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호 이야기-90화 (90/234)

90화

“입맞춤 뒤에 입을 벌린다는 건, 혀를 넣어달라는 건가?”

“읍읍읍.”

뭐래 진짜 이 또라이가. 아랫입술을 툭 치며 하는 말에 나는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아니, 다물기만 한 것이 아니라 입술을 말아서 안으로 넣고 앙다물었다. 그걸 본 최태혁은 가소롭다는 듯이 웃더니 내 볼을 아프게 꼬집고는 아까 나를 들어서 앉아있던 자리에 놔주었다.

나는 창피함과 긴장과 어이없음에 쿵쾅대는 심장을 부여잡고 오로지 최태혁에게만 시선을 고정시켰다. 당장 동서남북 방향 두 걸음도 안 떨어진 곳에 있는 사람들의 눈빛이 나에게 꽂혀 있는 것 같아서 차마 고개를 돌릴 용기가 나지 않았다. 각자 노느라 시끌벅적했던 주변이 순식간에 조용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제발 기분이어라. 내가 너무 당황해서 안 들리는 거여라, 제발.

“왜, 놀이공원에선 괜찮고 한강 공원은 곤란해?”

“둘 다 곤란해요 둘 다! 아니 형들은 진짜 수치심이라는 걸 어디다 맡겨놓고 다녀요? 부끄럼이 발톱의 때만큼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못 할 짓들을 왜 매번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하냐고요! 그리고 뭐요? 알아서 찍어? 내킬 때 해? 안 내키거든요! 계속 안 내킬 거거든요?!”

나는 코웃음을 치며 비꼬는 최태혁에게 최대한 붙어 앉아 녀석에게만 들릴 정도로 열심히 소리쳤다. 그러나 소귀에 경 읽기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일까. 아무리 얘기를 해도 심드렁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기만 하는 녀석 때문에 속이 터질 것 같다. 나는 결국 한숨을 길게 내쉬며 손에 얼굴을 묻었다.

남궁후도 그렇고 얘도 그렇고, 생각해보면 다섯 명 모-두가 정신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모르겠다. 몇 번이나 말하지만 나도 스스로의 성 정체성이 부끄럽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공공장소에서 이렇게 대놓고 하면서 막 내보이고 그럴 생각은 절대 하지 않았다. 아니 그리고 따지고 보면 성 정체성 운운할 것도 없이 공공장소에서 막 어? 사람 많은데 뽀뽀하고 그러는 게 될 말이야? 어? 이게 되는 거냐고!

“그리고 알아서 찍는다는 건 도대체 무슨 소리예요!”

“아아. 그건 저기.”

오 마이 갓. 최태혁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이마를 탁 치고 말았다. 우리가 앉아있는 잔디 구역의 맞은편 수풀 속에서 내셔널 지오그래픽에나 나올 것 같은 커다랗고 긴 카메라가 삐쭉 나와 있었다. 물론 한강 공원의 특성상 수풀은 무성하지 않았기에 그 뒤에 있는 사람도 당연히 보였다. 내 안 좋은 눈썰미로도 알 수 있는 그 사람은 아까 내가 타고 온 차 운전석에 앉아있던 남자였다.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세상 수상한 사람 보는 눈으로 힐끔거리는 데도 당당히 자세를 잡고 있는 그를 보고 있자니 기가 차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렌즈를 통해 자기를 보고 있는 것을 알았는지 엄지를 치켜 올리는 남자를 보면서 진짜 미친 건가 싶어 나도 모르게 썩 꺼지라고 소리치려던 그때, 최태혁이 움직였다.

“자리 잡고 짐도 다 펼쳤으니 이제 가지.”

덕분에 소리 지르기 위해 한껏 들이마신 숨은 그대로 한숨으로 내뱉어졌다. 그래, 일단 여기서 벗어나자. 있어봤자 감당할 수 없는 일들만 일어날 것 같다.

어느새 신발을 신고 나만 물끄러미 보고 있는 녀석을 향해 먼저 길로 나가 있으라고 손짓을 하고 나도 신발을 신었다. 그러나 녀석은 준비를 마친 내가 뭐 하고 있냐고 말할 때까지 가만히 서 있다가 또 지 멋대로 굴었다.

“아 진짜 제발요, 형. 여기 공공장소라고요.”

내킬 때마다 한다더니 빈말이 아니었나 보다. 거기다 이번에는 말하느라 벌어진 입 안으로 혀가 살짝 들어와 입가를 핥고 나갔다. 나는 녀석의 씩 웃는 얼굴을 보고 그냥 내 손으로 눈을 가려버렸다. 아 머리 아파. 그러나 최태혁은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힘없이 늘어진 다른 쪽 손을 잡아 깍지를 끼더니 걸어가기 시작했다.

끌려가다 뭐라도 밟을까 봐 얼른 눈에서 손을 뗀 내 시야에 들어온 것은 우리가 앉아있던 돗자리로 향하는 남자였다. 그냥 반대 방향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 돗자리로 가고 있다고 확신한 이유는 그 남자가 여기까지 오는데 운전을 해줬던 사람이었고, 최태혁과 나를 향해 쌍 따봉을 날리며 지나갔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너네 집에 안 가냐고.

“…우리 돌아볼 동안 저 사람이 우리 자리 지키고 있는 거예요?”

“그래.”

“저 사람은 오늘 형이 지랄…이 아니라. 즐겁게 노는 것을 계속 찍어주는 거고요?”

“그렇지.”

“그럼 나머지 한 명은요. 그 사람도 여기 어딘가에 있는 거죠, 지금?”

“아. 종혁이는…저기.”

내 질문에 주변을 둘러보던 최태혁이 턱짓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걸 따라 시선을 옮기자 돗자리에 앉은 여성분과 정답게 이야기하고 있는 사람이 보였다. 이름이 종혁인 것 같은 그 사람은 여성분과 아는 사이인지 같이 핸드폰을 보면서 뭔가를 말하다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90도로 인사를 하면서 봉투를 건넸다. …봉투? 잠깐, 봉투는 왜 건네?

“네 사진을 내돌릴 생각은 없으니까.”

나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자기를 보고 있는 우리를 발견하고 뿌듯하게 엄지를 들어 올리는 종혁 씨를 보면서 해탈했다. 내 추측이 맞는다면 아는 사이라서 같은 핸드폰을 보고 있었던 게 아니라 우리 사진 찍은 걸 지우는지 확인하고 사례금을 줬다는 거 같은데 맞아? 그거야? 나 지금 뭐 트루먼 쇼 나온 건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이게 무슨 일인가 생각하고 있는데 또 익숙한 얼굴이 시야 한가득 들어왔다. 이번엔 콧등에 내려앉는 말캉한 감촉이 느껴졌다.

“형. 제가 요즘 팔이 좀 안 좋아요. 이게 막 근육경련이 일어나는지 지 혼자 움직이고 그러거든요? 그러다가 혹시 형을 한 대 칠 수도 있다고요. 근데 그거 고의 아니고 근육경련이에요. 알겠죠?”

“아아, 잘됐군. 나도 마침 근육경련이 있어서 네 엉덩이를 좀 만질 수도 있다.”

물론 팬티 안으로 넣어서. 최태혁은 뒷말을 내 귀에 속삭이더니 사악하게 웃었다. 서로 간에 잘 이해해주자면서 내 어깨를 툭툭 치는 손이 매우 위협적이다. 말 한마디를 안 져주네, 이 새끼.

분한 마음에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 녀석을 노려봤지만 역시나 코웃음을 친 녀석은 잡고 있던 손을 잡아당겼다. 앞서가는 녀석의 등을 노려보면서 발을 쿵쾅거리며 걷다 보니 어느새 광장 중앙에 서 있었다. 완전히 어둑해진 밤하늘 아래 잔뜩 늘어진 줄전등으로 반짝거리는 곳은 영상에서 봤던 해외의 야시장 분위기가 나기도 하고, 캠핑장 분위기가 나기도 했다.

북적거리는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에너지와 사방에서 맡아지는 맛있는 음식 냄새에 점점 기분이 좋아졌다. 나 너무 단순한 건가. 이대로 두면 이 자식 시도 때도 없이 나한테 주둥이 들이밀 것 같은데 지금 단호하게 나가야 하는 거 아닌가.

“이번 축제 테마는 세계 음식이라던데.”

“진짜요? 어쩐지 냄새가 심상치 않더라니. 저희 그럼 한 바퀴 천천히 돌아봐도 돼요? 우리 일단 저기 팜플렛부터 하나 가져가요!”

나는 단순한 놈이다. 특히 먹을 거 앞에선 단호해질 수가 없는 뇌 구조를 지녔다. 세계 음식이라니, 이걸 어떻게 참아. 나는 기본적으로 한식파긴 하지만 새로운 음식을 먹어보는 것도 좋아한다. 이국적인 음식에서 느낄 수 있는 맛은 독특하면서도 계속 생각나게 하는 그런 특별함이 있달까?

나는 이런저런 이유로 다양한 음식을 먹을 기회가 없었다. 어렸을 땐 예령이네 아주머니가 해줄 때나 그 레시피를 배워 내가 직접 해먹을 때 가끔 먹을 수 있었으니까. 성인이 되고 나서는 그나마도 식재료값 걱정으로 맨날 하던 것만 먹어서 이것저것 시도해볼 생각을 못 했었고.

그러니 내가 흥분을 해, 안 해. 나는 자꾸 귀에 가서 걸리는 입꼬리를 주체 못 하고 앞장서서 걸으면서 이 트럭 저 트럭을 기웃거렸다. 트럭에 써 붙여진 메뉴를 꼼꼼히 살피고, 사진이 있으면 그 사진도 보고, 사람들 사이를 슬쩍 비집고 들어가 까치발을 하고 요리하는 모습을 하나하나 주의 깊게 살폈다. 구매한 사람들이 들고 가는 것을 힐끔거리면서 실제 음식들을 체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인도요리와 태국요리, 스테이크 집, 파스타, 한식, 일식, 중식, 멕시칸까지 정말 다양한 음식들이 있었고 하나같이 다 맛있어 보였다. 솔직히 가격이 좀 비싸게 느껴졌지만 장소가 장소다 보니 어느 정도 납득은 갔다.

전체를 한 바퀴 돌고 나서 우리는 다시 광장 중앙으로 돌아왔다. 나는 최태혁한테 잡히지 않은 손을 들어 턱을 괴고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먹고 싶은 것은 산더미인데 사람은 두 명이라는 큰 문제가 있었다. 녀석이 우리 집에 있을 때 먹었던 양을 봐선 한 사람당 메뉴 3개씩 해서 총 6개를 살 수 있겠으나 겹치는 메뉴 제외하고도 약 8개 정도의 트럭이 있었으므로 다 먹어 볼 수 없다는 사실이 가슴 아팠다. 그렇다고 양껏 시켰다가 음식을 남기는 것도 좀 그랬던지라 나는 눈물을 삼키고 최적의 음식 조합을 찾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버리기 아쉬운 메뉴가 많아 점점 고민하는 시간이 길어지자 옆에서 가만히 서 있던 최태혁이 기다리다 지쳤는지 내 정수리에 손을 올리더니 잡아 돌렸다.

“똥강아지.”

“…저는 26살 인간 남자 김진호인데…읍! 아 왜 자꾸 이러냐고요!”

여긴 광장 한복판이라고 진짜 타인의 시선이라고는 개미 발가락만큼도 신경 안 쓰는 새끼야! 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그러면 시선이 더 몰릴까 봐 주먹만 꽉 쥐었다. 최태혁은 나를 이상한 호칭으로 부르는 것에 반항한 것이 못마땅했는지 대뜸 입술을 들이대며 말을 끊었다.

아까 세 명이 하는 꼴을 보고 화낼 생각 자체가 안 들 정도로 해탈한 줄 알았는데 다시금 분노가 차오르는 것을 보니 그건 아니었나 보다. 최태혁은 옹골차게 쥐고 있는 내 주먹을 힐끗 보더니 한쪽 입꼬리만 씩 올려 웃었다. 그러고는 내 주먹 위로 자신의 손을 감싸 잡더니 나를 끌어당기며 말했다.

“그 정도면 실컷 고민한 거 같은데 이만 가지.”

“예? 어딜요? 왜요? 저희 아직 아무것도 안 샀는데요?!”

녀석이 향하는 방향이 트럭들이 서 있는 곳이 아니라 우리가 왔던 길, 그러니까 돗자리 등이 있는 잔디밭이라는 것을 깨닫고 놀라서 날 끌고 가는 단단한 팔을 찰싹찰싹 때렸다.

끌려가지 않으려고 무게중심을 뒤로 옮기고 다리에 힘을 주기까지 했는데도 녀석의 힘이 얼마나 센지 바닥에 신발이 긁히는 소리를 내며 몸이 내 의지와는 다르게 움직였다. 그래도 온 힘을 다해 반항하는 나를 끌고 가는 것은 아무리 최태혁이라도 힘이 들긴 했는지 얼마 가다가 한숨을 쉬면서 자리에 멈춰 섰다.

나는 눈썹을 들어올리며 뒤돌아서는 녀석에게 이긴 줄 알고 좋아서 점프를 하기 위해 무릎을 굽혔다. 그러나 그 자세 그대로 몸이 번쩍 들리는 느낌이 드는 순간, 버티지 말고 그냥 걸어갈 걸 땅을 치고 후회했다. 내 인생 통틀어 두 번째로 당해보는 공주님 안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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