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오랜만이에요 형. 잘 지내셨어요?”
“바빴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얘가 과묵한 거랑은 별개로 싸가지가 없다는 사실은 동거하면서 충분히 겪었기 때문에 놀랍지도 않다. 나는 녀석의 손짓을 따라 옆으로 가서 서면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저희 푸드트럭 축제 간다면서요? 오면서 들었어요.”
“그래.”
대답을 해준 게 어디야. 집에 있을 땐 옆에서 백 마디는 떠들어야 한마디 해줬는데, 이 정도면 아주 감지덕지지. 어째 아까 어색해 죽을 것만 같던 차 안에서보다 대화를 이어가기 더 힘들었지만 얘가 원래 이런 녀석이라는 것을 알아서 그런지 딱히 불편하고 그러지는 않았다. 불편하다기보단 그냥 욕 한번 시원하게 해주고 싶은 그런 느낌이랄까.
“애들이 불편하게 하진 않았고?”
“아뇨, 전혀요. 엄청 친절하시던데요. 어 그러고 보니 다들 어디 가셨지? 집에 가신 건가?”
“넘어진다. 앞에 보고 걸어.”
왜인지 흐름상 같이 가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뒤를 돌아보니 아무도 없었다. 하긴 생각해보면 여기까지 데려다준 건 그렇다 치더라도 같이 돌아다니는 건 진짜 이상했다. 나는 내 머리를 잡고 돌리는 최태혁의 손에 저항 없이 따랐다. 인사는 하고 가지. 잠깐이긴 했으나 차 안에서 묘한 공감대를 형성하기도 했던 사람들이었는데 휙 가버렸다니까 조금 아쉬웠다.
“하, 맡겨달라더니. 빈말은 아니었군.”
“네?”
“아니다.”
못 본 새 혼잣말하는 버릇이 생긴 건가 이 녀석. 나는 혼자 중얼거리는 최태혁을 보기 위해 옆으로 돌린 고개를 뒤로 물렸다. 더럽게 키가 큰 덕분에 같이 서 있을 때 얘 얼굴을 보려면 이렇게 해야 했다. 나에 대한 말을 한 것 같아 되물었건만, 녀석은 말해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래서 나도 그냥 내가 묻고 싶은 거나 물어보기로 했다.
“근데 형, 푸드트럭 축제하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 형 이런 거 좋아해요?”
나는 말을 하면서 주변을 둘러봤다. 잘 닦아 놓은 길 주변으로 나무들과 자전거 길이 잘 조성되어 있었고, 가족 단위로 놀러 온 사람들과 커플로 온 사람들, 운동하러 온 사람들까지 매우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지만, 셔츠를 입고 포마드 스타일을 한 190이 넘는 남자가 서 있기엔 조금 이질적인 풍경이었다..
무엇보다 녀석은 지금 정말 안 어울리는 것을 달고 걷는 중이었다. 나는 이쪽을 힐끔대는 몇몇 사람들을 힐긋 보고 다시 녀석을 향해 상체를 돌렸다.
“그리고 형.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저거는 뭐예요?”
최태혁의 한쪽 손엔 이것저것 담겨 있는 천으로 된 캠핑웨건의 손잡이가 들려 있었다. 안에 들어가 있는 소품 중엔 동물 모양 전등 같은 아기자기한 것들도 있어서, 그걸 끌고 가는 녀석과는 정말 상극처럼 보였다. 나머지 손은 주머니에 넣은 채로 천천히 걷던 녀석은 내를 잠깐 내려보더니 다시 앞을 보고 걸으면서 대답했다.
“돗자리랑 텐트 같은 거라더군. 테이블도 있다니까 도움이 되겠지.”
그러니까, 저것들이 커플들은 꼭 한다던 한강 공원 피크닉에 쓰이는 것들이라는 소리지? 아무리 생각해도 저렇게 큰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텐트가 들어있을 크기로는 보이지 않는 캠핑웨건을 보면서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았다. 공원 잔디밭에 돗자리 깔고 앉아서 동물 모양 등을 켜고 있는 최태혁이라. 진짜 미친 듯이 안 어울렸다.
“푸흐…흠흠. 한강 피크닉 할 생각은 갑자기 왜 한 거예요? 축제도 그렇고.”
“저녁에 만난다니까 여길 추천하더군. 들어보니 네가 좋아할 것 같아서 정했다.”
“네? 제가 좋아할 것 같아서요?”
“그래.”
흠. 굳이 좋다 싫다를 따진다면 좋은 쪽이긴 했으나 한 번도 피크닉이나 축제에 가볼 생각을 하지 않았던 나로서는 뜬금없는 추측이었다. 얘도 아까 옆자리에 앉은 사람처럼 내가 한동안 사람 많은 데 못 가서 답답해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건가. 그렇다면 잘못 알고 있는 거다. 그 사람한테 대답했던 것처럼 나는 그런 걸로 답답함을 느끼거나 하는 사람이 전혀 아니었다. 거기다 나는 얼마 전에 사람 많은 곳의 대표격인 놀이공원에도 다녀온 참이었다.
“여긴 저녁에도 밝고 탁 트인 곳이니까.”
“예? 뭐라고요?”
“거기다 너, 음식 이것저것 먹는 거 좋아하잖아. 푸드트럭 축제니 아마 모르긴 몰라도 꽤나 많은 종류의 음식들이 있을 거다.”
무심한 말투로 툭툭 내뱉는 말에 앞을 보며 걷던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녀석을 쳐다봤다. 약간 중얼거리듯이 한 앞의 말은 잘 들리지 않았지만 뒤의 말은 명확히 들렸다. 그리고 차마 반박할 수 없는 이유였다. 근데 내가 이것저것 먹는 걸 좋아한다는 얘기도 한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어떻게 알았지?
“내가 있었단 것을 고려해도 네 밥상에는 혼자 사는 사람치고 반찬이 많아.”
“아….”
“그리고 매번 그렇게 신난 얼굴로 요리하고 먹는데 모를 리가. 특히 좋아하는 요리 할 땐 콧노래를 부르면서 엉덩이까지 씰룩대지 않나.”
“엉덩…그걸 언제….”
거참, 내가 뭘 할 땐 혼자 운동하거나 딴 거 하느라 바쁜 줄 알았더니 그새 그걸 다 봤나 보다. 나는 새삼 부끄러워서 귀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얼른 고개를 바로 했다. 나를 내려다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고집스레 앞을 보면서 걸었다. 엉덩이 씰룩대는 걸 굳이 말하는 저 심보는 뭐야, 진짜. 생각할수록 나를 놀리기 위해 한 말이라는 것이 느껴져서 발걸음이 거칠어지고 있는데 저만치 밝은 조명들로 환한 광장이 보였다. 거기에는 여러 대의 큰 차들과 손에 음식을 들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다양한 생김새의 푸드트럭들이 반짝거리는 줄 전등 밑에 잔뜩 모여 있는 모습이 뭐랄까, 진짜 축제에 온 것 같아서 마음이 들떴다.
“와, 벌써부터 맛있는 냄새 나요!”
“이걸 저기에 가져갈 순 없을 것 같으니 자리부터 잡자.”
“네!”
광장에 가까워질수록 사람들이 많아져서 자리가 있을까 하는 우려와는 달리 운이 좋게도 딱 괜찮은 자리가 생겼다. 가려던 참이었다면서 일어나는 커플 덕분이었다.
우리가 근처로 가자마자 못 들을 수가 없을 정도의 큰 소리로 이제 가야겠다고 외치면서 일어나는 모습이 약간 이상해 보이긴 했지만, 자리에는 죄가 없으니까. 나는 직각으로 인사하고 사라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멀뚱히 서 있는 최태혁을 한쪽으로 밀어놓고 얼른 텐트부터 폈다. 텐트 안과 밖에 돗자리를 하나씩 깔고 그 위에 탁자와 전등들을 올려놓으니 제법 그럴듯해 보였다. 나는 뿌듯한 마음에 어깨가 절로 펴지는 것을 느끼면서 최태혁을 향해 돌아섰다.
“있는 거 펼치기만 했는데도 진짜 괜찮아 보이네요. 다 했으니까 얼른 들어가서 앉아봐요, 형.”
내가 할 동안 뒤에서 팔짱 끼고 지켜보던 녀석은 내가 팔을 잡아당기자 그제야 움직였다. 신발 벗고 올라가 보라는 나의 재촉에 구두를 벗고 탁자 옆으로 가서 선 녀석은 손짓으로 나를 불렀다.
“와. 사진 찍게.”
“예? 사진이요?”
당연히 나도 앉아 볼 생각이었기에 냉큼 신발을 벗고 있다가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갑자기 웬 사진이래. 최태혁이 셀카를 찍을 것 같지는 않았으므로 캠핑웨건에 삼각대도 있었나 확인했지만 거기엔 돗자리 덮개만 있을 뿐이었다. 나보고 찍으라는 건가. 아니 근데 뭔 사진이야, 안 어울리게.
“그…형도 SNS 같은 거 하세요? 의외로 이런 거 찍어서 올리는 취미가 있었다던가….”
“그런 거 없다.”
“그럼 갑자기 사진은 왜……?”
물론 사진을 어디 올리는 용도로만 찍는 것은 아니었으나 어딘가 이상했다. 나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찝찝한 느낌에 최태혁이 가리킨 자리에 앉으면서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사진 찍자면서 핸드폰을 꺼내 들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는 녀석을 보면서 내 걸 꺼내야 하나, 생각을 하다가 얼마 전에 지금과 비슷한 일이 있었던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순간 최태혁이 말하기 시작했다.
“얼마 전에 집에 택배가 하나 도착했는데, 보니까 사진이더군.”
갑자기 뭔 택배 이야기인가 싶었던 나는 사진이라는 말에 설마, 하는 마음으로 얼어붙었다.
“대충 뜯어보니 교복을 입은 애 두 명이 찍혀 있길래 어떤 모자란 놈이 주소를 잘못 쓴 건 줄 알고 그냥 버리려고 했어.”
설마 하던 마음은 ‘교복’과 ‘두 명’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역시로 바뀌었다. 그날 교복 입은 둘이 찍은 것은 딱 한 장밖에 없었다.
“근데 이게 웬걸. 포장을 다 뜯어놓고 보니 버리기엔 그 사진 속 인물들을 내가 너무 잘 알고 있지 뭐야.”
최태혁의 목소리는 화를 참는 사람처럼 매우 낮아져 있었다.
“나는 둘이 주둥이를 비비는 장면을 사진으로까지 남길 정도로 정다운 사이가 된 줄은 몰랐는데.”
“…그, 그건 원래 그렇게 찍으려던 것이 아니고….”
“조용히.”
조금이라도 오해를 풀기 위해 용기 내서 뱉은 말은 단호한 저지에 막혔다. 볼에 꽂히는 시선이 너무 뜨거워 식은땀이 흘렀다. 남궁 후 진짜 미친놈인가. 그걸 왜 쟤한테 보내냐고.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 사실을 아주 엿 같은 경로로 알게 되어서 화는 나지만 어쩌겠어. 그지? 다른 날 다른 새끼랑 있었던 일로 추궁하는 건 내 꼴만 우스워지는 것 같아서 참기로 했다.”
다행히 녀석의 목소리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고 나를 보던 시선도 옮겨졌다. 나는 그제야 한숨을 돌리며 어깨를 늘어트렸다. 그러나 갑자기 훅 들리는 몸과 전환되는 시야에 다시 온몸을 굳혀야 했다.
“그렇다고 가만있기엔 그것도 영 내 스타일이 아니라서 말이야.”
“…예?”
눈 깜짝할 새에 나는 양반다리를 하고 있는 최태혁의 다리 위에 비스듬히 앉아 안긴 자세가 되어 있었다.
“사진은 알아서 찍을 거야.”
“네? 알, 아서요? 예?”
“그러니까 오늘 우리는 내킬 때마다 입만 맞추면 돼.”
그러면서 최태혁은 당황으로 머리가 굴러가지 않아 얼어있는 내게 입을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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