몸의 긴장이 풀리고 떨림이 잦아들었다.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고 했나. 한바탕 멘탈이 흔들리고 나니까 머리가 더 맑아진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제야 박상혁이 중얼거리던 말이 명확히 이해되었다.

내가 지금 생각하는 것이 맞는다면 놈은 정말 상상 이상으로 한심한 애새끼였다. 나는 강하민과 김은수에 의해 식당 벽이 있는 곳까지 밀린 박상혁의 이름을 불렀다.

“박상혁. 너 설마, 열등감 때문이었냐? 그래서 그렇게 끈질기게 사람 괴롭혔던 거야? 너보다 잘난 거 하나 없어 보이는 거지같은 내가 네가 친해지고 싶던 채예령이랑 친하고, 네가 잘났다고 생각하던 애들이랑 어울리고, 너보다 성적 좋고, 너보다 잘난 대학 붙은 게 인정이 안 돼서?”

“열등감 같은 소리하고 앉아있네. 야, 네가 뭐라도 돼? 내가 너한테 열등감을 왜 가져. 돌았냐?!”

아니라고 외치는 놈의 얼굴은 누가 봐도 시뻘게져 있었다.

“하…. 맞네. 맞나보네. 하하하, 그거였구나.”

“아니라고 했지, 이 새끼가 진짜 돌았나!”

나는 나오는 헛웃음을 참지 않았다. 그렇게 허허 웃으며 욱해서 발악하는 놈을 보고 있는데 지옥 같았던 학창 시절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게 열등감 때문이었다고.

생각해보면 저 녀석이 채예령과 그 무리 옆에서 유독 알짱거리긴 했다. 나를 배척하는 와중에도 녀석과 그 무리 앞에서는 조심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고, 걔가 내 편을 들면서 한마디 하기라도 하면 형식적이긴 해도 나에게 사과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땐 그저 그들은 나와 달리 만만하지 않으니까 굽히고 들어가는구나, 했는데 그 이상이었던 모양이다. 시험 때와 성적표가 나왔을 때 괴롭힘이 더 집요했던 것도 그런 이유였다고 생각하니 헛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이게 도대체 무슨 감정이지. 허무한데 속이 시원하다니.

“하하, 진짜. 내가 널 무서워했던 것에 비해 너무 한심한 새끼라는 걸 알아버려서 미친 듯이 허무한데, 한편으로는 기분이 좋기도 하고, 속 시원하기도 하고. 이게 진짜 뭐지 싶긴 한데 다행이란 생각도 들고. 나는 내가 존나 밉상이고 성격 이상한 애라 그런 일을 당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닌 거잖아. 나한테 문제가 있었던 게 아니잖아.”

문득 오늘 오기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눈 딱 감고 하고 싶은 말을 쏟아낸 보람이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었으면 나는 계속 그 지독한 괴롭힘의 원인을 나한테서 찾고, 스스로를 탓했을 터였다. 회귀 전과 변함없이.

물론 나를 싫어했던 애가 박상혁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나를 가장 괴롭히던 놈이 그랬던 이유가 내 잘못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나에겐 정말 큰 수확이었다. 그걸 알게 됨으로써 지금 이 순간에도 나를 향해 보내오는 선명한 적의는 이제 더 이상 날 상처 입힐 수 없게 되었다. 나는 나를 향해 이상한 소리를 하지 말라면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박상혁을 보다가 한 발짝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내가 자기 쪽으로 오는 것을 보고 조용해진 놈에게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채예령이랑 친할 수 있었던 건 노력했다기보단 옆집이었던데다 네가 말한 대로 같은 입양아라는 처지가 있어서 그런 거 맞아. 덕분에 소위 말하는 잘나가는 애들이랑도 얼굴 틀 수 있었던 것도 인정해. 내 입장에선 원한 적 없던 거긴 한데, 그래도 그게 아니꼬웠다면 미안.”

내가 들어도 영혼이 담기지 않은 사과에 열받았는지 박상혁은 힘줄이 불거질 정도로 세게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근데 성적은 다른 얘기거든. 네 말대로 내가 그 동네 급에 맞지 않게 과외를 받지도 못하고 자료 사서 혼자 공부하는 것밖엔 못 했는데, 채예령만큼은 아니지만 비싸고 유명한 선생님한테 과외받은 너보다 성적이 좋았다는 건 말이야 상혁아. 너보다 잘난 거 하나 없다고 생각한 내가, 적어도 머리는 너보다 잘났다는 이야기 아니겠냐?”

이 멍청하고 한심한 새끼야. 내 말이 이어질수록 분노에 부들거리던 박상혁은 입 모양만으로 한 마지막 말을 알아듣자마자 내게 달려들려고 했다. 그 모습을 보고 채예령 친구들이 붙잡고 있던 떨거지 두 명도 같이 날뛰는 바람에 싸움이 벌어질까 살짝 긴장했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내가 차분하게 지켜보기만 해서 그런지 다른 아이들도 그 세 명에게 휩쓸리지 않고 이성적으로 대처했다. 의도치 않게 엮여서 계속 언급당해야 했던 채예령은 뭐라도 해주고 싶은 눈치였으나 더 소란 일으키지 말고 오늘은 이만 가라는 말을 끝으로 화를 삭이는 듯 보였다. 박상혁 일행은 그 말을 듣고도 포기하지 않고 난동을 부리다가 결국 전 학생회와 몇몇 덩치 좋은 애들한테 붙잡혀 식당 밖으로 쫓겨났다.

“하, 폭풍 같았다 진짜.”

“그러게. 쟤 은근 쎄한 구석이 있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이렇게 쓰레기였을 줄이야.”

그 뒤로 몇 분간은 방금 있었던 일과 박상혁 무리에 대한 이야기로 시끌벅적하다가 금세 또 다른 주제로 이야기꽃을 피우면서 분위기는 점차 원래대로 돌아갔다. 나는 나를 도와준 강하민과 김은수에게 감사를 전하며 자리에 앉았다. 나를 따라 다시 착석한 두 녀석은 내게 기분 나쁜 건 잊어버리고 마저 놀자면서 술을 권했다.

평소라면 거절했겠지만 방금 있었던 일로 감정이 한껏 고양되어있던 나는 흔쾌히 주는 술들을 다 받아 마셨고, 약간 알딸딸한 기분이 되었다. 그렇게 한창 즐기고 있는데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둔해진 손을 움직여 꺼내든 핸드폰 액정에는 ‘최태혁’이라고 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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