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오늘 준비하느라 일찍 갈 건데 같이 가겠냐고 연락한 채예령에게 당부한 것이 있었다.
내가 먼저 부르지 않는 이상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들어도 참을 것.
무슨 엉뚱한 소리를 하는 거냐고 되받아치던 녀석에게 나는 긴말하지 않고 박상혁 이름 세 글자만 말했다. 회귀 전처럼 괜히 나 때문에 안 들을 소리 듣게 하기 싫었던 마음 반, 누군가의 도움 없이 내 힘으로 하고 싶었던 마음 반으로 한 말이었다.
덕분에 아까부터 힐끔대면서 한숨을 쉴 뿐 오지 않는 녀석을 보며 미리 말해두길 잘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될 줄이야.
“어후, 귀 아파. 난 저기서부터 시끄럽던데, 진호 너 괜찮아?”
“보니까 쟤네 때문에 먹지도 못한 거 같은데, 이거 먹어봐. 맛있더라.”
본인이 한 발언에 기분이 상한 놈들이 바로 옆에서 살벌하게 노려보는데도 강하민은 태연하게 웃고 있었고, 김은수는 모르는 척 내게 음식 접시를 밀어주었다.
“…시끄럽다니, 오랜만에 만나 반가워서 목소리 좀 커진 건데 너무하네.”
“하하, 그래도 좀 흥분해서 시끄럽게 한 건 맞긴 하잖아. 미안, 미안. 조심할게. 너무 그러지 말고 우리 같이 재밌게 놀자.”
내 옆에 앉은 놈이 기분 나쁜 티를 내면서 하는 말에 대꾸하려던 강하민은 박상혁의 중재하는 말에 막혔다. 입만 웃고 있는 얼굴로 세상 좋은 사람인 척 이야기하는 ‘미안’에는 누가 들어도 영혼 한 톨 담겨있지 않았으나 내용만으론 태클 걸 건덕지가 없었다. 강하민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한쪽 입꼬리만 올려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대화가 끊긴 틈을 타 이번엔 김은수로 인해 자리를 옮겨야 했던 놈이 테이블에 팔을 걸치며 물었다.
“근데, 너네 아는 사이였어? 너 나랑 같은 반이었던 적은 없으니까 김진호랑도 당연히 아니었을 텐데 어떻게 알아?”
“꼭 같은 반이어야 아는 건가? 그냥 이래저래 친해지는 거지.”
신경전을 펼치고 있던 것이 강하민이라 그런지 그쪽을 보면서 물어봤으나 답은 옆에 앉아있던 김은수가 했다. 고개도 돌리지 않고 코웃음을 치며 심드렁하게 대답하는 모양에 물어본 놈의 눈썹이 들렸다. 조금 더 싸해진 분위기를 깨는 것은 이번에도 박상혁이었다.
“야, 너는 뭘 그런 걸 물어보고 그러냐. 보나 마나 채예령이겠지.”
“아아 그러네! 내가 왜 그걸 생각 못 했지? 채예령 걘 친구도 엄청 많으니까 옆에 붙어 다니다 보면 그런 콩고물도 떨어지겠구나. 야이씨, 옆에만 있으면 노력 같은 거 없이 사람도 사귈 수 있고! 키링남 하는 보람이 있겠다, 진짜.”
박상혁의 타박에 놈은 뭔가 큰 깨달음이라도 얻은 양 손뼉을 치더니 총 모양을 한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면서 윙크를 날렸다. 그 행동에 웃는 것은 박상혁네 무리밖에 없었으나, 그들은 누가 웃고 안 웃고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분위기를 중재하는 포지션을 표방했던 박상혁 또한 강하민과 김은수의 표정이 굳든 말든 의자 등받이에 기대앉으면서 말을 덧붙였다.
“그러엄! 우리 진호 그렇게 멍청이는 아니다? 떨어지는 게 없는데도 붙어 다녔겠냐고. 있으니까 그렇게 눈치도 염치도 없이 죽어라 옆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겠지. 그거 때문에 지가 무슨 소릴 듣는지 아예 모르진 않았을 텐데.”
처음에 감싸줄 것처럼 시작한 박상혁의 말은 뒤로 갈수록 명백한 비아냥이 되었다. 이제 테이블에 앉은 그 누구도 진심으로 웃지 않았다. 나를 포함한 셋은 무표정해졌고 나머지 셋은 비웃음을 걸치고 있었다.
“소심해서 말도 제대로 못 하다가 한 번씩 갑분싸 만드는 애를 데리고 다니면서 같이 놀아줘, 밥 먹어줘, 친구 만들어줘. 몇백씩 바쳐도 아무나 못 받는다는 과외 자료도 공짜로 주고, 정성스레 정리한 노트도 주고. 설마 아니겠지만 소문엔 용돈도 주고 욕구도 풀어준다는데?”
대각선으로 앉은 놈이 내가 가장 싫어하는 소문을 꺼내든 순간 나는 이를 악물었다. 원래 다른 사람들이 있으면 이 정도까진 안 하는데 술이 좀 들어가서 이러나.
어쨌든 이젠 더 지켜볼 필요 없이 참았던 화를 쏟아내기에도 무리 없는 막말이었으므로 나는 침을 삼키며 땀이 흥건한 손을 말아 쥐었다. 바로 반박을 하려고 입을 여는 순간 어깨가 한쪽으로 기울 정도로 꾹 눌러오는 힘에 이게 뭔 짓인가 싶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손의 주인인 박상혁이 그 틈을 타 먼저 말하기 시작했다.
“야, 용돈은 몰라도 욕구 그건 진짜 아닐걸? 채예령은 게이 존나 혐오하거든. 그 소문 입에 올리면 안 돼. 너 걔한테 혼나고 싶어?”
녀석은 손까지 내저어가면서 말한 사람을 타박했다. 또 편들어주는 척 날 물 먹이고, 화내기 애매한 분위기로 만들려는 건가.
어깨를 누르든 말든 그냥 지르고 봤어야 했는데 반격의 순간을 놓쳐버린 것 같아 분한 마음에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한다고, 이어지는 말은 분위기를 누그러트리긴커녕 누가 들어도 웃어넘길 수 없는 내용이었다.
“아니 근데, 말하다 보니까 이상하네. 고등학교 때 너 호모라는 소문 돌았거든? 그거 모르는 애가 없었어. 봐, 쟤네도 들어봤다는 표정이잖아. 그럼 그걸 친구 많은 채예령님께서 한 번도 못 들어봤을 리는 없었을 텐데도 널 그렇게 데리고 다녔다는 게 좀, 이해가 안 돼.”
“…박상혁.”
“소문날 정도로 호모포비아인 애가 굳이 왜 그랬을까? 유독 너한테만 모든 면에서 관대했던 이유가 뭘까 진짜 납득이 안가. 흐음…. 그건가? 같은 입양아라서? 똑같이 입양된 처지가 불쌍해서 차마 내치지 못하고 챙겨줬던 건가?”
손이 떨렸다. 회귀 전 모임에서 채예령이 참지 못하고 결국 주먹질을 하게 만든 말이 나왔다. 지금 내 맞은편에서 누구보다 화가 난 표정을 하고 있는 강하민이 알려준 발언과 크게 어긋나지 않았다. 그때도 이런저런 대화를 하다 열 받은 박상혁이 ‘그 새끼가 너랑 같은 입양아라 그렇게 쩔쩔매는 거냐!’고 소리쳤다고 했으니까.
무슨 말을 하다 그렇게까지 된 건지는 자세히 듣지 못했지만 어쨌든 그 발언으로 퓨즈가 나간 채예령의 주먹질을 시작으로 각자 친한 애들까지도 끼어들어 패싸움이 되는 바람에 경찰서까지 갔다고 그랬었다. 오늘은 내가 왔으니 박상혁의 타깃은 당연히 내가 될 거라고 예상했고, 실제로 채예령과는 전혀 마찰 없이 흘러가고 있었는데 결국 똑같은 발언이 나온 것이다.
이쯤 되니 저놈은 무슨 일이 있든 오늘 저 말을 하려고 작정했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코로 숨을 크게 내쉬며 주변을 둘러봤다. 어느 정도는 각오를 했기에 놀라긴 했어도 충격을 받진 않았던 나와 달리 강하민과 김은수의 얼굴에는 경악과 혐오감이 서려 있었다.
곧 김은수가 떨리는 목소리로 놈에게 짓씹듯 말했다.
“박상혁. 너 선 넘었어.”
물론 박상혁은 정색을 당하고도 전혀 기죽지 않았다.
“아 그래? 진호야 내가 선 넘었어? 기분 나빠?”
당연한 소리를 저렇게 뻔뻔하게 물어볼 수 있는 것은 설사 내가 기분이 나쁘더라도 괜찮다고 대답할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박상혁은 불편함을 느낀 아이들이 나를 대신해 나서줄 때마다 이런 식으로 나에게 분쟁의 발화점을 떠넘겼다. 그럼 나는 이 상황 자체를 빨리 끝내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너도 한마디 하라는 눈빛을 피해 고개를 젓고 농담인 거 안다면서 웃었다.
몇 번 그런 일을 반복하니 점점 나를 위해 나서주는 아이들은 없어졌고, 결국 그들도 내가 당하는 것이 어느 정도는 자업자득이라고 생각하면서 관심을 꺼 버렸다. 오늘도 당연히 내가 그래 주리라 기대하고 저러는 거겠지만, 나는 그 기대에 어울려줄 마음이 없었다.
그리고 방금 녀석의 발언들은 천하의 호구였던 그 시절의 김진호도 웃으며 넘어가 줄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응. 기분 나빠.”
“들었지? 괜찮다잖… 응?”
가만히 있던 내가 녀석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한 말을 듣지도 않고 으스대던 녀석은 말하다 말고 내 쪽으로 시선을 내렸다. 나는 박상혁을 똑바로 마주 보며 다시 한 번 또박또박 말했다.
“기분 나쁘다고.”
그제야 여태까지 계속 느물거리는 표정으로 있던 녀석이 인상을 확 찌푸렸다.
“…하. 너 지금 뭐라고 했냐?”
“안 들리는 거야, 아니면 못 들은 척하고 싶은 거야? 왜 자꾸 쓸데없이 말 반복하게 만들어. 넌 그 말이 선을 넘었는지 안 넘었는지 판단이 안 돼? 너 지금 선 넘은 거 맞고, 나는 기분이 나빠. 그것도 씨발, 그냥 나쁜 정도가 아니라 존나 나쁘다고.”
거기까지 말하고 나는 아직까지도 내 어깨에 올려져 있는 녀석의 손을 밀어서 떨어트렸다.
“어른이면 어른답게 할 말 못 할 말 구분은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아니면 고등학교 때처럼 네가 무슨 개소리를 하든 다 웃어 넘겨줄 줄 알았어? 그때 내가 그랬던 건 내가 뭘 어쩌든 학교 가면 매일 마주쳐야 했기 때문이었어. 괜히 거슬렀다가 거기서 더 씨발새끼가 되면 나만 힘들어질 것 같아서.”
나는 어이가 없는지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나를 내려다보는 놈에게 마주 웃어주었다.
“가끔 그때를 떠올리면서 그게 뭐 그리 무섭다고 계속 참았을까 자책을 했는데, 지금 보니까 나름 현명하게 굴었던 것 같다. 진짜 거기서 더 최악의 인간이 될 수도 있었네. 분명 나이는 같이 먹었을 텐데 정신연령은 옛날보다도 어려지고 인성은 더 쓰레기가 되었구나, 박상혁.”
집에서 거울을 보고 연습한 보람이 있는지 내 목소리는 하나도 떨리지 않았고, 더듬거리지도 않았다.
“잘 들어, 이 철없는 새끼야. 나는 채예령한테 뭘 일방적으로 받아먹은 적 없고, 그걸 기대하고 걔랑 친구 하는 거 아니야. 같이 노는 게 재밌으니까 노는 거고, 밥 먹을만하니까 먹는 거고, 걜 통해 새로운 사람을 만나긴 했어도 친구 만들고 싶어서 일부러 붙어 다닌 거 아니고.”
말을 하면서 점점 더 차오르는 분노로 인해 녀석을 올려다보고 있다는 사실도 짜증 나기 시작했다. 나는 이러면 더 주목을 받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몇백 하는 과외에서 받은 자료, 그거 그 과외하시는 분한테 자료값 지불하고 받은 거고. 용돈은 씨발, 채예령이 아니라 날 입양하신 부모님이 주셨고. 욕구는 새끼야, 네가 말한 대로 걔는 호모포비아고 나는 호모라서 애초에 성립이 안 된단다.”
모두 앉아있는 테이블에서 나 혼자만 일어서서 앉아있는 녀석에게 말을 퍼붓고 있자니 예상대로 이쪽을 힐끔대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러나 항상 마음에만 담아두고 있던 걸 겨우 풀어내기 시작한 나는 그런 것 따위 이제 신경 쓰이지 않았다.
“네가 입에 담은 말 중에 그나마 고개를 끄덕여줄 말이 있다면, 그래, 나랑 채예령 둘 다 입양된 애라서 더 친해진 거 맞아. 그거 하나 비슷하게 맞췄네. 근데 있잖아, 나도 말하다 보니까 영 이상해서 그러는데. 너네는 왜 너네랑 좆도 상관없는 내 개인 사정들을 어떻게 그렇게 많이 알아? 왜 입에 올리고, 왜 궁금해해?”
너네 사실은 나 좋아해? 청소년기 짝사랑의 비뚤어진 표현이었냐? 그렇게 비아냥대는 말을 할 즈음엔 시끄러웠던 식당이 조용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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