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그 뒤로 우린 정말 열심히 먹었다. 대화라고는 종혁 씨와 재원 씨가 몇 마디 농담을 한 것에 이 씨와 내가 맞장구치면서 웃은 것이 다였다. 특히나 나한테 이름이 불리는 사람은 자동으로 최태혁의 눈치를 보게 되는 흐름이 생겨서 나는 괜히 먼저 말을 꺼내기가 곤란해졌다. 다행인 것은 나의 매우 튼튼한 소화기관의 힘으로 이런 상황 속에서도 체기 없이 이 많은 음식을 아주 잘 먹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다 먹은 거 같으니 슬슬 치울까요?”
종혁 씨의 말에 다 먹고 서로 눈치를 보고 있던 우리는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물론 최태혁은 제외였다. 네 명이서 남은 국물과 음식물을 한쪽으로 모으고 일회용 그릇들은 크기에 맞춰 포개는 등, 미리 짜 놓은 것처럼 손발을 척척 맞춰 금방 정리를 마쳤다.
“이건 저희가 버리겠….”
“아뇨! 같이! 같이 버리러 갑시다!”
어딜 우리 둘만 두고 가려고. 나는 나를 두고 가려는 세 명을 따라 벌떡 일어났다. 최태혁이랑 둘이 남아있기엔 아직 오글거리고 간질거리는 감각이 너무 생생했다. 세 명은 내가 재원 씨의 손에 들린 쓰레기를 빼앗아 쥐자 또 최태혁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이대로 가다간 정말 둘만 남게 될 것 같아 나는 어쩔 수 없이 아까부터 의도적으로 보지 않았던 최태혁 쪽으로 돌아서서 손을 뻗었다.
“형도 가요. 간단히 산책도 좀 하고 올 겸.”
최태혁은 무표정한 얼굴로 내 손을 보더니 다행히 별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껏 내민 손이 무시당한 셈이었지만 녀석은 내가 기분 상해할 틈도 없이 일어나자마자 뒤로 물리던 내 손을 낚아채 잡았다.
차라리 일어날 때 잡고 걸어갈 땐 편하게 가는 게 좋은데. 그 말을 했다간 다시 눌러앉을 것 같아서 얌전히 손을 내어주었다. 그대로 모두 가려고 했으나 자리를 비워 놓기엔 너무 눈에 띄게 넓게 놓은 탓에 누군가 한 명은 남아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사실 이번에도 세 명의 표정을 봐선 나와 최태혁이 남아주길 바라는 것 같았으나, 나는 최선을 다해 모르는 척했다.
결국 짧은 회의 끝에 나에게 쓰레기를 빼앗긴 재원 씨가 자리를 지키는 것으로 결정하고 종혁 씨와 이 씨, 최태혁과 나는 조금 떨어져 있는 쓰레기 버리는 곳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곧 이것도 부질없는 반항이었음을 깨달았다. 출발하자마자 경보라도 하듯이 빨리 걸어 가버리는 두 명 덕분에 나는 최태혁과 둘이서만 걷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똥강아지.”
“저는 26세 성인 남자 김진호읍…또! 또! 그건 이제 끝난 거 아니었어요?!”
최태혁은 내가 ‘호’를 발음할 때를 노려 귀신같이 입을 갖다 댔다. 밥 먹을 때 얌전하길래 끝난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한 손은 쓰레기를 들고 다른 손은 녀석에게 잡혀 있어 어깨 부근에 입술을 닦은 나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최태혁은 자리에 멈춰서서 따지는 나를 따라 멈춰 서더니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흥미롭다는 듯이 말했다.
“너는 길 한복판에서 키스하는 것보다 아까 그 말에 더 몸 둘 바를 몰라하는군.”
나는 내가 한 말과 전혀 상관없는 중얼거림에 인상을 확 찌푸렸다. 이새끼 내 말은 좆도 안 듣는구나. 또 급격히 몰려오는 피로감에 한숨을 쉬며 고개를 숙였다. 하… 집에 가고 싶다. 녀석은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 할 말만 하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뒤에다가 대고라도 한마디 해주고 싶었지만 괜히 입 열었다 또 입술이 다가올 것 같아 그냥 조용히 뒤를 따라 걸었다.
내가 말을 하지 않으니 자연스레 우리 사이엔 침묵이 찾아왔고, 그 상태로 쓰레기장에 도착해 무사히 손을 비웠다. 종혁 씨와 이 씨는 오는 길에 마주쳤을 때 먼저 가서 재원과 함께 각자 맡은 업무로 복귀하겠다는 말을 끝으로 사이좋게 뛰어가더니 보이지 않았다. 우리 사이의 침묵이 깨진 것은 자리로 돌아가는 길에 던져진 최태혁의 질문 때문이었다.
“왜지?”
바로 대답해주기에는 정말 앞뒤 맥락 하나도 없는 질문이었다. 듣자마자 약간 당황했던 나는 앞을 보며 걷는 최태혁의 옆얼굴을 보면서 속으로 볼수록 정새빈같은 놈이라고 욕을 했다. 그래도 일단 질문을 받았으니 뭐라도 답은 해야 할 것 같아 추측을 해보기로 했다.
흠…혹시 아까 했던 말의 연장선인 건가. 아무래도 왜 입을 맞추는 것보다 자기한테 집중하라는 말에 더 민망해하냐는 질문인 것 같았다. 나는 둘 다 민망해 죽겠는데 입술 들이대는 쪽은 민망할 뿐만 아니라 기가 차서 그런다고 말할까 하다 그만두었다. 왠지 그런 가벼운 대답이 듣고 싶어서 한 질문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물어본 사람치곤 세상 심드렁한 얼굴로 걷고 있는 최태혁을 한 번, 하하호호 웃고 있는 사람들을 한 번, 까만 한강과 길을 밝히는 전등들을 한 번 보고 나서 답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행동은 흘러가는데 말은 남아서 그런 거 같아요.”
나름 고심해서 고른 말인데, 하고 보니 내가 들어도 설명이 필요해 보이는 대답이 나왔다. 나는 설명을 위해 또 말을 열심히 고르다가, 간단명료하게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생각나지 않아 그냥 길게 늘어트려 말하기로 마음먹었다.
“생각해보면, 저는 어떤 특정 행동만 기억나고 그런 건 거의 없거든요?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전체적인 상황이나 그 의도는 기억에 남는데, 저한테 가해진 행동 자체는 잘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어요. 강물에 흘러가듯이 천천히 흘러가서 희미해지는 느낌이랄까.”
모든 것이 그렇다고 묻는다면야 당연히 그건 아니었지만, 거의가 그랬다.
“근데 말은 이상하게 남더라고요. 고여요, 마음 어딘가에. 아 나는 말을 되게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인가보다 할 정도로, 사소한 것까지 기억에 남을 때가 있어요. 그 말을 할 때의 억양과 목소리, 표정, 공기, 온도. 그 모든 것이 생생하게 기억나고는 해요. 좋은 말이든, 나쁜 말이든.”
사실 좋은 것보단 안 좋은 쪽의 비율이 더 높아서 장점이라고 볼 수는 없는 특성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순간순간에 저도 모르게 행동에 대해선 가볍게 받아들이게 되는 것 같아요. 반대로 말은, 듣는 순간 직접 뇌에 박히는 느낌이랄까, 그런 때가 많고요. 물론 저도 실없이 말을 주고받을 때도 많긴 한데, 그래도 보통 행동보단 말이 무겁게 느껴져요. 저한테는.”
그래서 녀석의 입맞춤이 당장은 당황스럽고 창피했지만 그뿐이었던 반면, 내 눈을 맞추고 한 말은 녀석의 눈빛과 말투, 턱에 느껴지는 손의 온기와 조용해지고 다소 무거워졌던 주변의 공기까지 머리에 새겨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거 때문에도 문제가 많긴 했는데, 그건 다른 얘기니까. 근데 이게 설명이 된 건지 모르겠네. 하하, 저 말 되게 못하죠. 하여튼 그래서 아까 그 말이 더 부끄럽게 느껴진 것 같아요. 여운도 길고. 근데 그렇다고 사람들 다 있는 데서 자꾸 뽀뽀하고 그러는 게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닙니다!”
나는 설명이 늘어질수록 횡설수설하게 된다는 것을 상기하며 얼른 마무리를 지었다. 흐름상 오해의 여지가 있는 것 같아 잊지 않고 녀석의 뽀뽀 세례가 적응된 것은 아니라는 것도 명확히 밝혔다. 솔직히 이런다고 안 할 것 같진 않았지만, 말 안 하는 것보단 나을 것 같아서 덧붙인 거였다.
내내 묵묵히 듣고 있던 최태혁은 내 마지막 말에 눈썹을 들어 올리더니 피식하고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수상한 움직임에 냉큼 고개를 뒤로 물렸으나 곧 뒷목이 잡혔다. 녀석은 기어코 내 이마에 도장을 찍듯이 입술을 꾹 누르더니 그대로 몇 초간 있다가 떨어졌다.
“아, 형!”
“왜. 행동 말고 말로 할 걸 그랬나?”
와, 그걸 이렇게 이용한다고? 남은 기껏 진지하게 대답해줬더니 바로 이용해먹는 최태혁의 얼굴에는 정말 얄미운 미소가 걸쳐져 있었다. 정말 꿀밤이 마려워지는 표정이 아닐 수 없었으나 진짜 날렸다간 내 주먹 두 배는 될 것 같은 왕주먹으로 되돌려 받을 것 같아 참았다.
나 오늘 얘 만나고 계속 참고, 참고 또 참는 거 같은데 이러다 사리 나오는 거 아니야? 아무것도 안 하기엔 영 분했던 나는 몰래 손가락 욕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녀석의 시야를 피해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미처 중지를 다 피기도 전에 타이밍 좋게 고개를 돌려서 피려던 중지와 함께 검지를 함께 폈다. 순발력 굿 잡 김진호.
“…그건 뭐지.”
“어…두, 두 개요. 그, 음...아! 그거요! 디저트로 커피 두 잔을 사갈까 물어보려고….”
내 어색한 연기에 최태혁이 뭔 소리냐는 듯이 얼굴을 확 찌푸렸지만 이거 말곤 정말 생각나는 말이 없었다. 그렇다고 ‘별 건 아니고, 엿 먹으라고 하려다가 돌아보길래 검지도 같이 펴 봤어요!’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나는 이왕 뱉은 거 정말 커피를 마시고 싶기도 했겠다, 뻔뻔하게 나가자는 생각으로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는 녀석을 무시하고 주변을 둘러봤다.
운 좋게 아까 봤던 카페 트럭이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의심을 벗기 위해 더 호들갑을 떨면서 커피 트럭을 향해 녀석을 끌었다. 최태혁은 내 노력이 가상해 보였는지 순순히 끌려와 줬다. 그렇게 얼떨결에 오게 된 카페 트럭의 줄은 다른 웬만한 푸드 트럭의 줄보다 길게 서 있었다.
“줄이 기네요. 형, 기다리는 동안 아까 그 세 분 어떤 커피 드시고 싶은지 한 번 물어봐 주시면 안 돼요?”
“그냥 사.”
진짜 싸가지 원탑이다. 어디 가서 커피 쏜다고 아메리카노 통일해서 사줄 놈. 그것도 나쁘다고 볼 수는 없지만 이왕 사는 거 바쁜 상황도 아닌데 왜 저러나 싶다.
“그러지 마시고요. 얼른요. 그리고 이건 제가 살게요. 아까 먹은 거 더치하자 그래도 안 들을 거 같으니까, 이건 제가 사게 해주세요.”
녀석은 내가 계속 노려보자 한숨을 쉬더니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딱히 할 일이 없어 전화를 하는 최태혁만 보고 있는데, 말없이 귀에 대고 있는 시간이 길어지고 그에 맞춰 녀석의 미간도 가운데로 모였다.
결국 안 받은 건지 핸드폰 화면을 한번 확인한 최태혁이 다시 전화를 걸며 뒤를 돌아섰다. 주변을 둘러보는 것을 보아 세 명을 찾는 것 같았다. 그 움직임으로 인해 녀석은 줄에서 살짝 벗어나게 되었고, 카페라서 회전율이 좋은 건지 얼마 되지 않아 앞에 줄이 쑥 빠져 앞의 자리가 휑해졌다.
나는 이제야 누군가가 받은 건지 낮은 목소리로 뭐라고 말하기 시작한 녀석의 말을 끊기 뭐해서 그냥 혼자 줄에 맞춰 앞으로 걸어갔다. 끊으면 오겠지, 뭐. 나는 앞으로 오게 되어 자세히 보이는 메뉴판에 집중하기로 했다.
커피와 어울리는 디저트들이 사진과 함께 적혀 있어 어떤 것을 사야 할까 고민하는 재미가 있어 보였다. 제법 진지하게 크로플을 종류별로 사야 할지 다른 베이커리 디저트도 섞는 대신 크로플은 두어 개만 살지 진지하게 고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렇게 된 거 먹을 사람도 충분하니 이 기회에 그냥 다 사서 먹어보자는 결론을 내리는 순간, 의외의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불렀다.
“야! 김진호! 너 김진호 맞지? 오랜만이다, 새끼야!”
내 어깨를 치는 녀석은 졸업 후 처음 보는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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