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어? 진호다! 야! 진호도 왔어!”
“내가 진호 온다 그랬잖아. 진호야, 이리 와서 앉아. 넌 여기 테이블이야.”
“진짜 오랜만이다 김진호! 잘 지냈어?”
약속 시간에 딱 맞춰 들어간 식당엔 벌써 아는 얼굴들이 꽤 많이 모여 있었다. 시끄러울 걸 예상하고 아예 작은 식당 전체를 빌렸다고 하더니, 주방에서 분주한 직원들 말고는 우리밖에 없어 보였다.
나는 채예령이 가리키는 테이블로 걸어갔다. 껄끄러운 얼굴이 보이는 다른 테이블과는 달리 반가운 마음이 드는 사람들만 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오랜만이라는 흥분감 때문인지 호들갑스럽게 맞이해주는 목소리가 컸다. 그 때문에 다른 애들의 시선도 모이는 듯했으나, 뒤이어 들리는 출입문의 딸랑 소리에 금세 흩어졌다.
일찍 들어가 별로 없는 사람들 사이에 끼는 것도 싫고, 늦게 들어가 주목을 받는 것도 싫어서 딱 맞춰 들어온 보람이 있었다.
“난 잘 지냈지. 너넨? 잘 지냈어?”
그래도 끈질기게 따라붙는 시선들이 있었지만, 일단은 무시하고 비어있는 의자에 앉으면서 나를 보고 있는 아이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난 잘 못 지냈어, 임마. 진호 너는 졸업하자마자 잠수를 타고 말이야!”
“그래! 너 이 자식 그러는 거 아니다! 너무 섭섭했어!”
“하하하, 미안. 그냥 좀 이래저래 바빴어.”
“야이씨, 너나 연락 좀 하고 살아! 이 새끼는 꼭 지도 연락 안 하면서 맨날 연락 안 하냐고 그러더라?”
“아 귀찮아, 귀찮아. 모태 집돌이는 그런 거 너무 귀찮아요오. 그치 진호야?”
나는 내게 어깨동무를 하며 기대오는 친구에게 웃어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앉고 나서보니 정말 그나마 친했다고 말할 수 있는 애들만 있었다. 보통은 채예령과 친해서 얼결에 몇 번 같이 밥을 먹고, 놀러 다니면서 알게 된 친구들 중에 나라는 존재에 대해 딱히 악의를 가지지 않았던, 모난 곳이 없는 아이들. 채예령을 빼고 만날 정도로 친해지지는 못해서 내 친구라고 말하기엔 망설여지지만, 그래도 같이 있으면 불편함 없이 있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애들이었다.
개중에는 회귀 전 나에게 이 모임에서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못 봐서 아쉬웠다며 따로 연락을 줬던 녀석도 있었다. 나는 서로 장난치기 시작하면서 다시 왁자지껄해지는 사이로 그 친구, 강하민을 보고 있다 눈이 마주쳤다.
녀석은 내가 자기를 보고 있다는 걸 눈치채자마자 인상을 찌푸리며 떠드는 애들을 가리키더니 자기 귀를 막는 시늉을 했다. 그 장난스러운 제스처에 나도 양손을 들어 올리고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고개를 젓자 우리 둘을 번갈아 본 친구가 둘이 뭐하냐고 소리를 지르며 강하민에게 헤드록을 걸었다.
정말 오랜만에 하는 즐거운 투닥거림이었다. 내 고등학생 시절이 딱 지금 같기만 했어도 참 괜찮았을 텐데. 안타깝게도 고등학교에는 이 테이블에 앉아있는 아이들만 있었던 것도 아니고, 이런 아이들이랑만 같이 있을 수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운도 따라주지 않았던 나는 이 자리에 있는 누구와도 같은 반에 있었던 적이 없었기 때문에 같이 시간을 보낼 기회도 별로 없었다. 오히려 나와 3년 내내 같은 반이었던 애는,
“자자, 다들 집중! 우리 대충 다 모인 것 같으니까 간단히 오늘 어떻게 할지만 설명하….”
딸랑.
“내가 왔다!”
누구보다 주목을 받으면서 등장한 박상혁, 저놈이었다.
“우오오오! 왔냐, 박상혁!”
“이 새끼, 또 늦냐! 맨날 늦냐! 15분 늦었으니까 15만 원 내라!”
“너 어제 한강 가서 술 마시느라 늦었지? 사진 올린 거 보니까 제대로 즐겼던데?!”
친구가 많았던 놈답게 각 테이블에서 한두 명씩 일어나 떠드는 바람에 설명을 듣고자 조용해졌던 식당이 순식간에 난리가 났다. 아는 체하는 동창들과 양손 하이파이브까지 하면서 돌아다니는 놈을 보니 소란이 금방 잠재워지진 않을 것 같았다. 내가 들어왔을 때 역시 서로 얘기하느라 시끄럽긴 했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이젠 귀가 멍멍할 정도였다.
이렇게 사람이 많이 참여하는 행사에서는 시간 조율이 생명이라고 채예령이 귀에 딱지가 앉도록 말했었는데, 괜찮은 건가. 나도 모르게 녀석이 앉아 있던 테이블을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서 있는 채예령과 그 옆에 앉아 있던 전 학생회 아이들 모두 한숨을 쉬고 있었다.
“이야아, 우리 회장님! 늦어서 미안, 미안. 이거 자리 정해져 있는 거라며? 내 자린 어디야? 나 어디 앉아? 아니면 늦은 벌로 여기서 손 들고 서 있을까?”
순회공연을 하듯 모든 테이블을 돌아다니며 온갖 아는 척을 다 마친 녀석은, 마지막으로 채예령이 서 있는 테이블로 가서 미안하다고 손을 모으고 허리를 숙이더니 급기야 두 손을 번쩍 들었다. 일부러 과장하는 태도에 몇몇은 인상을 찌푸렸고 대부분은 웃음을 터트렸다.
가만히 보고 있던 채예령은 한마디 하기 어려운 분위기를 파악하곤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후…. 네 자린 저기니까 가서 앉아 얼른.”
“롸져!”
박상혁은 마지막까지 장난스럽게 대꾸하더니 실실 웃으면서 자리에 가서 앉았다. 소란을 일으킨 장본인이 조용해지자 웅성거리는 소리는 금방 잦아들고 식당에 모인 사람들의 시선은 유일하게 서 있는 채예령에게 집중되었다.
“어차피 그냥 놀려고 모인 거니까 설명은 짧게 할게. 오늘 수가 많아서 식당 테이블에 맞춰서 임의로 나눠 놓긴 했는데 자리 이동은 그냥 자유롭게 해도 상관없어. 음식은 넉넉하게 주문했다고 했지만 혹시 모자라면….”
녀석은 금방 표정을 바꿔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간략히 설명했다. 바빠 보이던 주방을 보고 있던 나는 자리 이동이라는 소리를 듣고 나도 모르게 박상혁 쪽을 돌아봤다가 얼른 자세를 바로 했다. 다행히 박상혁은 옆에 있는 애랑 낄낄대고 있어 눈이 마주치진 않았다.
아까 테이블을 돌 때 내가 있는 곳에 와서 별말을 안 한 거 보면 어제 일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을 것 같긴 한데, 그 일이 아니어도 시비를 걸어올 걸 알아서 마음이 놓이진 않았다.
“자, 지루한 설명은 이상! 오랜만에 봐서 반갑다! 오늘 아주 제대로 놀아보자!”
예령이의 말이 끝나자마자 애들이 와아-하는 소리와 함께 손뼉을 쳤고, 타이밍 좋게 음식들이 테이블로 서빙되었다. 다양한 메뉴가 차려지고, 음료수 혹은 술을 주문하여 곁들였다.
처음엔 배를 채우느라 배정된 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하며 음식을 먹던 애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을 찾아 자리를 이리저리 이동하기도 하고, 아예 서서 이야기하는 애들도 생겼다. 내가 앉은 테이블에 있던 녀석들도 각자 만나고 싶었던 친구를 찾아 하나둘 자리를 비웠다.
음식 먹는 데 열중하느라 끝까지 앉아있던 한 명도 뒤에서 자기를 부르는 소리에 일어나 가버려서 이젠 남은 건 나밖에 없었다. 이렇게 되면 앉아있는 쪽이 더 눈에 띄려나. 굳이 가서 말을 걸 만한 사람들은 없지만 분위기상 일어나야 하나, 고민을 하는데 옆에서 술 냄새가 나더니 누군가 나에게 어깨동무를 해왔다.
“김진호오오.”
올 게 왔구나. 한숨을 쉬면서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려는데 반대편과 맞은편에서도 인기척이 느껴졌다. 돌아본 곳에는 박상혁과 항상 같이 다니던 두 녀석이 앉기 위해 의자를 빼고 있었다. 최악이었다.
“야, 인간적으로 어젠 내가 먼저 아는 척했으니까 오늘은 네가 먼저 와 줘야 하는 거 아니냐?! 어떻게 또 내가 올 때까지 뒤도 안 돌아봐! 형님 섭하게!”
“그래도 넌 나아. 우린 쟤 들어올 때 그렇게 간절하게 봤는데 눈길도 안 주고 개무시하더라.”
술기운이 오른 것처럼 행동하긴 해도 취한 것은 아닌가 보다. 하긴 나처럼 술이 약하거나 막무가내로 들이붓지 않는 이상 취하기엔 충분하지 않은 시간이었다. 세 명 다 얼굴이 약간 빨개지고 술 냄새를 조금 풍길 뿐, 눈은 아직 또렷했다.
그 점이 더 소름이 끼쳤다. 차라리 취할 때쯤 왔으면 모르겠는데 멀쩡한 정신으로 셋이 몰려와 굳이 아는 척하는 이유는 뭘까. 자기들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가 이 많은 사람 사이에서 서로를 찾아 아는 척할 만큼 각별한 사이는 절대 아니었는데.
“학교 다닐 때도 그랬잖아. 지가 언제부터 그랬다고 맨날 쉬는 시간에도 공부하는 척 말 걸어도 대답도 안 해주고.”
“아 맞아, 맞아! 그러다가 채예령 오면 쪼르르 가서 아양 떨고!”
“풉! 아양을 떤다니! 그런 게 아니라 우리 진호는 키링남이라 그랬던 거야. 채예령의 키링남 김.진.호! 크, 시대를 앞서 나가셨다.”
저게 뭔 소리야. 처음 듣는 단어였지만 저놈들이 결코 좋은 뜻으로 사용할 리가 없는 것을 알아서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그러나 내버려 두면 어디까지 갈지 보고 싶었던 나는 얼른 표정을 바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이 정도에도 녀석들은 내가 그들의 말에 반박할 의지가 없다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계속할 것을 알았다. 말하는 내내 내 이름이 빠지지 않지만 정작 나는 말 하지 않아도 대화가 이어지는, 어이없는 상황은 지겨울 정도로 익숙했다.
또 어떤 말을 쏟아낼까 나름대로 예상을 해보면서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데, 들리는 것은 전혀 다른 사람의 목소리였다.
“너네 그만해라. 다 커서 일진 놀이하는 거 안 지겹냐?”
“나와! 여기 내 자리임! 나 누가 불러서 잠깐 일어난 거였단 말이야. 마저 먹게 나와.”
나를 감싸는 말에 고개를 드니 강하민과 마지막에 자리를 떴던 친구, 김은수가 자기 자리에 앉고 있었다.
“하하하, 일진 놀이라니. 무슨 개소리야 그건 또. 내가 무슨 일진이야, 나는 세계 제일 찐딴데. 그지 진호야?”
손등으로 어깨를 툭 치는 힘이 다른 때보다 센 것을 보니 기분이 적잖이 상했나 보다. 일진이라는 단어에 움찔할 만큼의 양심은 있었네. 재빠르게 앉아있는 면면들을 살펴보니 마주 보고 있는 얼굴들엔 아직 미소가 띄워져 있었으나 분위기는 미묘하게 날카로워졌다.
나는 서로 눈치싸움을 하는 것을 보며 지금 질러야 하나 고민을 했다. 그러나 아직 남들이 보기엔 정색할 정도로 심한 말을 한 것은 없었기에 그랬다간 또 급발진한 것처럼 몰아갈 것 같았다. 아무래도 막말 게이지를 더 채워야 할 것 같아 조용히 있는 새 박상혁의 무리 중 한 명이 놈이 던진 농담을 장난스레 받아쳤다.
“맞지. 우리 상혁쿤은 그냥 찐따도 아니고 개찐따지.”
“윽! 지나친 팩트폭행은 선량한 상혁이를 아프게 합니다!”
총을 맞은 것처럼 가슴을 부여잡는 박상혁을 보고 두 명은 다시 웃으며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분위기는 언뜻 보면 다시 풀린 것 같아 보였다. 그러나 입만 웃고 있는 강하민과, 마저 먹는다면서 너스레를 떤 것과는 달리 젓가락도 건드리지 않고 있는 김은수로 인해 완전히 전과 같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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