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지잉-
다 왔나? 나는 진동하는 핸드폰 액정에 최태혁의 이름이 뜨는 것을 보며 문을 열었다. 차로 데리러 온다기에 미리 나가서 기다리려고 좀 일찍 나서는 참이었는데 녀석도 일찍 온 건가. 약간 다급해진 마음으로 문을 잠그면서 동시에 신발에 발을 욱여넣는데, 막상 확인한 내용은 예상과 달랐다.
[일이 늦어져서 애들 보냈으니 타고 와.]
애들이라고? 들? 여러 명을 보냈다는 건가? 어쨌든 당장 도착했다는 말은 아니었으므로 나는 서두르던 것을 멈추고 그냥 만날 장소만 알려주면 알아서 가겠다고 문자를 입력했다. 이미 출발시킨 것 같아 거절하기 미안하긴 했지만, 그래도 모르는 사람들이랑 같은 차에 타고 가느니 혼자 가는 것이 백번 나았다. 그러나 나는 마침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전송 버튼을 누를 수가 없었다.
“안녕하세요, 진호 씨. 오랜만입니다.”
“진호 씨!”
“오랜만이에요!”
진짜 여러 명을 보냈네. 나는 운전석에서 손을 인사하는 사람과 조수석 창문으로 몸을 거의 다 뺀 상태로 양손을 흔들고 있는 사람, 그리고 뒷좌석 문을 열어주며 인사하는 사람을 번갈아 보면서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전에 최태혁이 집으로 돌아가던 날 밥솥을 거덜 냈던 사람들이었다. 말끔한 정장 차림이었던 그날과는 다르게 모두 캐주얼한 복장이었지만, 분명 그들이었다.
아예 초면은 아니지만 결코 친하지 않은 관계의 사람 3명이랑 같은 차에 타서 어디론가 갈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어색해서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다. 그래도 좁은 골목에 큰 차를 계속 세워둘 수는 없으므로, 열려 있는 문으로 쭈뼛쭈뼛 걸어가 조심스레 올라탔다. 내가 타자마자 차 문은 닫히고 나에게 문을 열어주었던 사람이 재빠르게 차를 돌아 옆에 타더니 산뜻한 미소와 함께 질문을 던졌다.
“잘 지내셨습니까?”
“네? 네, 네. 잘 지냈어요. 하하.”
“세워둔 애들 말로는 밖에 잘 안 나가신다던데, 무슨 일 있으신 건 아니시고요?”
“어, 네. 딱, 딱히.”
“밖에 애들이 불편하게 굴지는 않고요? 성실한 놈들로만 골라서 보내긴 했는데, 오히려 그래서 진호 씨 어디 다니는 데 지나치게 눈치 주고 그러는 거 아닌가 걱정했었거든요.”
“아하하, 그, 음. 그것도 딱히.”
세 명이 약속이라도 한 듯 한마디씩 질문을 해서 일단 대답은 하는데 까끌거리는 니트를 입은 것 같은 불편감은 가시지를 않았다.
묻는 질문들엔 정말 길게 대답할만한 건덕지가 없었고, 싸가지 없어 보일까 봐 먼저 말을 하자니 무슨 주제를 꺼내야 할지도 모르겠고, 그때 통성명을 한 거 같은데 이름이 기억나지 않아 누구 한 명 집어서 말을 걸 수도 없었다.
다섯 놈들과 처음 만났을 때는 살아야겠다는 일념 하나로 어떻게든 아무 말이라도 내뱉었고, 그 후엔 그게 나름 익숙해져서 지금까지도 이말 저말하곤 했지만, 원래 나는 이런 성격이었다. 보통 구석에 앉아 아무 말 하지 않고 분위기 맞춰 웃기만 하면서 존재감을 지우려고 노력하는 편에 가까웠다.
문제는 지금은 그렇게 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점이다. 셋 다 날 데리러 일부러 온 사람들이었으므로 알게 모르게 나에게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어색하고 부담스러워 미쳐버릴 것 같아. 아, 스트레스받아.
“형, 님이 아니라 팀장님께서요. 오늘 직접 데리러 오고 싶어 하셨는데 요즘 일이 너무 몰아치는 바람에 결국 못 오셔서 많이 아쉬워하셨어요.”
“어…하하, 그래요? 어차피 만나는데 뭘 아쉬워하기까지. 요즘 일이 좀 바쁜 시기인가 봐요.”
“저희 일은 바쁜 시기 이런 건 없어요. 그냥 바빠지면 바쁜 거고 아닐 땐 또 할만해요.”
“그렇구나. 그, 일이라는 게 바쁠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고 그런 거 같아요. 요즘 바쁘신데 또 여기까지 저 데리러도 와주시고, 감사해요. 저기, 그, 밥. 밥은 드셨어요? 아, 아닌가. 지금 아직 저녁 시간 안 됐구나.”
나는 내가 말하는 것을 기다리는 것 같은 분위기에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가 또 주체 못 하고 혼자 자문자답을 하기 시작했다. 이래서 어색한 자리에서 최대한 말을 안 하는 건데. 스스로도 횡설수설하고 있는 것을 아는데도, 오히려 그래서 더 아무 말 대잔치를 하게 되는 악순환을 반복하는 나쁜 버릇은 여지없이 발동되었다. 어쩌다 보니 오늘 점심 메뉴까지 주절주절 떠들던 나는 주변 분위기가 점차 조용해지는 것을 느끼고, 결국 말끝을 흐리며 입을 다물었다.
“저는 참고로 점심에 국밥 먹었습니다. 앞에 앉은 두 명이랑 같이요.”
“네? 아, 네. 맛, 있으셨겠어요.”
“개인적으로 국밥은 실패할 가능성이 가장 낮은 음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아 그건 그렇고, 어디 가시는 건지는 혹시 들으셨나요?”
다행히 오래갈 줄 알았던 머쓱한 침묵은 옆에 앉은 사람이 능숙하게 주제를 바꾼 덕분에 빨리 끝났다. 나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그러고 보니 정작 중요한 걸 듣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요. 그냥 5시까지 데리러 갈 테니 준비하고 있으라고만 들었어요.”
“저희 팀장님께서 좀 그런 구석이 있으십니다. 불필요한 말도 안 하고, 가끔 필요한 말도 안 하는, 그런 좀 과묵한 면이. 그래도 나쁜 의도로 그러신 건 아니고, 그냥 정말 말이 더럽게 없으신 분이라고 생각하고 이해해 주세요.”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거 아니구나. 나는 왠지 이를 악물고 말하는 것 같은 옆 사람과 모른 척할 수 없을 만큼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앞의 두 사람을 보면서 동병상련의 눈빛을 보냈다. 숨 막힐 듯이 어색했던 공기가 공감대 형성으로 인해 조금은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알죠. 너무 잘 알죠. 고생이 많아요, 우리가.”
“예…. 아니, 고생은 아니죠. 하하, 저는 팀장님 밑에서 일하는 거 행복합니다.”
“저도요.”
“최고의 상사시죠.”
내가 이르기라도 할 것 같은가. 다들 끄덕이다가 화들짝 놀라며 갑자기 이상한 어필을 하기 시작했다.
하긴 나야 일상생활만 보냈다지만 이 사람들은 형 밑에서 일을 하는 거니까. 평소엔 사람 답답해 죽도록 말이 없으면서 잔소리할 때나 지 화날 때만 우다다다 쏟아내는 상사, 너무 최악인데. 거기다 눈빛은 또 얼마나 살벌해. 그 덩치에 무표정한 얼굴로 뚫어져라 보면 아무 잘못한 것이 없어도 덜덜 떨리던데. 그래도 이렇게 필사적으로 변명하면 놀리고 싶어지는데, 친한 사이도 아닌데 그랬다간 또 분위기 싸해지겠지?
나는 조금 편해졌다고 슬쩍 올라오는 장난기를 입을 앙다물고 참아냈다. 그리고 어색하게 하하하 거리는 것을 멈춰주기 위해 다시 원래 주제로 돌아갈 수 있는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저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
“아, 네! 그죠, 그 얘기 중이었죠? 하하, 지금 저희 한강 공원 가는 중입니다. 이번 주 내내 거기서 푸드트럭 축제를 하거든요. 요즘 조심하신다고 답답하셨을까 봐 이왕 나가는 거 좀 왁자지껄 즐길 수 있는 곳으로 준비해봤습니다.”
“오 그럼 그…장소 선정을 해주신 건가요?”
“예? 아뇨? 제가 한 게 아니라 팀장님께서 하셨어요. 하하, 말이 잘못 나갔네요. 준비해 본 게 아니라 준비를 하셨습니다. 네. 팀장님께서요.”
진짜 애쓴다. 나는 사람 하나 살리는 셈 치고 식은땀까지 흘리면서 호탕하게 웃는 조수석의 사람에게 마주 웃어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웃는 걸 멈춘 사람은 스스로의 모습에 현타가 왔는지 창밖을 아련하게 쳐다보기 시작했다.
무슨 일을 하는지는 몰라도 최태혁과 같은 회사 소속이면 나름 탄탄한 대기업에 취직할 만큼 능력 있는 사람들일 텐데 현타 올 만하지, 그럼. 그나저나 최태혁 안 되겠네. 나랑 놀러 가는 날 일정을 왜 애꿎은 부하직원한테 알아보게 해.
“세 분은 형이랑 같은 직장에서 일하시는 거죠? 비서이신 거예요? 아 이런 거 물어보면 좀 실례인가요?”
“아닙니다. 굳이 따지자면 전 과장이고 저 둘은 대리인데요, 팀장님 팀에 소속되어 있는 팀원입니다.”
“아, 비서는 아니시구나. 대신 데리러 오셨다길래 비서이신가 했어요. 죄송해요, 제가 아직 회사에서 일해 본 적이 없어서 잘 몰라서요.”
“어…근데 이제 수행비서와 같은 일도 하는 그런….”
원래 팀 소속 과장이랑 대리가 수행비서 역할을 하기도 하나? 그거 직권 남용 아니야?
“아니 그게 그러니까, 그, 저희 팀이 좀 특수한 팀이라서요. 팀장님께서 내년에 본부장님 되시면 비서팀을 꾸리신다고는 하는데 아직은 귀찮다고 그러셔서. 지금은 저희가 그 역할까지 그냥 같이 하고 있는, 그런 거랄까요.”
“아….”
“평소엔 평범하게 행정업무를 주로 하지만 직무 특성상 워낙 외근이나 출장이 많고, 그게 팀 단위로 이뤄지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좀 그렇게 하고 있달까…. 하다 보니까 이제 팀장님 업무가 바쁘실 땐 개인 스케줄 쪽도 좀 대리로 해드리고 있는, 그런 상황인 거죠.”
뭐지 싶은 마음이 표정에 그대로 드러났는지 세 명은 변명처럼 말을 덧붙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최태혁이 무슨 일을 하는지 대강이지만 알고 있는 나로서는 참 허술하게 들리는 설명이었다.
애초에 어떤 회사원이 칼에 찔린 채로 길에 쓰러져 있겠으며, 그걸 구해준 걸로 위협을 받을까 봐 경호원까지 붙이겠냐고. 거기다 어떤 부하직원이 아무리 상사라지만 업무상 스케줄도 아니고 개인적으로 만나는 사람을 대신 데리러 와.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또 짓궂은 마음이 올라와 놀리고 싶기도 하고, 이참에 최태혁에 대한 정보를 더 모아볼까 했지만 참았다. 겨우 분위기가 좀 풀렸는데 괜히 나섰다가 또 아까처럼 숨 막히게 어색해지는 건 싫었다.
“고생하시네요. 그나저나 푸드트럭 축제라고 하니까 좀 기대되네요. 저 그런 데 한 번도 안 가 봤거든요.”
“가 본 사람들 평이 꽤 좋더라고요. 마음에 들어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마침 거의 다 도착했어요. 아, 저기 팀장님 계시네요. 여기서 내리시겠습니까?”
조수석에 앉은 남자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기니 정말 주차장 한복판에 우뚝 서 있는 최태혁이 보였다. 녀석도 차를 발견한 건지 이쪽을 보고 있었다. 나는 먼저 홀랑 내려도 되나 싶었으나 묻자마자 속도를 늦추더니 정차해버리는 차에 그냥 그러겠다고 답했다. 그리고 차 문을 열어준다면서 내리는 옆자리 사람을 만류하며 직접 차 문을 열고 내리는데, 어느새 온 건지 몇 걸음 떨어지지 않는 곳에 선 최태혁이 인사를 건넸다.
“늦어. 중간에 사고라도 났었나?”
오랜만에 만난 것 치곤 매우 싸가지가 없는 인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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