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깼어?”
깬 정도가 아니라 놀라 자빠질 뻔했다. 나는 내 쪽으로 돌아누우며 허리에 팔을 걸쳐오는 남궁후를 피해 뒤로 물러섰다. 녀석의 팔이 길어서 완전히 피하지는 못했지만, 안아 당기려던 것은 저지할 수 있었다. 그러느라 거리를 좀 두고 반대쪽에 누워있던 남궁호에게 가까워져 몸이 닿는 것이 느껴져 허리를 바짝 세워 앉았다. 나는 양팔을 교차하여 앞을 가리면서 급하게 말을 뱉었다.
“이게 무슨, 아니, 왜 또 알몸인, 형들은 왜 또 옷을…!”
머리가 과부하돼서 그런지, 생각한 질문이 모두 뒤죽박죽 엉망으로 튀어나왔다. 그러면서도 열 받는 건, 쌍둥이는 내가 당황해서 아무 말을 하거나 말거나 잠에 취해 제대로 듣지도 않는 것 같다는 점이었다.
남궁후는 내 허리께에 팔을 뻗어 걸쳐놓은 채 다시 잠에 든 것 같았고, 무슨 일이냐 물으며 상체를 일으켰던 남궁호는 다시 엎드려 누운 상태였다. 나는 콧바람을 세게 내쉬면서 속으로 질문을 정리하고, 녀석들이 무시할 수 없을 만큼 크게 소리를 질렀다.
“여긴 어디고! 저는 왜 알몸이고! 왜 윗도리 벗은 형들이랑 침대에 누워 있는 거예요!”
쩌렁쩌렁 울리는 소리에 인상을 찌푸리던 남궁후가 한쪽 눈을 뜨고 나를 올려다보더니 피식 웃었다.
“아아…일어나자마자 우렁차네, 곰돌이.”
나는 대단하네, 하고 중얼거리며 다시 눈을 감는 남궁후를 차 버릴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러나 내가 미처 뭘 하기도 전에 남궁후의 팔을 피해 남궁호가 뒤에서 허리를 감아왔다.
“하아, 진호야…. 여기는 우리 집, 쟤 방, 옷은 진호 네 주머니에 있던 아이스크림 컵에 남았던 액체 때문에 바지가 더러워졌길래 벗기는 김에 위에까지 그냥 벗겨버렸고, 우리는 원래 벗고 자. 그리고 네가 가지 말라고 저 새끼를, 아니, 아무튼. 새벽이니까 좀 더 자자, 응?”
그러면서 내 몸을 눕히려고 팔에 힘을 주길래 나는 몸에 힘을 주어 버텼다.
“저, 저 옷 주세요. 잠은 집에 가서, 아니 여기 형네 집이면 지금 몇 시죠? 버스가 있나?”
나는 녀석들이 춥든 말든 이불을 끌어당겨 몸을 가리고 엉덩이를 움직여 침대 끝으로 향했다. 팬티도 없는 상태에서 녀석들 위로 건너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나는 얼마 가지 못해 허리에 걸쳐 있던 팔의 힘에 끌려 다시 침대 위로 올라와야 했다. 어느새 상체를 일으켜 앉은 남궁후가 나를 팔에 가두고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웅얼거렸다.
“너 오늘 혼자 있기 싫다며. 다 가지 말라고 붙잡아서 저 새끼도 특별히 여기서 재워줬는데, 이제 와서 우리가 필요 없어진 거야? 나 상처받을 거 같은데?”
나는 맨살에 스치는 머리카락이 간지러워 몸을 웅크리면서 녀석의 말에 반박했다.
“제, 제가 언제요. 아니, 그래도 이건 좀 이상하잖아요. 바지가 더러워졌는데 팬티는 왜 벗고 있는 거고, 아무리 제가 가지 말라고 했다고 해도 잠결에 한 말인데, 아니, 일, 일단 머리 좀 그만 움직여봐요, 좀!”
머리를 움직일 때마다 움찔거리는 데도 계속 비비적거리는 남궁후의 이마를 밀어 떨어트렸다. 생각보다 순순히 밀려난 녀석은 아직 졸음기가 가득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씩 웃더니 입을 열었다.
“그러게 왜 아이스크림 컵을 주머니에 넣어놔. 그거 때문에 바지 주머니만 젖은 게 아니라 팬티까지 얼룩졌는데 그걸 그대로 입혀놓긴 좀 그렇잖아. 그러고 나선 곰돌이 푸처럼 하의만 벗은 채로 두기 뭐해서 친히 위에도 벗겨준 건데? 못 믿겠으면 옷 가져다 보여줘?”
“그래도 그, 그럼 여기 다 같이 누워 잘 필요는…!”
“나도 정말 그러고 싶지 않았는데 진호야, 네가 가지 말라고 했다니까. 혼자는 싫다며.”
뭔가 더 따지고 싶었으나 말문이 막힌 나는 애꿎은 입술만 깨물었다. 평소라면 내가 그랬을 리가 없다고 한마디 했을 테지만, 오늘만큼은 그랬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나는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켜고 있는 남궁후를 보다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넓은 방에 커다란 침대, 책상과 책장이 있는 심플한 방이었다. 뭐라도 걸칠 것이 없을까 보던 나는 사무용품과 노트북이 놓여있는 책상 위의 이질적인 물건에 시선을 집중했다. 무드등만 켜져 있는 상태라 어렴풋한 형체만 보였지만, 정체가 뭔지 알 것 같았다.
“아, 저거 그거. 아이스크림 컵. 너 그때 안 버리고 들고 있겠다고 한 건데. 그걸 주머니에 넣어 놓은 거 보니까 마음대로 버리면 안 될 거 같아서 일단 놔뒀어.”
“아….”
쌍둥이가 풍선 다발을 들고 등장하던 그 당황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차마 버릴 생각은 못 하고 주머니에 쑤셔 넣었던 것이 기억났다. 저건 아이스크림 콘처럼 먹지도 못하는 건데. 나는 순간적으로 복잡해지는 생각을 떨쳐버리기 위해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때와 달라. 나는 더 이상 혼자가,
“도리도리 해? 왜 또 그렇게 비장한 표정을 짓고 그래, 웃기게.”
...아니네. 너무 명백히 혼자가 아니고, 거기다 알몸이네. 그래, 그때와 달라도 너무 다른 상황이었다.
나는 나름대로 진지한 생각 중인데, 옆에서 산통을 다 깨 놓는 남궁호를 차게 식은 눈으로 흘겨봤다. 그러자 엎드려 누운 자세 그대로 고개만 들어 나를 보고 있던 녀석이 턱을 괴며 씩 웃었다.
“뭐, 왜. 그렇게 봐봤자 아기 곰이 ‘크앙’하는 거 같아서 하나도 안 무서워.”
“…그러다 그 아기 곰한테 호되게 물리고 엉엉 우는 수가 있어요.”
“물어주게? 나야 좋지. 자. 물어봐.”
욱해서 받아친 말에 녀석은 좋다고 고개를 기울여 목을 드러내 보였다. 나는 길고 매끈해서 더 얄미워 보이는 녀석의 목을 진짜 피나게 깨물어버릴까 하다가, 가까스로 참고 다시 아이스크림 컵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됐거든요.”
의도했던 것보다 더 퉁명스러운 말투가 나와 내심 움찔했지만 태연한 척 정면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리고 아직도 내 허리를 감싸고 앉은 채 꾸벅꾸벅 졸고 있는 남궁후의 팔을 탁탁 치며 말했다.
“저거 버리고 올래요.”
특별히 어떤 의미를 담은 것은 아니고 그냥 지금 본 김에 내가 직접 버리고 싶었다. 그러고 나서 옷가지 같은 걸 찾아 좀 걸쳐야겠다. 나는 스르르 힘이 풀린 팔을 옆으로 밀어놓고 이불을 끌어올려 몸에 둘렀다.
양옆을 둘러보니 남궁후는 침대 등받이에 기대앉아 눈을 감고 있었고 남궁호는 머리만 내 쪽으로 돌리고 눈을 감은 채 엎드려 있었다. 이 둘을 건너서 가기엔 여전히 밑이 휑한 상태였으므로 결국 또 엉덩이를 쓱쓱 밀어 침대를 벗어났다.
“쓰레기통은 책상 옆에 있다.”
“여기요? 아, 있네. 봤어요.”
쓰레기통 위치를 확인한 나는 이불이 떨어지지 않게 한 손으로 야무지게 쥐어 잡고 아이스크림 컵을 잡았다. 겉에 갈색 액체가 줄줄이 말라붙어 있는 것을 보니 주머니가 엉망이 됐을 것 같아 보이긴 했다.
그렇다고 팬티까지 젖을 정도는 아니었을 것 같은데…. 그리고 아무리 그래도 사람 놀라게 홀딱 벗겨 놓는 게 어딨냐고. 아무 옷이나 좀 입혀놔 주지. …이거 너무 상전 마인드인가? 나는 더러워진 옷을 벗겨 놔 준 것만으로도 고마워해야 하는가, 잠시 고민하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쟤네 포함 다섯 명은 이런 상황에 처했을 때 만사를 제쳐두고 경계부터 해야 하는 대상이었다. 얼른 이거나 버리자. 나는 쓰레기통을 향해 걸어가서 발걸이를 밟아 쓰레기통 뚜껑을 열었다.
“….”
왜 버리지 못하고 굳이 또 주머니에 넣었을까. 잔뜩 구겨진 컵을 버리려고 손을 뻗는데 그 생각이 들었다.
가만 보면 나는 진짜 뭘 놓는 걸 못 하는 것 같다. 가지기 전엔 별 욕심이 없는데, 막상 내 손에 들어오면 남들이 다 쓰레기라고 할만한 것들도 잘 버리지 못했다.
물건도 그렇지만 기억도 그랬다. 계절마다 입지 않는 옷을 버린다고 한 무더기 쌓아놨다가 하나둘 주섬주섬 주워와 결국 하나도 버리지 못하는 것처럼, 나는 결국 내 안에 다 담아놓고 있었다.
정리라도 잘하면 말을 안 해. 채예령이 항상 잔소리하게 만들 정도로 나는 청소를 싫어했다. 지저분한 것을 치우기보단 외면하는 것이 내 특기였다. 그래서 결국 내 바지를 더럽혔던 이 아이스크림 컵처럼 내 안에는 내 마음을 병들게 하는 쓰레기들로 넘쳐 나나보다 싶었다.
“뭐해, 멍하니 서서. 자?”
“악!”
생각에 잠겨 있는데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깜짝 놀라 주저앉았다. 눈에 보이는 것이 교복바지인 것을 보면 남궁후인 모양이었다. 나는 쿵쾅대는 심장에 손을 얹으며 긴 다리를 따라 고개를 들었다. 녀석은 허리에 손을 얹고 밑에 있는 나를 보며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왜 애를 놀라게 하고 그래. 진호야, 그거 가지고 싶으면 그냥 가져. 버리기 싫은 것 같은데.”
둘 다 눈 감고 있더니 왜 갑자기 쌩쌩해. 나는 뒤에서 말을 하는 남궁호를 보기 위해 목을 완전히 뒤로 젖혔다. 나와 눈을 마주치고 씩 웃은 녀석은 내 겨드랑이 아래로 손을 집어넣어 잡더니 아주 손쉽게 들어서 세웠다.
얼떨결에 다시 바로 서게 된 나는 쓰레기통 뚜껑을 열어주고 있는 후와 뒤에서 팔짱을 끼고 지켜보는 호의 눈을 차례로 맞추고 나서 쓰레기통에 팔을 뻗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또박또박 말하면서 손에 힘을 뺐다.
“버릴래요. 쓰레기잖아요.”
아이스크림 컵은 텅 비어있던 쓰레기통에 떨어졌다. 이게 뭐라고 속이 좀 후련해졌다. 오늘 하루를 아주 잘 마친 느낌이었다. 그래서 혼자 작게 웃는데, 쓰레기통 뚜껑이 닫힘과 동시에 몸이 들렸다.
“잠, 왜 이래요?!”
“뭔진 모르겠지만 우리 곰돌이 오늘 엄청 칭찬해줘야 할 것 같아서. 칭찬을 위해 우리 일단 침대로 갈까?”
약속한 15분도 있고. 남궁후가 그렇게 말하면서 나를 공주님 안기로 안아 든 채 침대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 과정에 이불이 떨어져 맨몸이 그대로 드러난 나는 중요 부위를 가리느라 발버둥 치지도 못하고 그대로 안겨있을 수밖에 없었다.
“칭찬 필요 없거든요! 그리고 칭찬을 왜 침대에서 하는 건데요! 변태세요?!”
그래서 말로라도 녀석을 저지하려고 소리를 질러댔지만, 당연하게도 녀석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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