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사실 남궁후에게 놀이공원에 가자는 메시지를 받았을 때, 거절하려고 했다. 놀이공원에 가면 내가 비정상적으로 행동할 것을 알았고, 그게 사람들에게 욕먹을 만한 행동이라는 것을 경험했었기 때문에. 그래서 바로 거절하기 위해 대화창에 들어가려던 순간,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말이 있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래.
내 안의 내가 그렇게 외쳤다. 비록 원치 않았고, 심지어 1년이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어쨌든 나는 시간을 되돌아왔다. 아주 한정적이고 쓸모없는 기억이 대부분일지라도 미래를 알고 있었고, 전과는 다른 선택을 하며 살아갈 기회를 얻었다. 실제로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많은 것이 바뀌었다. 멀리 볼 것도 없이 남궁후로부터 어딘가 가자는 메시지를 받은 것이 그 증거였다.
그러나 나 스스로는 아무것도 변하지도, 변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깊게 생각하기 싫어하고, 금방 잊고 싶어 하고, 해야 할 것을 모르지 않지만 그렇다고 뭔가를 하지는 않는 삶의 방식. 전에도 지금도 다섯 놈들과 친해지기 위해 했던 노력들 외에는 흘러가는 대로 하루하루 넘기는 것만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회귀한 직후에야 자세히 기억나는 것이 없으니까, 그나마 가장 명확한 기억을 이용하여 살 가능성을 높이는 데 집중하자는 것이 변명이 되어 주었다. 그러나 위험에 처했을 때 외면하지 않을 정도의 친목을 쌓자는 초기의 목적을 달성한 상태에서, 그건 이제 정말 핑계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나는 언제나 평범해지고 싶었고, 그게 행복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스스로가 평범하다고 생각하기 위해 나의 평범하지 못한 것들은 모두 외면하고 회피했다. 그런 삶의 태도에서 기인한 나의 선택들은 결국 회귀 전의 내 삶을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망가트리고 있었다.
그 결과 나는 내가 회귀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다시 살고 싶지 않은 삶’이라는 생각부터 했을 정도로 내 삶에 대해 부정적인 기억만 가지고 있었다. 모순적인 것은, 그런 와중에도 팔자에 없던 다섯 남자를 끌어들여서 살길을 도모할 만큼 살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다는 것이다.
결국 나는 살기 싫은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살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나는 전과 같이 죽지 못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어서 행복한 삶을 살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나 스스로가 변하는 수밖에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어쩌면 남궁후가 많고 많은 장소 중에 여기를 고른 것은 운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곪을 대로 곪아버린 내 상처 중 하나를 이제는 그만 외면하라는 계시 같았다. 그래서 가겠다고 답했다.
한 번도 제대로 돌아본 적 없었던 기억을 천천히 되짚어본 나는 눈을 떴다. 신기했다. 놀이공원 벤치에 혼자 앉아 가장 힘들었던 기억을 자진해서 떠올리고 있는 내가. 그 기억을 떠올렸음에도 이렇게 태연하게 혼자 앉아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사실 오늘 하루 내내 신기함의 연속이긴 했다. 남궁후는 뭘 아는 것처럼 진짜 알고 있던 채예령보다 훨씬 더 내 불안을 잠재워주었다. 처음 손을 마주 잡은 순간부터 녀석은 내 손을 잡거나 어깨동무를 하는 등 단 한순간도 나를 혼자 둔 적이 없었다. 심지어 화장실에서는 손을 놓은 대신인지 집요하게 나를 쫓는 그 눈길이 부담스러워 오히려 내가 그만 좀 보라고 핀잔을 줬을 정도였다.
퍼레이드를 보며 사소한 분쟁이 일어났을 땐 사람들의 시선에 개의치 않고 화를 내주더니 하나도 도움이 되어주지 못한 나에게 오히려 잘했다고 칭찬을 해주었다. 무서운 놀이기구를 계속 타게 한 것은 괘씸했지만 돌이켜보면 나는 오늘 하루 종일 남궁후의 보호 아래 있었던 느낌이었다. 그 안정감에 나는 처음으로 이 장소가 온전히 즐거웠다.
물론 완전히 괜찮아진 것은 아니었다. 나는 드문드문 절벽에서 떨어지는 것 같은 선득한 기분에 정신이 멍해지기도 했고,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간 것 같이 하얗게 질려 추위에 떨기도 했다. 그리고 그럴 때면 내가 보기에도 이상할 정도로 남궁후에게 붙어 서려고 안간힘을 썼다. 예전에 채예령에게, 그리고 그의 여자친구에게 했던 것처럼.
그걸 본 반 아이가 징그럽다고 외쳤던 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것 같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고맙게도 남궁후는 싫은 소리는커녕 가볍게 놀리는 말도 하지 않고 내 이상 행동을 자연스럽게 받아 넘겨주었다. 워낙 장난기가 많은 사람이라 그걸로 장난을 칠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정말 단 한 번도 그러지 않았다.
한 시간, 두 시간, 석양이 질 때까지 한결같은 태도에 나는 드디어 혼자 테이블에 앉을 수 있을 정도의 용기가 생겼다. 녀석이 아이스크림을 사 오는 그 시간 동안 나는 또 절벽에서 떨어졌지만 그래도 견딜만했다. 그래서 다소 억지스러운 이유를 대며 혼자 있을 시간을 만들었다. 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아서. 오늘이 아니면 평생 못할 것 같아서.
시야 끝에 걸리는 아이스크림 컵을 이리저리 기울이며 사람들이 움직이는 것을 멍하니 쫓는데 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꺼내 들어 확인하니 채예령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아직 놀이공원이야?]
[무슨 일 생기진 않았지?]
[괜찮아?]
나는 순간순간 추워지는 몸의 온기를 지키기 위해 끌어안고 있던 다리를 내려놓았다. 손이 덜덜 떨렸지만 몇 번 쥐었다 펴니 잦아들었다. 그대로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괜찮아. 과거는 과거야. 나는 이제 어른이잖아. 그렇게 되뇌면서 고개를 숙여 손가락을 움직였다.
[괜찮아]
[생각보다 별거 아니다]
[놀이기구 타는 게 더 힘들어. 후 형 미쳤어. 안 쉬고 계속 타. 죽을 거 같아]
대화창을 계속 켜 놓은 건지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읽었다는 표시가 떴다. 병원 다녀온 것에 대해 별 얘기가 없는 것을 보니 무사히 다녀왔나 보다. 다행이었다. 딱히 더 할 이야기가 없었던 나는 다시 무릎을 끌어안고 있으려고 다리를 올리는데, 또 진동이 왔다.
[오늘 우리 집 와서 자도 돼]
[따로 전화할 필요 없고 열쇠로 열고 들어와. 너 왜 열쇠 줬는데도 자꾸 초인종 눌러! 열어주기 귀찮으니까 제발 그냥 열고 들어와.]
잔소리쟁이. 아무래도 얼마 전 초인종 누른 것 때문에 그러는 것 같았다. 나는 작게 웃으면서 ‘ㅇ’을 보냈다. 그랬더니 답으로 엄지를 내미는 이모티콘이 왔다.
그걸 가만히 보고 있다가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였다.
[예령아]
[나 지금 혼자 벤치에 앉아있다?]
[이게 뭐라고 그동안 못했을까]
[생각해 보면 그날의 일도 그렇게 힘들어할 일이 아니었던 거 같은데. 나는 버림받은 게 아니었고, 길을 잃지도 않았었는데. 그게 뭐 그리 아픈 기억이라고 지금까지 힘들어했]
“엄마!”
나는 바로 앞에서 들리는 소리에 메시지를 입력하던 것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가 밝은 얼굴로 뛰어가고 있었다. 그 손에 들린 풍선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모습이 경쾌했다. 아이를 기다리는 여자와 남자는 환한 얼굴을 하고 달려오는 아이를 보고 있었다.
이상하게 그 장면이 슬로우모션으로 보였다. 그리고 그 아이에게는 혼자 서 있던 나의 모습이, 두 어른에게는 아버지와 그의 모습이 오버랩되었다.
내 욕심으로 인해 눈물로 끝나버린 그 날의 기억이 머릿속에서 뒤죽박죽 뒤엉켜갔다. 그의 미소와 아버지의 손길과 엄마의 목소리. 발밑이 뻥 뚫려 밑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아이의 행복해 보이는 모습이 아팠다. 밑도 끝도 없는 질투가 끓어오르고 그에 못지않은 자괴감이 나를 잠식했다.
나는 덜덜 떨리는 몸을 잔뜩 웅크려 끌어안았다. 방금 전까지 괜찮아진 것 같다고 말하던 것이 생각나 헛웃음이 나왔다. 이제 겨우 한심한 사람에서 벗어나나 싶었는데 더 최저로 떨어진 것 같았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물며 진동하는 핸드폰을 향해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멍청이 같은 소리 하지 마.]
[솔직히 네가 한심할 때도 많지만, 오늘은 아니야. 아픈 기억이 맞고, 네가 힘들어하는 건 당연한 거야. 다른 애들이 아니라 우리라서, 그래서 더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일이었어.]
채예령의 메시지를 읽는데 뚝, 하고 눈물이 떨어졌다. 동시에 주변의 소리가 크게 들렸다. 그러나 그 속에 아버지와 그의 목소리는 없었다. 당연했다. 그때도 끝내 듣지 못했던 것이 오늘이라고 들릴 리는 없었다.
나는 볼을 타고 흐르는 물방울을 닦는 대신 연락처 목록을 뒤져 ‘엄마’라고 적힌 글자를 찾아 띄워놓고 손가락을 뗐다. 차마 누를 수가 없었다. 갑자기 사무치게 외로워졌다. 혼자인 것이 너무 선명하게 느껴졌다. 나는 사방에서 들리는 행복한 웃음소리와 내 안의 울음소리가 충돌하여 울렁거리는 것을 참으며 채예령과의 대화창을 켰다. 그대로 눈물이 몇 방울 떨어질 때까지 망설이다가 메시지를 작성했다.
[안 괜찮아.]
[혼자 있는 거 하나도 안 괜찮아.]
그렇게 보내자마자 화면이 전환되더니 [남궁호]라는 글자가 액정을 채웠다. 나는 후가 아니라 호라고 찍힌 것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동시에 온갖 시끄러운 소리를 제치고 내 이름이 들렸다.
“김진호!”
저만치서부터 양손을 번쩍 든 채 사람들 사이로 걸어오는 남궁후가 시야에 들어온 순간, 귀가 울릴 정도로 시끄러웠던 소음이 ‘삐-’하는 이명과 함께 조용해졌다. 환하게 웃고 있는 녀석의 양손에는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풍선이 뭉텅이로 들려 있었다. 저대로 점프를 하면 날아갈 수 있을 것처럼 보일 정도로 많은 개수였다.
나는 가까워지는 녀석을 멍하니 보고 있다가 연속으로 울리는 진동에 기계적으로 핸드폰을 확인했다. 화면의 상단에는 부재중 전화 표시가 찍혀있었고, 예령이와의 대화창이 켜져 있었다. 대충 읽고 다시 남궁후를 보려고 했던 나는 이마를 짚었다. 이건 또 뭐야.
[그러게 내 말 듣고 여러 명이 갔으면 혼자 될 일 없었잖아.]
[안 그래도 너 그럴 줄 알고 내가 사람 한 명 보냈다!]
[사실 내가 가려고 했는데 일이 좀 생겨서 못 가고, 대신 호 형 마침 퇴근이라길래 혹시나 해서 말했더니 갈 수 있다 그러더라고. 그 형은 너도 요즘 친하게 지내고 있으니까 불편하지 않지?]
“우리 곰돌이, 잘 기다리고 있었어?”
당황스러운 마음에 핸드폰만 뚫어지게 내려다보고 있던 내 시야에 익숙한 운동화가 들어왔다. 나는 어느새 내 앞에 서 있는 남궁후를 올려다봤다. 녀석은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내게 양손을 내밀고 있었다. 정확히는, 양손에 쥐고 있는 풍선을 내밀고 있었다.
“풍선 사 왔다, 진….”
그러나 남궁후의 말은 커다란 외침으로 끊겼다.
“김! 진! 호!”
나와 마주 보고 있던 후의 눈이 커지더니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나도 보려고 했으나 마침 울린 진동에 핸드폰을 켰다. 그리고 내용을 확인한 나는 설마 하는 마음으로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가 입을 떡 벌렸다.
남궁후와 풍선 다발을 구경하기 위해 몰린 사람들이 모세의 기적처럼 갈라져 만들어진 길로 내 이름을 외치며 달려오는 남궁호.
[아, 다른 얘긴 안 했는데 풍선 가져가면 좋아할 거란 얘기는 했거든ㅋㅋㅋ 사갈지도?]
녀석의 번쩍 들린 양손에는 남궁후에게 지지 않을 정도로 많은 풍선 줄이 들려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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