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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호 이야기-87화 (87/234)

87화

“하여간 가만 보면 제일 재수 없어, 최태혁.”

그래도 만나는 날을 변경한다는 목적은 달성했으니까.

다시 전화를 걸어 따질 용기가 없었던 나는 터덜터덜 집에 들어와 반찬통을 정리하고 거실에 앉았다. 밥을 먹을까 했지만 그렇게 배가 고프지 않아 우선 며칠 동안 생각만 했던 것을 정리해볼 생각이었다. 나는 남궁호에게 받아 놓고 한 번도 펼쳐보지 않았던 다이어리와 생각 메모용 공책을 탁자에 나란히 펼쳤다.

공책 페이지들은 워낙 중구난방으로 적고 찍찍 그어 지우고 했던지라 매우 지저분해 보였다. 여기서 결정된 것들만 다이어리에 깨끗하게 옮겨 적어볼 요량이었다. 우선 나는 2월 달력 위에 ‘회귀’라고 적었다. 그리고 달력 옆에 줄이 쳐져 있는 곳에 차례대로,

[-채예령 손절 X

-아주머니의 부름을 거절하는 것 X

-이사 X

=> 그럼 살 방법? 똑같은 일이 일어나도 살 수 있는 길 강구

=> 그 상황에서 살 수 있는 길은 다섯 명 => 다섯 명이랑 친해지기 => 친해짐]

까지 적고 그 밑에 ‘그 이상으로 가까워지는 것에 대한 대책은 일단 보류’라고 적어 놓았다. 그리고 달력 몇 장을 넘겨 오늘 날짜에 동그라미를 쳤다. 녀석들과 친해지는 것에 집중하여 사는 동안 회귀일로부터 어영부영 5개월이 넘게 지나있었다.

“나 걔네한테 치댄 거 말곤 정말 아무것도 한 게 없구나.”

새삼 자괴감이 들었다. 학원 다니던 것도 그만둔 지 오래고, 나름 과외를 받고 있다고 할 순 있었으나 여러 가지 상황을 보면 좀 애매했다. 과외마저도 몇 번 안 하기도 했고.

직장을 구했다고는 했으나 이대로 민선우랑 이상하게 엮이면 그것도 위태로운 것은 마찬가지다. 당분간 생계 활동을 하지 않고 최태혁이 내건 조건들을 수용하는 대가로 월급 비슷하게 받고 있는 것 또한 언제 끝이 날지 모르는 상황.

거기다 사실 다섯 놈들을 만날 때 외엔 최대한 집에 있고, 집 앞 경호원의 시야를 벗어나는 곳으로 갈 때는 경호원 한 명을 꼭 대동한다는 것 등 대부분의 조건이 나의 안전을 위한 것임을 생각해보면, 이 정도 돈을 받고 있어도 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 들기도 했다.

…그냥 다음에 할까. 여기까지만 하고 내일 다시…….

“안 돼. 정신 차려 김진호. 이러다 내일이 모레 되고 글피 되고, 그러다 또 못해.”

나는 우울해서 때려치우고 싶어지는 것을 참으며 얼마 전 놀이공원 간 날짜에 별표를 쳤다. 옆에 조그맣게 ‘아저씨 사고 막은 날’이라고 쓰고, 그 밑에 ‘상처에 연고 바른 날’이라고 쓰고 나니 조금은 힘이 나는 것 같았다. 그래, 이미 지난 거 뭘 어쩌겠어. 적어도 난 세 개는 바꿔냈잖아.

나는 펜 꽁지를 깨물며 눈을 굴렸다. 계획은 채예령처럼. 채예령이라면 어떻게 계획을 세웠을까. 나는 일주일 전부터 그 주에 할 일들을 엑셀에 분 단위로 계획을 세워 놓는 녀석에게 빙의한 마음으로 펜을 움직였다.

[1. 살아남기

-관계 유지, 격투기 하나 이상 배우기

2. 취직 스펙 만들기

-공식 영어점수, 사회복지사 1급 자격증, 운전면허 1종 보통

3. 상처 연고 바르기]

나는 마지막 3번의 밑에 작대기를 하나 긋고 구체적인 것들을 쓰려다가 멈췄다. 머릿속에 생각나는 몇 가지 사건들이 있었지만, 그것들을 굳이 글로 써서 마주 하고 싶지는 않았다. 앞머리를 쥐어 잡고 고민을 하던 나는 그 일들에 대한 내 마음가짐만 쓰기로 하고 다시 펜을 들었다. 사실 3번을 자극하는 것들은 회귀 전 사건들이 아니더라도 얼마 전 놀이공원 일처럼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니까.

[3. 상처 연고 바르기

-할 말은 하고 살기, 도망치지 않기, 후회 남기지 않기]

여기까지 쓰고 나는 다시 달력이 있는 페이지로 돌아가 각 월 옆에 해야 할 것들을 적었다. 7월에 운전면허를, 8월에 토익, 사회복지사 1급은 시험 일정상 내년 1월 옆에 적었다. 그리고 그다음 달력은 없어서 1월 마지막 칸에 ‘항상 주의 요망’이라고 쓴 후 오른쪽으로 향하는 긴 화살표를 그렸다. 사이사이에 아무것도 적힌 것이 없는 달력 옆에는 각각 운전면허 공부 및 실기 준비, 토익 공부, 1급 시험공부 등을 채워 넣었다. 이때도 3번에 해당하는 사건들을 적어 넣을까 고민하다가 그건 그냥 모퉁이를 접는 것으로 표시를 대체했다.

“흠, 그래도 좀 허전하네. 채예령 대학교 때 다이어리는 엄청 뭔가 빽빽하게 적혀있었는데.”

쓸 건 다 쓴 거 같은데도 여전히 빈공간이 많은 페이지들에 더 적을 만한 것들을 찾기 위해 지저분한 공책들을 살폈다. 그러다 수입과 지출을 계산하던 것들을 발견하고 얼른 각 달에 예상되는 수입과 지출들을 추가로 기입했다. 민선우네 일했을 때 받은 돈이 워낙 컸고, 최태혁이 다달이 주는 금액도 만만치 않았으므로 당분간은 돈 걱정을 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꽤 많이 남는 금액은 단기 적금이라도 넣어서 묶어놓고, 혹시 민선우네 취직이 무산되었을 때 다음 직장을 구할 때까지 버티는 용으로 써야겠다. 나는 마지막으로 이번 주 토요일 날짜 밑에 밑줄을 긋고 ‘모임’이라고 쓰고 다시 한번 다이어리들을 한번 쭉 넘겨봤다.

솔직히 채예령에 빙의해서 썼다기엔 당사자에게 보여주면 이딴 허술한 게 무슨 계획이냐고 할 것 같은 모양새였지만, 나로서는 이만하면 꽤 꼼꼼히 잘 세운 것이었다. 여기다 나중에 토익 시험 결제 후 표시해놓고, 운전면허 학원 등록 후 등록한 날짜하고 시험 날짜 표시하고. 격투기 알아봐서 적당한 학원 등록한 후 그 일정까지 추가해서 넣으면 채예령에게 지지 않을 계획형 인간이 될 수 있어 보였다.

“그놈들이랑 약속 잡은 날도 표시를 해야 하나. 너무 유동적이라 막 수정하고 그러면 지저분해질 것 같기도 하고….”

다들 그래 보여도 사회인이라 매주 시간이 나는 때가 달라져서 미리 표시해놓기가 좀 애매했다. 매일 놀기만 할 것 같은 정새빈마저 무슨 일을 하는지는 몰라도 바쁜 일이 생겨 몇 번 약속 시간을 변경해야 했으니, 말 다 했지 뭐.

원래 안 쓰고 있던 다이어리가 좀 지저분해진다고 큰일이 나는 것은 아니다만, 이왕 정리하기로 한 거 보기에 어수선해지면 내 머릿속도 그렇게 될 것 같아 망설여졌다. 나는 다시 펜의 꽁지를 물고 잘근거리면서 별생각 없이 고개를 들었다가 그대로 멈췄다. 머그잔 손잡이에 묶여 둥둥 떠 있는 풍선 두 개. 그 옆 나무 스툴에는 영상통화까지 해가며 제대로 전시해놓는 것을 확인받아야 했던 망측한 사진 액자가 있었다.

나는 그걸 가만히 보고 있다가 결심했다. 모든 약속이 아니라 놀이공원 일처럼 1번, 2번, 3번의 목표와 관련 있는 일들만 표시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나는 다이어리를 닫고 핸드폰을 켰다. 계획을 세웠으니 이제 실행에 옮길 차례다.

“운전면허 학원은 채예령이 딴 데서 하면 될 것 같고, 격투기는……. 아니, 그 전에 시험 날짜부터 픽스해놔야겠다.”

허공에서 머뭇거리던 엄지를 움직여 토익 시험 일정을 검색했더니 생각보다 더 자주 시험이 있는 듯했다. 옛날에 공부했던 것과 짧지만 학원 다니고 과외받으면서 공부했던 것을 생각하면, 계획했던 대로 한 달 정도 뒤에만 봐도 그럭저럭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하…로그인하는 게 이렇게 힘들 일이냐고.”

벌써 피곤한 건 기분 탓이겠지. 아이디랑 비밀번호 찾는 데 한참을 걸렸는데, 결제가 뭐라고 어플까지 깔아야 했던 나는 마지막 절차인 비밀번호를 누르기 위해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러나 이제 다 된 줄만 알았던 시험 결제는 갑작스러운 화면 전환 덕분에 전면 중지되었다.

지이이잉-

망할 최태혁. 하필 전화를 해도 꼭 지금 했어야만 했냐?!

“여보, 세요.”

- 무슨 일 있나?

“하아…아니요. 전혀 아무 일도 없어 죽겠는데요.”

- …말이 앞뒤가 안 맞는데.

새빨간 거짓말이라서 그런다, 이 자식아. 그렇게 대꾸하고 싶었으나 나는 이를 악물고 치미는 짜증을 내리눌렀다. 그래, 얘가 뭔 잘못이 있겠냐. 나는 마른세수라도 하기 위해 통화를 스피커폰으로 돌리고 핸드폰을 탁자 위로 올려놨다.

“진짜 아무 일도 없어요. 왜 전화하셨어요? 아까 전화 엄청 급하게 끊으신 거 보면 바쁘신 거 같던데.”

- 일하다 돌발 상황이 생겨서 어쩔 수 없었다.

일하다 생긴 돌발 상황이라는 말이 왜 이렇게 흉흉하게 들리지. 어디서 사람 잡아다 뭔가를 불게 한다든지, 그러다 도망을 가려던 걸 다시 잡아 와야 했다든지, 뭐 그런 장면이 자동으로 상상되었다. 실제로 처음 녀석을 주웠을 때 제외하곤 딱히 몸을 쓰는 모습을 본 적은 없고, 또 최태혁이 나한테 건네주었던 명함을 생각하면 어엿한 회사원이 맞는데도 사무실에 앉아 키보드 두들기고 있는 모습은 상상도 가지 않았다.

마른세수를 위해 손에 얼굴을 묻었던 나는 그 상태로 피식 웃고 나서 눈만 나오도록 손을 조금 내렸다.

“그랬구나. 그럼 지금은 바쁜 일 좀 해결된 거예요? 통화 괜찮아요?”

- 그래. 잠깐은 괜찮을 것 같아서 전화했다. 금요일로 옮기고 싶다고?

손에 막혀서 그런지 너무 웅얼거리는 소리가 나서 손을 내리고 자세를 고쳐 앉은 나는 녀석에게 네, 하고 짧게 대답했다.

- 그날은 오전에 일정이 있어서 저녁에 봐야 할 것 같은데.

“전 상관없어요.”

- 내가 상관있어. 나는 하루를 온전히 가져야겠으니 그다음 날 저녁 비워놔.

이건 또 무슨 신박한 개소리야. 마치 맡겨 놓은 걸 찾으러 온 사람처럼 아주 당당한 명령과도 같은 통보에 절로 입이 벌어졌다.

- 그럼 알아들은 걸로 알….

“잠, 잠깐만요! 아니 무슨, 형! 끊, 끊지 마세요! 다음날이면 토요일이잖아요! 저 그날 약속 생겨서 바꾸자고 한 건데, 저녁을 어떻게 비워놔요. 차라리 오전에 봐요, 오전에.”

- 그럼 금요일 저녁부터 그다음 날 오전까지 같이 있는 것으로 하지.

아, 그건 더 문제일 것 같은데. 나는 쌍둥이들 덕분에 같이 밤을 보내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은 참이었다. 하물며 대낮에도 그런 일들을 저지르는 놈들인데 같이 밤을 보내다니 절대 안 될 말이지. 나는 혼자 고개를 저으면서 최태혁이 혼자 결정 내리기 전에 얼른 의견을 냈다.

“그것도 좀 아닌 것 같고요, 토요일 저녁보단 일요일 저녁에 보는 걸로 하면 어때요? 아니면 일단 금요일에 보고 그때 만나서 그 다음 일정을 조율해요, 우리. 네?”

- …그래. 일단은 알았다. 일이 생겨서 통화는 이만해야 할 거 같군.

갑자기 전화기 너머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나는 또 펼쳐지는 상상의 나래를 애써 털어내면서 전화를 마무리 짓기 위한 대답을 했다.

“아 그럼 그, 금요일에 몇 시 어디서 볼지는 메시지로 얘기해요.”

나도 모르게 최태혁의 말보단 그 배경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데 회사라고 하기엔 심하게 우렁찬 ‘팀장님 마무리했습니다!’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전화가 끊겨버렸다. 이러니까 내가 상상을 해, 안 해.

나는 머릿속에 펼쳐지는 느와르 영화 한 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아까 마치지 못했던 결제에나 집중하자는 마음으로 핸드폰을 켰다. 빌어먹게도 로그인부터 다시 해야만 했지만 어쨌든 성공해서 다이어리에 시험 날짜를 표시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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