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흐으, 훌쩍, 그만, 무서, 훌쩍 무서워. 이상, 크흥, 이상하다구요! 흐어엉-”
결국 쌍둥이는 내가 아이처럼 울음을 터트리고 나서야 손을 멈췄다.
손가락이 빠져나감과 동시에 나는 자리에 주저앉아 눈물을 닦았다. 쌍둥이들은 내가 갑자기 애처럼 울어서 당황했는지 자리에서 그대로 굳어버린 것 같았다.
그렇게 얼마간 훌쩍거렸을까, 정말 아팠다기 보단 강한 쾌감에 정신이 없던 와중에 생전 처음 느껴보는 생소한 자극까지 더해져 폭발했었던 거라 울음은 금방 그쳤다. 그러나 괜찮아졌다는 것을 알게 되면 아까 같은 상황이 다시 펼쳐질 것 같아서 억지로 훌쩍거리면서 힐긋 눈치를 살피다, 남궁후랑 눈이 마주쳐버렸다.
녀석은 관찰하듯 나를 가만히 쳐다보더니 하, 하고 허탈하다는 듯 웃고 몸을 움직였다. 나는 반사적으로 뒤로 조금 물러섰으나 녀석이 노린 것은 내가 아니었다. 남궁후는 이를 악물고 말하며 내 뒤에 있는 남궁호를 발로 차 버렸다.
“도와준다며 이, 도움 안 되는 새끼야.”
“억!”
꽤 큰 소리에 놀라 돌아보니 남궁호가 배를 부여잡고 웅크리고 있었다. 녀석은 목소리도 안 나오는지 끙끙거리면서 남궁후에게 입모양으로 욕을 하고 있었다. 그 꼴이 뭔가 통쾌해서 킥킥대면서 구경하고 있는데 뒤통수가 뜨거운 느낌이 들었다.
나는 침을 한번 꼴깍 삼키고 뒤를 돌아봤다. 역시나 남궁후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나를 뚫어버릴 것처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덮쳐오는 위기감에 다시 눈물이라도 흘려보려고 했으나 눈물은 개뿔 콧물만 열심히 나왔다. 제기랄. 어쩔 수 없다.
“뀨…?”
“…하.”
“…푸흡-”
남궁호 죽일까. 남궁후의 어이가 없다는 코웃음은 그렇다 쳐도, 방금 전까지 아파서 소리도 못 내던 놈이 웃는 건 팍 자존심이 상했다. 나는 얼굴이 불타오르는 것을 느끼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망할 세이프 워드. 씨발, 진짜 또라이 같은 새끼들이 꼭 지들 같은 것만 골라서 정해선.
“하아…자자 그냥. 그래, 오늘만 날이겠냐.”
“아하하, 진짜 웃겨 죽겠네. 아니 근데 왜 ‘크앙’은 한 번도 안 해줘? 좀 섭섭하네?”
창피함을 못 이기고 혼자 시트만 쥐어뜯고 있는데 양옆에서 약속한 것처럼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대를 벗어나 선 남궁후는 긴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헝클어트렸고, 남궁호는 배가 아픈 건지 웃느라 그런 건지, 아무튼 아직도 배를 감싸며 싱글벙글했다. 나는 조용히 남궁호에게 손등 부분이 보이도록 검지를 내밀었다.
“그건 무슨 뜻이야?”
“이거 그냥 숫자 일인데요.”
뻥이다. 나랑 채예령이랑 어른들 앞에서 중지 대신에 썼던 욕이었다. 그러나 그걸 알려줄 마음이 하나도 없었던 나는 그냥 싱긋 웃으면서 한 번 더 녀석에게 내밀어 보이고 손을 접었다.
“곰돌이 만세.”
“예? 만세요?”
남궁호가 인상을 찌푸리는 걸 보며 메롱을 하던 나는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팔을 들었다. 그랬더니 곧 천 같은 것이 얼굴을 쓰는 느낌이 들고, 눈을 떴을 땐 커다란 티셔츠가 입혀져 있었다. 남궁후의 옷이라 그런지 사이즈가 매우 넉넉했다.
“이대로 자면 너 또 건들고 싶어질 거 같은데 하루에 두 번 울리긴 좀 그러니까. 대신 다음엔 진짜 얄짤없다. 오늘이라 봐주는 거야.”
남궁후는 그렇게 말하면서 침대로 올라와 누웠다. 나는 녀석의 말에 반박하고 싶은 것을 꾹 참고 그냥 티셔츠만 만지작거렸다. 집에 가야 할 것 같은데 아까 새벽 어쩌고 한 것을 보면 집에 갈 방법이 딱히 생각나지 않았다.
여기 택시 잡히는 곳이려나. 옷은 어떡하지. 팬티를 빌릴 수는 없을 것 같고 뭐 바지라도 어떻게 빌려서 입고 가면 되지 않을까. 정신 못 차리게 했던 일이 끝나고 나니 현실적인 고민이 들기 시작해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하아, 일단 이 침대에서 벗어나자. 그렇게 결심하고 티셔츠 밑단을 당겨 중요부위를 가린 상태에서 몸에 힘을 주는데, 갑자기 시야가 확 어두워졌다.
“…이게 뭘까요.”
“이불!”
항상 생각하지만, 저 녀석들은 사람 하는 말에 참 상큼하고 깔끔한데 어딘가 열 받게 대답하는 경향이 있어. 나는 머리 위로 덮어진 이불을 끌어내리면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다가오는 남궁호를 한심하게 바라봤다. 그러나 녀석은 내 시선 따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옆에 와서 주섬주섬 이불을 펴 나를 덮어주더니 자기도 자리를 잡고 누웠다. 순식간에 내가 눈을 떴던 순간과 똑같은 상황이 만들어졌다. 여기 남궁후 방이라면서 너는 안 나가냐.
“꺼져라 남궁호.”
“싫은데, 나도 진호랑 같이 잘 건데.”
“아 진짜 짜증 나.”
내 말이. 얼떨결에 다시 둘 사이에 갇힌 나는 두통이 밀려오는 것 같은 느낌에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 자세 그대로 얘네를 건너갈 수는 없으니 또 밑으로 슬슬 빠져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내 의지와는 다르게 몸이 눕혀졌다.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자.”
“저 잠은 집에 가”
“잠 안 오면 오게 만들어 줄까? 눈물 쏙 빼면 지쳐 잠들지 않을까?”
“서 자기엔 너무 시간이 늦었으므로 여기서 눈을 감겠습니다.”
잠시 반항을 하려고 했으나 엉덩이를 꽉 쥐는 손길에 얼른 눈을 감았다. 다행히 그 손은 내가 눈을 감자마자 떨어져 나가 주었다.
잊고 있었던 아까의 이물감을 떠올리면서 눈을 꽉 감고 있는데 내 몸이 이리저리 움직이더니 누군가의 품에 안겼다. 실눈을 떠서 본 결과 살색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보이는 시야를 고려했을 때 아무래도 남궁후가 자기의 어깨를 베고 눕도록 자세를 조정한 것 같았다. 그럼 내 허리 안은 자세로 등에 얼굴 묻고 있는 건 남궁호겠네. 앞뒤로 잡혀 있다니, 정말 벗어나기 그른 것 같은 자세 1위 아니냐, 이거.
이쯤 되니 슬금슬금 체념할 마음이 들었다. 나는 결국 한숨을 삼키면서 눈을 감았다.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된 거 차라리 자자, 빨리 잠들어버리자, 최면을 걸고 있는데 남궁후가 몸을 내 쪽으로 돌려 나를 꽉 안더니 그새 잠에 취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오늘 고생했다, 곰돌이. 잘했어.”
그 말에 나는 조금 멍해졌다. 얘가 정말 뭘 알고 이러나 싶은 마음에 고개를 젖혀 녀석의 얼굴을 살폈다. 남궁후는 평온한 낯으로 눈을 감고 있었다. 하긴 알 리가 없지.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자자, 얼른 자자. 그 뒤로 나는 얼마간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다 남궁호의 배를 쓸어내려주는 손길과 남궁후의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취해 겨우 잠들 수 있었다. 불편했지만 따뜻한 하루의 마무리였다.
그리고 그다음 날, 오늘은 또 무슨 짓을 할지 몰라 잔뜩 경계한 보람도 없이 새벽에 있었던 일이 마치 꿈이었던 듯 쌍둥이들은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출근하면서 집 앞에 내려주기 전에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춰주길 요구했을 뿐이었다. 물론 해주지는 않았다.
* * *
남궁후와 함께하는 우당탕탕 놀이공원 방문기와 남궁호까지 합세했던 저녁의… 그건 뭐라고 불러야 되냐. 아무튼 망측한 밤이 있고 나서 며칠 동안 미래에 대한 고민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데, 예령이네 아주머니가 반찬을 받으라고 연락을 주셨다. 나는 아직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가는 길 내내 달력을 보면서 몇 번이나 스스로를 안심시켜야 했다.
그래도 어쨌든 아주머니의 부름을 거절할 마음은 들지 않았기에 머뭇거리면서도 채예령네 집에 입성했다. 그리고 반찬만 받고 가려고 했었던 의도와는 달리, 마침 집에 있던 채예령의 질문에 대한 답을 고민하다 결국 거실에 자리 잡고 앉아있게 되었다.
“가게?”
“가만있어 봐.”
나는 옆에서 재촉하는 채예령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입에 검지를 가져다 댔다. 일생일대의 고민을 하는 중인데 옆에서 자꾸 재촉하는 소리가 시끄러워서였다.
“이번 주 토요일이라고?”
“응. 뭐, 일요일로 옮겨질 수도 있긴 한데, 아무튼 이번 주야.”
사실 원래라면 고민할 것도 없이 나는 가지 않는다고 할만한 일이었다. 그래서 질문을 던진 채예령도 물어놓고 내 대답을 듣기도 전에 알겠다고 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내가 답지 않게 갈등하는 걸 보자마자 아주 들뜬 얼굴을 하곤 계속 내 옆에서 대답을 기다렸다. 나는 그 부담스러운 얼굴을 손으로 밀며 골똘히 생각을 하다, 결단을 내리고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간다.”
“와! 웬일이냐? 와, 김진호 너! 놀이공원 한 번 다녀오더니 뭐 심경의 변화가 좀 있었나 보다?”
왜 오버야, 또. 나는 이게 뭐라고 우와를 연발하며 박수까지 치는 채예령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결정도 하고, 반찬도 받았으니 이제 집에 가서 밥이나 먹어야겠다.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그새 메시지를 보내는 건지 열심히 엄지손가락을 움직이고 있는 채예령을 툭 찼다.
“오버하지 말고. 장소랑 시간 보내줘. 나 간다.”
“어? 밥은? 집 가서 먹으려고? 먹고 가지. 아, 알았다 알았어. 메시지는 이미 보내 놨으니까 확인해봐!”
지금까지 내가 취했던 태도를 생각하면 저렇게 유난 떠는 심정도 어느 정도 이해는 가지만, 그래도 너무 대놓고 좋아하니까 민망스러웠다. 나는 지금이라도 결정을 번복하고 싶어지는 마음을 한숨으로 떨쳐내고 녀석에게 대충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리고 아까 나가시면서도 직접 챙겨주셨던 반찬통을 챙겨 녀석의 집을 나오자마자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토요일이라고 했으므로 그날 만나기로 한 약속을 옮겨야 했다. 나는 최근 연락처로 들어가 가장 위에 있는 이름을 꾹 눌렀다.
- 그래.
전화 첫마디가 왜 저래. 전화하는 스타일에서도 사람 성격이 보인다는데 얘는 자기 열 받을 때 빼곤 정말 한결같이 과묵병에 걸린 사람처럼 굴었다. 어떻게 보면 일관된 거니까 좋은 건가.
“형! 저 진호인데요, 지금 전화 괜찮으세요?”
- 말해.
“아, 다름이 아니라요 우리 토요일에 보기로 한 거 혹시 금요일로 옮길 수 있을까요? 제가 동….”
- 그래, 알았다.
“...창회 비슷한 걸 가야 할 것 같아서…요.”
끊겼다. 믿기지 않아서 다시 핸드폰을 봐도 검은 배경화면만 보였다. 전화 괜찮다며. 최태혁, 이 전화매너 똥 같은 새끼! 나는 옆구리에 낀 반찬통을 꽉 끌어안으면서 이를 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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