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박상혁은 갑작스러운 통증에 놀란 건지 기겁을 하며 손을 뒤로 빼면서 소리를 질렀다. 최태혁은 그런 박상혁을 향해 한쪽 입꼬리만 올리더니 아래로 깔아보며 말했다.
“나쁜 손버릇은 이렇게 고쳐주는 편이라서.”
“그게 무슨, 아니 야! 너는 친구란 놈이 왜 가만있어?!”
뭔가를 따지려던 박상혁은 최태혁의 기백에 눌렸는지 방향을 틀어 나에게 짜증을 냈다. 나는 두 명을 번갈아 보다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상황상 갑자기 공격을 한 최태혁에게 뭐라고 해야 맞는 것 같은데,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내가 안절부절못하면서도 아무 말도 안 하고 서 있기만 하자 박상혁은 꺾였던 손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면서 혀를 찼다.
“됐다, 내가 너한테 뭘 바라냐.”
소심한 새끼. 놈은 최태혁과 거리를 벌리고 서서 나한테만 들릴 정도로 작게 말했다. 그 중얼거림엔 한숨과 비웃음이 섞여 있었다. 뭐라고 반박하고 싶었으나 말이 나오지 않아 애꿎은 캐리어 손잡이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형이 호신술을 오랫동안 해서 습관적으로 그런 거 같아.”
“하, 호신술? 참나…. 무슨 오해가 있으셨나 본데요, 저는 가볍게 어깨에 손 올려놓으려던 거거든요? 친구끼리 하는 장난에 손버릇이니 뭐니, 좀 어이가 없네요.”
“나쁜 마음으로 그런 건 아니야. 너무 그렇게 기분 나빠하지….”
“아주 대변인 납셨네. 사과는 못 받아 줄망정…됐고, 야. 너 이번 모임 온다며? 여기 더 있으면 무슨 일을 당할지도 모르겠고, 어차피 거기서 또 볼 거니까 오늘은 이만 갈란다. 흠흠, 잘 놀다 가세요. 내일 보자.”
협박이라도 하듯 내일 보자는 말에 힘을 주어 말한 녀석은 내키지 않는 얼굴로 최태혁에게 목례를 한 것을 마지막으로 우리에게서 멀어졌다.
한바탕 폭풍이 지나간 것 같다. 내가 간다는 얘기는 어디서 들은 걸까. 채예령이 어딘가의 단톡방에 올린 건가. 점점 작아지는 놈의 뒷모습을 보면서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한쪽 손이 허전해졌다.
“어…?”
“얼음 녹는다. 이제 그만 자리로 가지.”
하도 세게 쥐고 있어 구겨진 캐리어와 디저트 봉투가 어느새 최태혁의 손에 있었다. 나는 내 어깨를 잡고 걸음을 유도하는 힘에 저항하지 않고 다리를 움직였다. 걷다 보니 잔뜩 위축되었던 것이 슬슬 풀려 갔고, 그 틈엔 자괴감이 자리 잡았다.
이젠 눈치 볼 애들도 없고, 망칠 분위기도 없었는데 나는 또 거기서 그 새끼가 하는 말에 바보처럼 웃기만 했다는 사실이 참을 수가 없이 화가 났다. 내 자신이 너무 한심해서 이가 갈렸다.
당장 그 새끼 혼자 있는데도 이렇게 바보같이 굴었는데 그 무리와 다른 애들까지 대거 있는 자리에서 참도 반격하겠다, 김진호.
“똥강아지, 발.”
“…예? 아, 아니에요! 제가 벗을게요.”
생각에 빠져있는 동안 돗자리에 도착했었나 보다. 발목 부근을 툭 치는 손길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무릎을 굽힌 최태혁이 내 신발 뒤꿈치 부근을 잡고 있었다. 벗겨주기 위해 발을 들라고 한 것 같은 모습에 나는 녀석의 어깨를 밀며 발을 뒤로 빼버렸다. 자세 그대로 나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녀석에게 손을 내젓고선 허겁지겁 신발을 벗어두고 돗자리를 밟았다.
들고 있던 캐리어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면서 이미 놓여 있는 캐리어를 보니 음료가 한 잔밖에 꽂혀있지 않았다. 어느새 세 잔은 주인들이 가져간 모양이었다. 얼마나 정신을 빼놓고 걸었던 거야, 나. 안 넘어진 게 용하네. 나는 아메리카노를 최태혁의 앞에 두고 바닐라 라떼를 꺼내 들어 한 모금 마셨다. 달달한 음료를 마시니 기분이 좀 나아지는 것 같았다.
“고마워요, 형. 형 아니었음 마시지도 못하는 아메리카노 시킬 뻔했어요.”
기계적으로 디저트 상자를 꺼내 펼쳐놓으면서 맞은편에 앉은 최태혁에게 넌지시 고마움을 전했다. 말하면서 힐긋 올려다본 녀석은 별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머리도 마음도 복잡해서 가타부타 말할 마음이 들지 않았던 나도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많네요.”
한 상 가득 차려진 디저트들. 이것도 다 같이 먹으려고 이렇게 많이 산 건데, 세 명을 불러 달라고 말하기엔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자리를 지키고 있기로 했던 재원 씨도 안 보이네. 아까처럼 눈에 보이는 데 있을까 주위를 둘러봐도 세 명 모두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처음 메뉴를 볼 때만 해도 다 맛있어 보였던 음식들인데 이제는 먹을 생각이 들지 않았다. 입맛이 없다기보다 목 안쪽이 까끌거리고 너무 지쳐서 포크 들 힘도 없는 느낌. 나는 가슴 한구석에서 점점 규모를 키워가는 찝찝한 우울감을 애써 모른 척하면서 무릎을 끌어안았다.
세운 무릎에 턱을 괴고 디저트를 보고 있기만 하다가, 별안간 들리는 최태혁의 뜬금없는 말에 고개를 들었다.
“말로 해.”
녀석은 양반다리를 하고 팔짱을 낀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턱을 살짝 치켜들고 눈만 내려서 보고 있어 사람을 깔보는 것처럼 보일 법도 했으나 완벽한 이목구비 덕분인지 냉철하고 듬직한 미남으로 보였다. 최태혁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생각이 너무 많아질 땐 밖으로 뱉어서 덜어내는 것도 방법이다.”
아아, 그런 뜻이었구나. 나는 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을 흘리면서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안 그래도 이런저런 생각이 범람해서 머릿속은 이미 과부하가 걸린 참이었다.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나는 확실히 생각을 입 밖으로 내면서 정리하는 타입이긴 했다. 혼자 집에 있었다면 진작 혼잣말이라도 하면서 풀었을 텐데, 앞에 사람이 있어 참은 것이었다.
최태혁이 그걸 알고 말한 건지, 아니면 녀석도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는 타입인 건지 모르겠지만 저 말을 들으니 억지로 잠가두었던 자물쇠가 헐거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까 걔요. 친구 아니에요. 적어도 저는 친구라고 생각해 본 적 한 번도 없어요. 그 새끼 때문에 생긴 안 좋은 기억이 너무 많거든요. 막 때리고 그런 건 아닌데, 되게 교묘하고 은근하게 언어폭력을 한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사람 미치게 만드는 놈이었어요, 걔.”
나는 무릎에 얼굴을 묻은 채 웅얼웅얼 생각나는 말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채예령처럼 애들이랑 다 잘 지내는 것 같으면서 지 맘에 안 드는 애들 차별하고 괴롭히고. 뭐라고 반박하기엔 애매하게 사람 기분 나쁜 말 하면서 승질 건드리는데, 그러다 못 참고 화내면 저만 이상한 사람 되게끔 분위기 만드는 거에 진짜 많이 당했어요. 중학교 때부터.”
“…예령이랑 어렸을 때부터 친구였지 않았나.”
“맞아요. …아. 걔한텐 제가 나서지 말라고 했어요. 대신 화내주거나 웃으면서 엿 먹여 주는 게 속 시원하긴 했는데, 그냥 하지 말라고 그랬어요. 같이 엮여서 걔까지 이미지 끌어내려지는 게 싫어서. 채예령은 답답해했는데, 제가 고집부렸어요.”
‘완벽한 채예령’에 흠집을 내는 건 나도 싫었으니까. 나는 나보다 더 분해하는 채예령을 뜯어말렸다. 녀석이 쌓아 올린 것들이 결코 쉽게 얻은 것이 아님을 내가 가장 잘 알았기에, 나 때문에 흠집이 나는 것을 지켜볼 수가 없었다.
이미 나를 못마땅해하는 무리가 있었던 상태에서 감싸기까지 하니 말이 안 나올 리가 없었다.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그런 자잘한 불평들도 쌓이다 보면 채예령의 노력을 한순간에 깨트릴 수 있을 만큼 큰 위협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걸 보기가 싫었다. 채예령이 어떤 생각을 하면서 사는지 알아서 더 그랬다.
그러나 이건 우리 둘만 이해할 수 있는 사정이었으므로 말을 삼켰다. 설명하려면 복잡했고, 하더라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는 일을 굳이 늘어놓고 싶지 않았다.
“아무튼 중학교 땐 그래도 그럭저럭 견딜만했는데 고등학교 올라가선 걔랑 그 무리가 본격적으로 사람 못살게 굴어서 자퇴할까 생각할 정도였어요. 그래서 졸업할 때 진짜 다신 안 본다고 마음먹었었는데, 근데 최근에 좀…생각이 바뀌었었거든요.”
“바뀌어?”
“네. 정말 죽어도 안 보려고 했는데, 근데 그러기엔 제 마음에 남은 응어리가 너무 크다는 걸 깨달아서요. 너무 당하기만 해서 억울하고 분했던 거, 그 해결되지 않은 감정을 제가 계속 외면하고 있었더라고요. 그걸 좀 풀어내야겠다는 생각에 이번에 쟤랑 그 무리가 나오는 모임에 가려고, 거기서도 또 그러면 이번엔 저도 지지 말자고 결심했었어요. 그래서 약속도 옮겼던 거고.”
근데 하루 일찍 만나서 실컷 당하기만 했네요. 나는 자조하며 고개를 들었다. 캄캄해진 가운데 너른 잔디밭 위 점점이 보이는 전등 빛들이 동그랗고 하얗게 보였다.
“하아…. 적어도. 적어도 빈진호라는 말은 더 이상 참지 않기로 그렇게 다짐했는데, 그거에도 아무 말 못 한 게, 그게 너무 한심해요, 제가.”
“…진호야.”
“그거 ‘빈곤한 진호’의 줄임말이거든요. 저희 동네 돈 좀 있는 사람들 사는 데라서 학교에도 그런 애들이 많았어요. 박상혁네도 그랬고. 물론 형에 비하면 중산층이긴 한데, 아무튼 뭐. 저희 집도 객관적으론 잘사는 건 맞는데, 제가 좀, 검소한 편이어가지고. 그게 걔가 보기엔 좀 궁상맞아 보였던 거 같아요.”
다른 애들 쓰는 만큼 안 쓴 것은 맞았다. 아버지가 준 용돈을 사치하는 데 쓰고 싶지 않았다. 그게 또 아니꼬워 보였는지 박상혁이 어느 순간 붙인 별명 ‘빈진호’는 내가 가장 싫어하던 호칭이었다. 나만이 아니라 우리 집을 깔보는 것 같아서.
“내일 가지 말까 봐요. 오늘 보니까 한 마디 해주기는 개뿔. 제가 가면 그때보다 더 날뛸 텐데, 제가 할 수 있는 게 뭐 있을까 싶고 그러네요. 미리 알면 뭐 해요, 내가 이 모양인데. 그죠.”
가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듣고 싶은 걸까, 아니면 할 수 있을 거라는 응원을 받고 싶었던 걸까. 최태혁의 눈을 보면서 동의를 구하듯 말해놓고 정작 나도 내가 무슨 말을 듣고 싶어 그랬는지 영 모르겠다. 그럼에도 나는 더 말을 잇지 않고 최태혁의 말을 기다리며 올려다봤다.
큰 키답게 앉은키도 커서 작은 동물 등 가지고는 녀석의 얼굴을 전체 다 비추진 못했지만, 푸르른 눈만은 자체 발광이라도 하는 듯 선명하게 보였다.
“죽여줄까.”
…나는 귀를 후볐다. 저 말이 저렇게 일상 대화 톤으로 나온다고? 아닌데. 그럴 말이 아닌데. 사람을 죽인다는 말을 저렇게 과자 사줄까 말까 물어보듯 물어보면 안 되는 건데.
다른 사람이 했으면 드립이려니 생각하며 웃고 넘어갈 말도 최태혁의 입에서 나오니 말투고 뭐고 그 자체만으로 살벌했다.
“누군가는 약하다고 해서 그런 일을 당하는 건 부당하다고 얘기하는 걸 알지만, 나는 약하면 짓눌러져도 아무 말 할 수 없었던 삶을 살아왔다. 신체든 정신이든 강한 사람이 모든 권리를 쥐고 있는 것이 당연한 세계에서. 그래서 약하면 분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기 마련인 걸 매우 잘 알지.”
나의 벙찐 얼굴을 보던 최태혁은 내내 끼고 있던 팔짱을 풀었다.
“사람이 느끼는 오만가지 감정 중에서 나는 억울함과 분노가 가장 개 같더군. 그래서 강해지기로 결심했고, 실제로 강해졌지. 내가 강해지고 가장 먼저 한 것은, 당연하게도 내게 개 같은 감정을 느끼게 한 새끼들을 죽이거나 죽는 것을 바랄 정도로 고통스럽게 만드는 일이었어.”
녀석이 내게 손을 뻗었다. 왜인지 그 손을 피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으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네가 되갚아 주고 싶어 하는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한다. 내가 그랬듯, 너도 그런 거겠지. 네 말에 따르면 안타깝게도 아직 너 스스로 그걸 행할 만큼 강해지진 못한 것 같지만, 그건 이제 문제가 안 돼. 더 이상 약하다고 당하거나 참을 필요 없다. 내가 있으니.”
네가 원한다면 죽여줄 수도, 널 힘들게 했던 혀를 잘라줄 수도, 혹은 네가 속 시원해질 때까지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도록 사지를 묶어 대령해줄 수도 있으니 말만 해.
내 턱을 잡고 눈을 맞추며 또박또박 말하는 최태혁의 얼굴에는 매우 인자해 보이는 미소가 띄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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