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내가 회귀 전과 다르게 모임에 가겠다고 결정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결정적인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내가 가지 않아서 채예령이 나 대신 당해야 했던 일을 방지하기 위해, 또 하나는 그러면서 내 마음에 남아있는 응어리를 조금이라도 해소하기 위해.
회귀 전 이 모임에 대해 들었을 때는 등 떠밀려 학생회장 하더니 졸업하고 동창회까지 맡아 하는구나 하는 생각만 했을 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몇 년 만에 만나는 거든, 누가 나오든 나랑은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당연히 가지 않을 거였으니까.
고등학교 시절은 나에게 그다지 반가운 시간이 아니었다. 좋은 기억보단 그렇지 않은 기억이 많았던 시간 속의 사람들을 굳이 다시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채예령은 회귀 전에도 며칠 전과 똑같이 지나가듯 물었고, 나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단호하게 거절했었다. 몇 번 이런 일에 대해 다투었던 전적이 있었던 녀석은 나에게 그럴 줄 알았다면서 그냥 넘어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석자 명단을 알고 있었기에 설득할 생각이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그 모임은 가벼운 질문과 그것보다 더 가벼운 거절을 끝으로 내 머릿속에서 완전히 잊혀질 정도로 나의 관심 밖의 일이었다.
시간이 지나 나의 연락처를 알고 있을 만큼 ‘좋은 녀석’ 포지션이었던 동창이 나에게 그날 있었던 일을 말해주지 않았다면, 이렇게 기억하고 있지 않았을 일이었다. 그 친구도 그 말을 하려고 했다기보단 그날의 이야기를 하다가 툭 튀어나온 것 같았다.
내가 듣기에 껄끄러운 내용이라고 짐작한 것인지, 지나치게 당황한 목소리가 결국 그 일을 대충 뭉뚱그려 설명한 탓에 자세히 듣지는 못했다. 그러나 나는 그 일에 얽힌 사람들의 이름과 ‘사소한 말다툼’이 시발점이었다는 설명만 듣고서도, 대충 어떤 상황이었는지 쉽게 그릴 수 있었다.
특히 거론된 놈들 중 유독 내 기억에 박힌 한 명, 박상혁이 어떤 식으로 ‘만인에게 착하고 좋은 사람’ 상태의 채예령을 자극해 그 지경까지 몰고 갔을지는 누구보다 내가 잘 알았다. 원래 그 새끼의 표적은 언제나 나였으니까. 그 무리는 성인이 되었을지언정 정신적으로는 아직 그 시절 그대로 머물러 있는 상태인 것 같았다.
솔직히 채예령한테는 미안하지만, 회귀 후에도 나는 이 모임에 갈 생각은 전혀 없었다. 녀석한테도 그렇게 한 새끼들이 나한테는 얼마나 더 할까 싶은 생각과 함께 내가 가서 뭘 할 수 있을까, 오히려 더 심각한 상황만 초래하는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되고 겁이 났다.
그러나 최근 어떤 면으로든 성장이란 걸 해보자고 결심한 것을 계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내 마음을 썩게 하는 쓰레기들을 치워버리기 위해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인생에 있어 한 번 정도는 직면해야 하는 문제였기에 맞서보기로 한 것이다.
이왕 결심한 거 어설프게 하고 싶지 않아서 나름대로 준비도 하고 있었다. 사소한 말다툼이 일어났을 때 지지 않기 위해 그놈들이 할 법한 말들을 받아칠 날카로운 말들을 생각하고, 연습했다.
똑같은 일이 일어나더라도 마냥 당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똑같이 독한 말을 해 주기 위한 말들도 미리 준비해 두었다. 혹여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과거 내가 받았던 상처들을 조금이라도 해소하기 위한 적절한 말들 역시 고심하고 또 고심했다.
“졸업하고 한 번을 못 마주치더니, 어떻게 이런 데서 만나냐?”
그러나 나는 그 대상을 눈앞에 마주하고 깨달았다. 연습을 아무리 하면 뭐해. 막상 마주치니 머릿속이 새하얘지는데.
“…헤이헤이! 멍때리는 버릇은 여전하네. 야, 정신 차려!”
“어…어. 미안, 놀라서. 하하…오랜만이다.”
놈은 고등학교 때와 변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빙글거리는 미소, 내 어깨를 툭툭 치는 힘, 자기딴엔 쿨하다고 생각하겠지만 내가 듣기엔 한없이 가벼워 보이는 말투.
“난 너 하도 안 보이길래 이사 갔거나 독립해서 다른 데로 간 줄? 너 우리 동네 별로 안 좋아했잖아. 적응도 잘 못하고.”
잘 숨겨지지 않는 건지 아니면, 아예 숨길 마음이 없는 건지. 은근히 배어나는 나를 깔보는 눈빛까지도 변함없이 그대로였다.
“이런 델 혼자 오진 않았을 거 같고… 아! 정답! 채예령한테 또 끌려왔다!”
이 새끼는 정말 하나도 변한 게 없구나. 박상혁은 자주 이렇게 채예령과 나를 엮어서 비아냥댔다. 가벼운 농담처럼 던져진 말에 아이들은 웃었고, 놈은 그걸 영리하게 반복하여 ‘채예령 친구 김진호’ 이미지를 하나의 밈처럼 만들어버렸다. 덕분에 나는 이런 종류의 말에 함부로 화를 낼 수가 없었다. 그럼 나만 평소 하는 농담에 그날따라 예민하게 반응한 사람이 되어 버리니까.
문제는 둘만 남게 되면 농담 정도의 수준을 넘어 명백한 시비가 되어 날아온다는 점이었다. 나는 그런 말도 웃으며 넘겨야 했다. 내 기분 따위는 전체 분위기에 비하면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아는 형이랑 왔어.”
“에이, 틀렸네. 어얼~ 김진호오~ 아는 형도 있고, 이젠 채예령 졸업했나본데에~.”
처음엔 나 역시 그 농담에 웃기도 했다. 그러다 너무 반복되는 말에 점점 기분이 나빠지다가, 나중에는 말의 수위가 높아지면서 억지로 표정 관리를 해야 할 정도가 되었다.
“뭐…. 이제 어른이니까. 학생 때랑은 다르지.”
“그런가? 난 왜 상상이 안 가지. 채예령 없는 김진호라니, 어우 말로만 했는데도 벌써 존나 외로워.”
나는 자기 몸을 감싼 채 과장되게 부르르 떠는 박상혁에게 작게 웃어준 후 뒷목을 긁는 척 고개를 숙였다. 스스로의 농담에 만족하여 낄낄대는 소리가 들렸다. 맛있는 거 실컷 먹고 한껏 좋아졌던 기분에 무거운 돌이 달린 것 같다. 끝이 보이지 않는 무저갱을 향해 빠른 속도로 가라앉고 있는 느낌이었다.
“야. 야, 김진호! 야!”
“어, 어?”
“너 주문할 차례라고. 아, 새끼 진짜 멍 오지게 때리네.”
“주문 어떻게 하시겠어요?”
몸을 툭툭 치는 힘은 떠올리기 싫었던 익숙함이었다. 겨우 흘려보내 흐릿해졌던 건데 다시 선명해졌다. 나는 한심해하는 눈초리에 위축되는 것을 느끼며 직원을 보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침을 한번 꿀꺽 삼킨 나는 아까 내가 뭘 생각해뒀는지 떠올리며 더듬더듬 디저트부터 주문했다. 그리고 음료를 주문하려다가, 그러고 보니 아직 메뉴를 듣지 못했다는 생각에 정신없어서 완전히 잊고 있던 최태혁을 찾아 뒤를 돌았다. 마침 녀석도 전화를 마쳤는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평소처럼 여유롭게 걸어오는 모습에 주문을 하던 도중이었던 나는 초조해졌다. 목소리만 조금 크게 내면 들릴만한 멀지 않은 거리였기에 메뉴부터 물어보려고 막 입을 열었다. 그러나 박상혁의 타박이 한발 빨랐다.
“빨리 좀 해라. 뒤에 줄 서 있는 거 안 보여? 너 이거 민폐야, 민폐.”
그 말에 반사적으로 뒤에 서 있는 사람들을 봤다가 하필이면 눈이 마주친 사람이 인상을 찌푸리는 것을 보고 얼른 다시 몸을 바로 했다. 뒤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나에게 욕을 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누군가에게 쫓기는 사람처럼 허둥대며 아무 말이나 나오는 대로 뱉었다.
“그럼 저기, 음료는 그냥 아이스 아메리카노 다섯잔…….”
그러나 내가 주문을 마치기 전, 내 어깨에 따뜻한 것이 얹어지더니 낮고 분명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세잔, 아이스 바닐라 라떼 한잔, 핫초코 한잔.”
“…으로 주세요.”
나는 반말로 들릴 수 있는 말 뒤에 존대를 덧붙이며 고개를 돌렸다. 올려다본 곳에는 내 예상대로 최태혁이 나를 보고 있었다. 무심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자연스레 내 어깨에 손을 올려놓은 녀석을 보자마자 이상하게 숨이 트였다.
초조했던 마음이 조금은 차분해지자 주변이 달리 보였다. 다 세모눈을 하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던 것 같았는데, 다시 보니 줄 서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핸드폰을 보고 있거나 메뉴를 보느라 바빴다. 몇몇 사람들은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지만 나를 향해라기보단 그냥 긴 줄이 못마땅한 듯했다.
다행이다. 나는 주문을 확인하는 직원에게 돌아서서 고개를 끄덕이며 카드를 내밀었다. 그리고 직원이 카드를 받아드는 순간 박상혁이 머리를 들이밀며 말했다.
“망고 스무디 한 잔도요!”
갑작스러운 추가 주문에 직원이 당황스러웠는지 주문을 받지 않고 내게 괜찮냐는 듯이 눈짓을 해왔다. 놀란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여기서 실랑이를 하고 싶진 않았기에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결제를 마치고 영수증과 카드를 받아든 나는 뒷사람을 위해 자리를 비켜주었다. 최태혁은 내 어깨에 손을 올려놓은 채로 나를 따라왔고, 스무디를 기다리기 위해서인지 박상혁도 내 옆에 섰다. 놈은 나와 최태혁을 번갈아 보다가 내 쪽으로 몸을 숙이고 속닥거렸다.
“이분이 아까 말한 같이 왔다는 아는 형?”
“…응. 어…형, 여기는 그, 제 고등학교 동.”
“안녕하세요! 저는 진호랑 중학교, 고등학교 같이 다닌 친구 박상혁입니다.”
분위기상 마지못해 소개를 하려 했던 내 말을 잘라먹고 박상혁은 붙임성 있는 낯으로 살갑게 인사했다. 채예령과는 결이 달랐지만 어쨌든 놈도 사람 사귀는 것을 참 잘하는 사람이었다. 어쩐 일인지 나에게는 처음부터 매우 적대적이었지만.
나는 나에게 짓던 표정과는 전혀 다른 밝고 인위적인 얼굴을 보다가 최태혁의 반응을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녀석은 반응은커녕 박상혁 쪽을 보지도 않고 나만 쳐다보고 있었다. 침묵이 애매하게 이어졌다.
결국 먼저 입을 연 것은 나였다.
“형이 좀…낯을 가리는 편이라서.”
“아아…. 형도 MBTI I로 시작하시나? 안 그래도 진호가 형 같은 사람이랑 어떻게 친해졌지 했는데 그런 공통점이 있으셨구나. 근데 그런 거면 같은 내향적인 사람들끼리 노는 것보단 저같이 외향적인 사람도 껴서 같이 노는 게 더 재밌어요.”
얘랑 있다 보면 다 좋은데 재미는 없잖아요. 놈은 내가 보는 앞에서 최태혁을 향해 몸을 기울이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는 장난이라는 듯 입을 가리고 웃으며 팔꿈치로 내 옆구리를 찌르는 시늉을 했다. 나는 학습된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으나 정작 말의 대상인 최태혁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나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능글맞게 웃던 박상혁의 얼굴이 찰나에 찌푸려졌다가 다시 펴졌다. 또 찾아온 어색한 침묵. 박상혁은 더 이상 말을 하기엔 자존심이 상했는지 어색한 웃음소리와 함께 과묵하시구나, 하고 중얼거리더니 핸드폰을 꺼내 들었고, 최태혁은 계속해서 미동도 없이 나만 보고 있었다.
나라도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내 고민을 덜어준 것은 음료가 준비되었다는 직원의 외침이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삼키면서 캐리어에 담긴 음료와 디저트가 담긴 봉투를 받아왔다. 박상혁은 내가 지척으로 다가갈 때까지 핸드폰을 만지고 있다가 캐리어에 들어있던 망고 스무디를 꺼내 갔다.
“내가 빈진호한테 스무디도 얻어먹고, 오랜만에 만난 보람이 있네. 고맙다?”
그러더니 놈은 그렇게 말하면서 습관처럼 어깨를 치기 위함인지 내 쪽으로 손을 뻗었다.
“아, 아! 이게 무슨 짓입니까?!”
“혀, 형…!”
그러나 이번엔 내 어깨에 채 닿기도 전에 최태혁이 그 손을 잡고 꺾을 것처럼 뒤로 젖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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