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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호 이야기-91화 (91/234)

91화

“잘못했으니까 제발 내려주세요.”

“안 돼.”

상황을 파악하자마자 내가 가장 먼저 한 것은 얼굴을 가리는 것이었다. 생선처럼 몸을 팔딱대면 녀석의 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잠깐 생각했지만 그랬다가 잘못 떨어져서 머리 깨지면 나만 손해잖아. 근데 그걸 포기하고 보니 할 수 있는 것이 이것밖에 없었다.

내 말을 들어줄 거라고는 쌀알만큼도 기대도 없었지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일단 말은 해봤는데. 역시나 최태혁은 세상 단호하게 거절했다. 내가 안긴 위치에서 우리 자리까지 멀지는 않았어도 좀 걸어야 하는 거리였던 걸 떠올리면 정말 미칠 노릇이었다. 중간에 무거워서 내려놓지 않을까 살짝 기대를 했는데 너무 가뿐하게 걸어가는 괴물 같은 놈 때문에 그것도 가능성이 없다는 결론이 났다.

“귀가 빨간데. 좋아서 흥분이라도 한 건가?”

“…창피해 미칠 것 같아서 빨개진 거거든요.”

이 또라이야. 아니 정새빈도 아닌 새끼가 왜 사고회로가 저 모양이지? 저래서 친구하는 건가? 나는 나를 추슬러 올리더니 귓가에 이상한 말을 속삭이는 최태혁의 가슴을 팔꿈치로 지긋이 밀어냈다.

그래봤자 녀석의 품에서 벗어나진 못했지만 그래도 사심을 담아 온 힘을 다해 눌러줬으니 좀 아프긴 했을 거다. 실컷 노려봐주고 싶었지만 내 손등 위에 닿은 말랑한 감촉 덕분에 더 쪽팔려서 손을 치울 수가 없어졌다.

“그만 하시라고요.”

“뭘.”

뽀뽀 새끼야! 빌어먹을 그 주둥이 그만 갖다 대라고! 나는 여전히 속으로만 열심히 소리쳤다. 말해도 안 들어 처먹을 것 같은 놈에게 승질 부렸다가 괜히 더 엿 먹고 싶지는 않았다.

내 의지는 전달을 했으니 그걸로 만족해야지. 제기랄…. 세상 둥글게 살아가기 더럽게 힘드네. 급격하게 피로해졌다. 나는 이렇게 된 거 몸이라도 편하게 가야겠다는 심정으로 몸에 힘을 빼고 녀석에게 기댔다.

그렇게 얼마간이 지났을까, 최태혁이 멈춰 섰다. 드디어 도착한 건가 보다. 나는 이제 얼른 내려달라고 말하기 위해 내내 올리고 있던 손을 내렸다. 그리고 나는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다른 말을 먼저 뱉었다.

“이, 이게 무슨…!”

내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몇 가지가 있었는데, 우선 자리가 말도 안 되게 넓어져 있었다. 나는 텐트 앞에 돗자리를 하나밖에 깔지 않았었는데 같은 크기의 돗자리가 세 개가 더 이어 붙여져 있었고, 테이블 또한 세 개가 더 붙어 있었다.

아까 분명 우리 양옆은 물론 위, 아래에까지 다른 커플들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그새 간 건지 우리 자리 근처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날 정말 놀라게 한 것은 다른 이유였다.

“이거, 이건, 이건 진짜!”

넓어진 자리엔 아까 내가 둘러보았던 트럭들의 전 메뉴들이 세팅되어 있었다. 그것도! 아직! 따끈따끈 김이 올라오는 상태로!

“이왕 왔는데, 다 먹어봐야지.”

“형! 진짜 최고예요!”

공주님 안기? 뽀뽀? 하, 백만 번 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아직도 날 안고 있는 최태혁의 목을 힘껏 끌어안아 준 다음 내려 달라고 말하며 몸을 움직였다. 녀석도 내 흥분이 심상치 않은 것을 알았는지 순순히 내려주었다.

미쳤어. 진짜 미쳤어! 신난 마음이 주체가 되지 않아 신발을 날리듯이 벗어던지고 음식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나는 젓가락을 든 채 뭐부터 먹을지 고민하다가 면부터 불기 전에 먹자는 결론을 내리고 팔을 뻗었다.

어, 근데 잠깐.

“형, 이거 우리 다 못 먹을 텐데. 덜어서 드릴 만한 그릇도 없고, 우리 저기 있는 분들 불러서 같이 먹을까요? 그럼 남기는 거 없이 다 먹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대로라면 나와 최태혁이 배 터지게 먹더라도 어마어마한 양이 남을 거다. 나는 맛있는 걸 먹는 걸 좋아하는 만큼 맛있는 음식이 남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강박적으로 다 먹어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만, 정도 이상의 음식물 쓰레기는 좀 그랬다. 흥분한 나머지 그냥 생각 없이 먹을 뻔했는데 젓가락으로 음식을 건드리기 전에 깨달아 다행이었다. 먹다가 생각났으면 같이 먹자고 하기도 그랬을 테니 말이다.

막 맞은편에 앉던 최태혁은 내 제안을 듣더니 고개를 돌렸다. 그 시선을 따라간 데엔 종혁 씨가 서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고 있던 그는 우리 쪽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인 다음 가까워져 왔다.

“애들 불러.”

최태혁은 지척으로 다가온 종혁 씨에게 그 말 한마디만 하고 나를 주시했다. 이제 됐냐고 묻는 듯한 그 눈빛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젓가락을 물었다. 음식이 더 식기 전에 얼른 왔으면 좋겠다. 문제도 해결됐겠다, 종혁 씨가 전화하는 것을 들으면서 음식 냄새를 맡는 것으로 설레는 마음을 추스르고 있는데 내 옆자리로 자리를 옮긴 최태혁이 머리를 헤집으며 말했다.

“넌 먹고.”

사실 그 말을 듣자마자 ‘기다려’가 풀린 강아지처럼 팟타이의 새우 하나를 입에 넣을 뻔했지만 가까스로 참아냈다. 그리고 두 번째 통화를 하고 있는 종혁 씨의 눈치를 슬쩍 보고 최태혁에게 속삭였다.

“다들 금방 올 텐데 기다렸다가….”

최태혁은 하, 하고 웃더니 이번엔 내 볼을 꼬집었다.

“괜찮으니까 먹어.”

“그래요, 진호 씨. 다른 애들은 연락했으니까 올 거예요. 우리 먼저 먹고 있어요.”

“어…그럼 그럴까요?”

그렇게까지 말하면 더 거절하기도 뭐하지. 나는 전화를 마친 종혁 씨까지 거드는 것을 보고 슬금슬금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내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동시에 내 젓가락이 출동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뒤로 내 양손은 각각 젓가락과 숟가락을 쥐고 쉴 틈 없이 움직여 입에 다양한 음식을 배달했다.

중간에 다른 사람들이 합류할 때도 입 안 가득 음식을 씹으면서 고개만 끄덕이며 인사해야 했을 정도로 쉴 새 없이 먹었다.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맛있는 것을 양껏 먹어서 그랬을까, 내 기분은 더 없이 최고조였다. 그래서 그런지 어느 정도 배가 차고 나선 말문이 트인 아이처럼 말이 많아졌다.

“형, 이거랑 이거랑 같이 드셔보세요. 진짜 꿀 조합이예요.”

“그래.”

“형 이번엔 저거랑 이거랑요. 이것도 의외로 엄청 잘 어울려요. 종혁씨랑…어, 그…… 흠흠, 아무튼 그렇게 드셔보시는 거 추천 드려요.”

내가 추천한 대로 먹고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신나서 말하다가 아차 싶은 일도 저질렀다. 그러나 다행히 다들 예민한 편이 아니었는지 대수롭지 않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 저는 재원이고 얘는 귀염입니다.”

“저는 이름 말고 그냥 이 씨라고 불러주십시오.”

혹시 나 때문에 기분 상해서 분위기 이상해질까 봐 눈치를 보던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속으로 몇 번 이름을 되뇌었다. 어렸을 때부터 이상하게 사람 얼굴이나 이름을 잘 못 외워서 때때로 곤욕을 치르곤 했었다. 그래서 기억해야 하는 사람이 있으면 이름을 반복해서 외우고 나만 알 수 있는 외형적 특징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내가 이런 노력 없이 둘 다 명확하게 기억을 하고 있다는 것은 둘 중에 하나였다. 자주 봤거나 잊지 못할 만큼 강렬한 기억을 남겼거나. 후자의 경우 보통은 좋지 않은 인상이긴 했지만 말이다.

아무튼 이 세 명은 최태혁이랑 엮일 때마다 종종 마주치거나 언급이 될 것 같았으므로 확실히 기억할 필요가 있어 보였다. 나는 이름 들었을 때 얼른 외워두려고 젓가락을 내려놓고 속으로 이름을 외면서 세 명을 번갈아 가면서 봤다. 그러나 그 노력은 최태혁의 저지로 금방 멈추게 되었다.

“굳이 기억할 필요 없어. 그냥 저기요로 통일해도 돼.”

녀석은 내 손에 젓가락을 쥐여주며 무심하게 말했다. 놀라서 세 명의 눈치를 보니 그들도 웃으면서 그래도 상관없긴 하다면서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도 이름은 기억을 해야….”

“기억하면.”

“네?”

최태혁이 턱을 조금 치켜든 채로 나를 내려다보면서 물었다. 서늘한 목소리에 분위기도 약간이지만 같이 얼어붙었다. 물론 당사자들은 너무 괜찮아 보였지만 그래도 일반 상식선에선 저기요 보다는 이름으로 기억하는 것이 예의기 때문에 말한 건데 이렇게 나오니 참 당황스러웠다.

“하하하, 진호 씨가 이름을 기억해주면 저희야 좋지만 꼭 외워야한다는 부담을 가지고 그럴 필요는 없어요. 팀장님께서도 무리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말씀하신 걸 거예요.”

내 되물음에 대한 답은 맞은편에서 들려왔다. 종혁 씨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면서 설명을 덧붙였고, 다른 두 명은 먹는 것에 집중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런 뜻이라기엔 최태혁의 눈빛이 너무 삐딱해 보였지만 분위기를 수습하려는 종혁 씨의 의도가 보였기에 나도 같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냐고 말하려고 했다.

최태혁이 그 말을 전면으로 부정하는 말만 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그런 쓸데없는 거 외울 시간에 내 이름이나 더 불러.”

저건 또 무슨 예의범절 똥통에 처박은 소리야. 사람 이름을 두고 쓸데없는 거라니. 말한 건 최태혁인데 이번에도 내가 눈치가 보여 세 명을 힐긋거렸다. 천하의 종혁 씨도 이 말은 수습을 못 하겠는지 다시 음식을 먹기 시작했고, 이 씨와 재원 씨는 다른 곳을 보면서 입에 있는 것을 씹고 있었다. 최태혁은 그런 내 턱을 잡고 자기를 보게 하더니 말을 이었다.

“그냥 외워지는 거면 몰라도 ‘외워야 하는’ 거면 하지 말란 말이다. 그 시간까지 나한테 집중해. 나한테 주어진 시간에 네 신경 분산되는 거 거슬리니까.”

나는 알아들었냐면서 확인하는 최태혁의 기세에 못 이겨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한 번만 더 이름 외우겠다고 했다간 누구 하나 아작이 날 것 같은 흉흉한 눈빛이었다. 인상을 찌푸리는 것도 아닌데 어쩜 저렇게 사람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걸까. 파란색 눈동자에 부리부리한 눈매라서 유독 강하게 느껴지는 걸지도 모르겠다.

최태혁은 내가 정말 알아들었는지 확인이라도 하는 사람처럼 물끄러미 보다가 턱을 놔주더니 마저 먹으라며 볼을 두드렸다. 어마어마한 소릴 하고도 안색 하나 바뀌지 않는 녀석과 달리 나는 말이 이해되면 될수록 얼굴에 몰리는 열을 어쩌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다른 사람들도 민망해서인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기에 열심히 씹는 소리만 들렸다.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이런 분위기가 아니었는데, 이게 뭐람. 정말이지 긴장을 늦출 수가 없는 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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