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호 이야기-95화 (95/234)

95화

나는 최태혁의 말을 멍하니 곱씹었다. 원하면 범죄를 저질러주겠다는 말은 정말 처음 듣는 말이었다. 근데 왜 어디선가 들어본 거 같지. 전혀 다른 걸 알면서도 자꾸 오버랩되는 장면이 있었다. 친구와 싸우고 엉엉 울며 들어온 동네 꼬마에게 ‘누우가 그랬어! 혼내 줄 테니까 데리고 와!’하는 할아버지 혹은 할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답지 않게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는 녀석의 얼굴이 어디선가 봤었던 그 장면에 덧씌워져서 보였다.

“…푸흡.”

웃기엔 제법 진지한 상황인 거 아는데도 웃음이 터졌다. 최태혁이 과장된 목소리와 표정으로 아이를 달래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니 참을 수가 없었다.

한번 웃음이 터지니 멈춰지지도 않았다. 사실 생각해 보면 녀석이 한 말 자체도 웃겼다. 워낙 무섭게 생겨서 살벌하게 들렸을 뿐이지, 너무 현실감 없는 말이지 않은가.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갈 것도 없이 또래끼리 장난 어린 허세를 부릴 때나 할 법한 말들이었다. ‘내가 걔 죽여줘? 어? 아주 사단 내?’ 하고 허세 부리는 최태혁이라니, 진짜 너무 안 어울리잖아. 시원하게 소리 내 웃고 싶은데 그러면 정말 이상한 애 취급받을까 봐 나는 입을 꾹 다문 채 어깨만 들썩였다. 최태혁은 그런 나를 내려다보더니 못 말리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푸흐흐, 좋아서 그래요. 기분 좋아서. 뭔가, 죽이네 마네 말해 줄 정도로 격하게 내 편 들어주는 거 같아서, 그게 웃기고 좋아서요.”

정말이었다. 웃기 시작한 것은 녀석과 전혀 어울리지 않은 모습을 상상해서였지만, 잔뜩 우울해졌던 기분을 반전시켜 웃을 마음이 들게 만들어 준 것은 거기서 느껴지는 따뜻함이었다.

나를 보호해 줄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은 각자가 가장 우선으로 지켜야 할 사람 혹은 무언가가 있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어도 차마 손을 뻗을 수가 없었다. 그들 외에 내 곁에 꾸준히 있었던 것은 채예령 뿐이었는데, 나는 녀석에게는 보호받고 싶지 않았다.

자존심을 부리는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나는 녀석과 기울어지지 않은 친구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다. 그래서 내가 많이 모자라긴 해도 서로에게 의지가 되어줄지언정 그 뒤로 숨고 싶지는 않았다. 결과적으로 날 위해 내 앞에 서 있어 줄 사람은 누구도 없었다. 그래서 더 겁쟁이가 되어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했었던 것 같다. 나는 내가 다 해야 하니까, 내가 다 감당해야 하니까.

내가 보는 최태혁은 큰 사람이었다. 강하고 큰, 거대한 벽 같은 사람. 그런 사람이 내가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날 위해 나서주겠다고 하는 것도 처음, 이 사람이라면 나 하나 정도 그 뒤에 숨어도 정말 아무렇지도 않겠구나, 하는 안도와 신뢰가 드는 것도 처음이었다.

든든했다. 한 번도 제대로 부려본 적 없는 어리광이라는 걸 부려보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물론 진짜 부릴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될 것 같다는 마음만으로도 긴장이 풀렸다.

“가끔 그런 생각했거든요. 되게 센 형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은데 그렇다고 나 때문에 그 사람이 힘들어지거나 부담을 느끼는 건 싫으니까. 그러니까 동생 말고 형, 그것도 그냥 형 말고 내가 기대도 거뜬할 것 같이 엄청 세고, 크고, 듬직한 형.”

불가능한 것은 알지만 그렇기에 더 열심히 상상했던 가상의 인물 중에 한 명이었다. 나만을 위하는 멋진 연인과 같은 맥락으로 언제나 나를 지켜주는 형은 내가 힘들 때마다 상상으로라도 만들어 위안을 얻고는 했다.

“근데 지금 좀, 형이 그래 보였어요. 형이 제 형이라기엔 너무 잘나긴 한 거 아는데요, 그냥 순간 그런 느낌이 들었….”

“김진호.”

쑥스러워서 테이블을 보면서 말하고 있던 나는 내 이름을 부르는 나직한 목소리에 하던 말을 흐리면서 고개를 들었다.

“나는 네 형이 아니다.”

최태혁은 웃음기 하나 없이 내 말을 부정했다.

“아…그, 그죠. 하하하, 저도 진짜 형이라고 생각한 건 아니에요. 그냥, 그냥….”

나는 혼자만 들떠서 상상의 나래를 펼쳤던 것이 민망하기도 하고 괜스레 섭섭하기도 해서 말을 하다가 끝을 흐렸다. 그냥 생각만 할 걸 그걸 왜 괜히 말해서…. 아니지. 내가 진짜 형이 되어달라 그런 것도 아닌데 저렇게 칼같이 굴 건 또 뭐야. 당황한 나머지 마음이 갈팡질팡거렸다.

그리고 그 순간, 볼이 잡혀 고개가 들렸다. 파란 눈동자가 훅 가까워진다 싶더니 붕어처럼 내밀어진 입술 위로 말랑하고 따뜻한 입술이 꾹 눌러졌다가 쪽, 하는 소리와 함께 떨어져 나갔다.

“울상 짓지 말고 끝까지 들어. 형제는 이런 걸 못 하잖아. 그건 곤란해.”

그렇게 말한 최태혁은 볼을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줘 내 얼굴을 더 붕어처럼 만들더니 피식 웃으며 말했다.

“엄청 세고 크고 듬직한 사람, 그게 필요하다면 기꺼이 해주마. 어려울 것 없지. 김진호 너 하나 정도는 온 힘을 다해 매달린다 해도 힘들긴커녕 깃털만큼의 무게도 느껴지지 않아. 그러니 쓸데없는 걱정 말고 기대.”

볼이 잡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었다면 지금 내 표정 진짜 바보 같았을 거다. 헤실헤실 자꾸 입꼬리가 올라가려고 난리였다.

혼자가 아닌 기분이 들었다. 저번엔 쌍둥이더니 이번엔 최태혁이었다. 민선우가 말한 대로 정말 애정을 받고 있었구나, 나. 정상이 아닌 것 같아 보이긴 했지만 싫다고 뿌리치기엔 너무 따뜻했다. 나는 가슴에 차오르는 따뜻한 기운에 눈가까지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얼른 눈에 힘을 주었다.

“내일 가야겠어요. 가서, 집에서 연습한 대로 그동안 참았던 말들 다 해 줄 거예요. 아까까진 못할 것 같았는데, 이젠 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이왕 결심한 거니까 해볼래요, 내 힘으로.”

“그래.”

나는 내 결심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는 최태혁을 보면서 장난기 가득한 말투로 물었다.

“만약 내일도 못 하면, 그러면 저 형한테 막 대신 복수해달라고 해도 돼요? 치고받고 싸우는 것도 아니고 말로 하는 건데도요? 한심하게 부탁하고 그래도 다 해 줄 거예요?”

녀석은 볼을 잡고 있는 손을 풀어내는 나를 보면서 씩 웃으며 답했다.

“물론. 내 귀여운 똥강아지가 힘들다는데 당연히 해줘야지. 그런 놈 하나 뒷말 안 나오게 죽이는 건 일도 아니야.”

“어…아니, 죽여 달라는 게 아니라 그냥 복수만 해달라고 할 건데요.”

“그래, 뭐든. 그러니 한심하다 생각 말고 편하게 얘기해. 하나도 한심하지 않으니까.”

최태혁의 말에 백만 대군을 얻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 삶에 이런 말을 해 주는 사람이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는데 듣는 날이 올 줄이야. 솔직히 이렇게 말하긴 했어도 정말 도움을 청할 생각은 하나도 없었다. 그럼에도 물어본 것은 말을 남기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자린고비가 천장에 매달린 생선을 보며 생선을 먹는 것 같은 기분을 내며 견뎠다면, 나는 나를 행복하게 하는 말들을 꺼내 보며 힘든 순간들을 견뎠다. 정말 내 옆에 있거나 내가 쥘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말에 담긴 따뜻함이 나를 강하게 만들었다. 회귀 전의 시간까지 합해도 성인이 되고 나선 그런 말들을 들을 수가 없었는데, 최근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사람들에게서 듣는 것 같아 신기했다.

“그래요. 그럴게요. 흐흥, 기분 이상하네, 진짜. 흠흠! 말을 많이 했더니 아까 먹은 거 다 소화된 거 같아요. 이거 더 식기 전에 얼른 먹을까요? 많이 샀으니까 아까처럼 다른 사람들도 다 불러서 같이 먹어요, 우리.”

우울감이 사라지자 갑자기 식욕이 돌았다. 나는 얼음이 녹아 층이 생겨버린 바닐라 라떼를 휘젓고 한 모금 마셨다. 상자를 죄 펼쳐놓았으면서 건드리지도 않았던 포크도 비닐을 모두 벗겨 여기저기 꽂아 놓았다.

최태혁은 내키지 않는 듯했지만 나의 재촉 어린 손짓에 못 이기는 척 핸드폰을 들었다. 이번에도 세 명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는지 금방 손에 음료수를 들고 나타나 자리를 잡고 앉았다.

우리는 농담도 하고,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면서 내가 사 온 디저트를 맛있게 먹었다. 다 식었지만 누구 하나 인상 찌푸리는 일 없이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최태혁은 그답게 과묵했지만, 나는 이제 녀석의 과묵함이 불편하지 않았다.

그렇게 이런저런 일이 있었던 한강 피크닉은 디저트를 끝으로 시간상 정리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올 때와는 달리 최태혁이 운전하는 차 조수석에 앉아 갔다.

“내일 약속이 끝나면 연락해라.”

워낙 일이 많아서 그런가 체감상 하루 종일 만난 것 같은데 녀석은 아니었나 보다. 잊은 줄 알았던 24시간 발언에 맞게 바로 약속을 잡으려는 모습에 나는 미간을 모으며 대꾸했다.

“내일 저녁 약속이라 끝나면 늦을 텐데요? 차라리 일요일에 봐요.”

“괜찮으니 일단 연락해. 상황 봐서 결정할 테니.”

아오 저 고집불통. 마침 신호에 걸려 여유가 생긴 최태혁이 내 쪽을 보며 말했다.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말해도 안 들어 먹는 걸 보면 무슨 일이 있나 싶기도 하고, 더 말해봤자 내 입만 아플 것 같아서였다. 그 뒤로는 나의 일방적인 수다가 차 안을 채웠다. 내내 고개만 끄덕거리던 최태혁은 내가 내릴 즈음이 되어서야 입을 열었다.

“진호야.”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차 문을 열고 막 한쪽 발을 내딛던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이어지는 최태혁의 말에 또 웃음이 터졌다.

“기죽지 말고 다녀와.”

녀석은 그렇게 말하며 기운을 나눠주기라도 하듯 내 정수리 부근을 두어 번 토닥였다. 나는 그런 녀석을 보며 웃다가 골목에 들어선 차의 라이트를 눈치채고 얼른 차에서 내렸다.

“네, 형! 연락할게요. 조심히 가세요!”

문을 닫기 전에 몸을 수그리고 건넨 인사에 최태혁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내가 문을 닫자마자 바로 출발했다. 나도 녀석이 출발하는 것을 보자마자 집으로 들어왔다. 집은 시끌벅적했던 시간과 대조되어 더 캄캄하고 조용해 보였다. 평소라면 그 갭에 약간은 우울해졌을 텐데 오늘은 이상하게 괜찮았다. 습관적으로 불을 켰을 때 환해진 거실 한쪽을 장식하고 있는 풍선과 액자를 보고는 혼자 웃기까지 했다. 나쁘지 않은 변화였다. 내일도 좋은 변화가 있을 수 있기를.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그날 하루를 마무리했다.

“넌 할 수 있다, 김진호.”

그리고 드디어 각오한 시간이 다가왔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95)============================================================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