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형 진짜 진지하게 물어보는 건데, 여기 있는 놀이기구 다 탈 거예요?”
나는 다음 목적지로 향하는 남궁후를 잡아 세우고 다그치듯 물었다. 내가 체력이 약한 편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는데 진짜 죽을 것 같았다.
이런저런 일이 있고 늦은 점심을 먹은 후부터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한 지금까지. 정말 계속해서 놀이기구만 타고 있었다. 오전에 샀던 패스권이 모자라서 한 번 더 샀을 정도였다.
빌어먹을 패스권. 이거 때문에 중간에 쉬지도 못하고 땅에 발붙이고 있는 시간보다 허공에 떠 있던 시간이 긴 느낌이었다.
“아니! 저기 있는 것들은 안 탈 거야.”
“…저거 어린이 용이라 어차피 못 타는 건데요.”
나는 유치원생처럼 보이는 아이들이 옹기종기 줄 서 있는 것을 보고 정색하며 말했다. 녀석은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어 보이며 혀를 내밀었다. 저대로 턱을 아래서 쳐 올리면 아프겠지? 한 번 해볼까 하다 그냥 말았다. 주변을 돌아보니 해지는 것에 맞춰 조명이 켜지고 있었다. 어느새 저녁이 됐구나.
“힘들면 간식거리 사서 좀 앉아 있을까?”
자리에 서서 움직일 생각 없이 주변을 둘러보고 있는 내가 적잖이 힘들어 보였나 보다. 얄미운 표정을 지우고 제법 형 같은 얼굴을 한 남궁후가 군것질거리를 파는 곳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래, 솔직히 양심이 있으면 이쯤에서 좀 쉬어줘야지. 나는 끔찍스러운 패스권의 비어있는 동그라미 개수를 힐끔 체크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뭘 먹는 것보단 흔들리지 않고 떠다니지 않고 높은 데서 떨어질 일 없는 의자에 앉아 쉬고 싶었다.
다행히 자리도 딱 하나 남아 있었다. 나는 자리를 맡기 위해 뭘 놓을까 하다가 그냥 자리에 앉아버렸다. 딱히 놓고 갈 수 있는 것도 없었고 또 피곤한 나에게 의자가 너무 유혹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남궁후는 아예 앉아 버리는 나를 보고 눈썹을 들어 올렸다. 놀란 것 같은 반응에 왜 그러냐는 듯이 나도 같이 눈썹을 들어 올리자마자 녀석이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아니라면서 고개를 저었다.
“뭐 먹을래?”
“음….”
사실 쉬고 싶어서 온 거기 때문에 딱히 먹고 싶은 것은 없었다. 나는 조금 고민했지만 괜히 먹었다가 격한 거 타고 토하고 싶어지는 것보단 안 먹는 게 좋겠다는 결론을 냈다. 그래서 서 있는 녀석을 보기 위해 고개를 젖히고 필요 없다고 말하려는 순간 고개를 내 쪽으로 돌린 남궁후가 어딘가 신난 목소리로 먼저 물었다.
“저기 구슬 아이스크림 있다. 그거 먹을래?”
왜 신난 거지. 나 먹으라고 줘 놓고 뺏어 먹을 생각하는 건가. 설마 그럴 일은 없겠지만 갑자기 너무 신나하니 뭔가 의심이 들었다. 나는 고개를 저으려다가 녀석의 기대 어린 눈빛에 못 이겨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럼. 저는 그거 먹을래요.”
“같이 안 가?”
그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못 일어나겠다. 나를 내려다보던 녀석이 뒤를 도는 것까지 보고 나는 테이블 위로 허물어지듯 엎드렸다. 구슬 아이스크림이라. 나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옛 기억에 피식 웃었다.
그렇게 얼마간을 멍하니 허공을 보고 있었을까, 내 눈앞에 구슬 그림이 그러진 컵 하나가 놓였다.
“빨리 왔네요?”
“사람이 없더라고.”
컵을 들어 올리면서 미적미적 일어나 바로 앉으니 맞은편에 앉은 남궁후가 보였다. 녀석은 물을 마시고 있었다. 어딜 봐도 다른 걸 사 온 것 같진 않았다. 한 입만 달라 그래도 안 줘야지. 나는 구슬처럼 컵 안을 굴러다니는 동글동글한 녀석들을 한 숟가락 퍼서 입에 넣었다. 와, 진짜 신기한 식감이네.
“야 달라고 안 하니까 천천히 먹어라 천천히. 너 그거 잘못 먹으면 입 붙어버릴 수도 있다?”
“그거 참, 형이 의사인 걸 의심하게 만드는 발언이네요.”
어이없음을 담아 게슴츠레한 눈으로 봐주자 남궁후가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녹아서 붙어버린 구슬들을 뒤적거리다가 한입에 털어 넣었다. 씩 웃으며 남궁후를 향해 빈 컵을 보여주자 녀석이 코웃음을 쳤다. 재미없기는. 원했던 반응을 얻지 못한 나는 혀를 차고 컵을 테이블 위로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 컵을 한참 바라보다가 녀석을 불렀다. 형, 하고 부른 나에게 녀석은 왜, 하고 담백하게 답했다. 나는 이제 완전히 어두워진 하늘을 보면서 아까 엎드려 있을 때 결심한 대로 말했다.
“제가 너무 피곤해서요, 놀이기구 딱 두 개만 형 혼자 타고 올래요? 저는 저기 앉아 있을게요.”
내 손가락은 아까 눈여겨 봐뒀던 벤치를 가리키고 있었다. 남궁후의 고개가 그쪽을 향해 돌아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나는 녀석의 눈을 마주하면서 거절당하면 하려고 생각해 놓은 말을 준비했다. 무슨 생각에선지 녀석은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나를 빤히 보더니 씩 웃었다.
“두 개 맞아? 한 개 아니고?”
그 말에 나는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느끼며 콧바람을 내쉬었다. 진짜 뭘 아는 것처럼 구네, 저 녀석.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자연스럽게 한 쪽 손을 잡아 오는 남궁후를 한번 쳐다봐주고 쓰레기통으로 가서 구슬 아이스크림 컵을 버리려다가 숟가락만 버렸다. 그냥 쥐고 있고 싶었다. 나는 다시 벤치를 향해 걸었다. 얼마 떨어져 있지 않았던 만큼 도착은 금방이었다.
먼저 남궁후에게 잡혀 있던 손을 뺐다. 허전해진 손을 들어 비어있는 아이스크림 컵을 잡았다. 마치 수련회 촛불을 들고 있는 것처럼 빈 컵을 들고 있는 조금은 웃긴 모양새가 되었지만 괜찮았다. 나는 내 옆에서 멀뚱히 서 있는 남궁후를 향해 돌아섰다.
“다녀와요. 이왕이면 제일 높은 데서 떨어지는 걸로 두 개 타고 와요. 전 그런 건 이제 그만 타고 싶으니까, 형 혼자 타고 와요.”
남궁후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면서 나는 벤치에 앉았다. 손에 땀이 나기 시작했다. 한 손씩 번갈아 가면서 허벅지에 문지르고 있는데 갑자기 얼굴이 들렸다. 아직 내 앞에 서 있던 후가 내 턱을 잡고 올린 것이었다. 뭐 하나 싶어 가만히 있는데 녀석의 커다란 손이 내 앞머리를 넘겨주며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주었다.
“올 때 구슬 아이스크림 하나 더 사다 줘?”
내가 들고 있는 빈 컵을 보기 위해서인지 잠깐 녀석의 눈이 밑을 향했다. 나는 고개를 뒤로 물려서 턱을 쥐고 있는 녀석의 손에서 벗어나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 하긴 하나 먹었으니까. 그럼 흠… 구슬 아이스크림이랑 그거였지?”
“그게 뭔데요.”
“풍선.”
아. 오전에 했던 얘기를 말하는 거였나보다. 먹고 싶었던 구슬 아이스크림, 갖고 싶었던 풍선. 설마 아까 그래서 신났던 건가. 내가 먹고 싶다고 한 거 사줄 수 있어서?
…와, 방금 나 진짜 도끼병 걸린 애 같았다. 나는 스스로의 생각이 어이없고 부끄러워서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닌데, 맞는데. 구슬 아이스크림이랑 풍선. 두 개밖에 없었잖아.”
“아니 아니라고 고개를 저은 게 아니라요…. 아무튼 그런 게 있어요. 두 개 맞아요, 아까 말한 거.”
그게 뭐 중요한 거라고 인상까지 찌푸리며 되묻는 남궁후를 향해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치, 풍선이었지. 놀이공원, 풍선.
“올 때 풍선 하나 사와?”
나는 그 질문을 듣고 남궁후 너머의 사람들에게로 초점을 옮겼다. 인파 사이에 둥둥 떠다니는 풍선이 간간이 보였다.
“네, 사주세요. 풍선 사 와요 올 때.”
녀석의 눈을 마주치고 당당히 말했다. 뭐 사달라는 말을 이렇게 뻔뻔스럽게 한 것은 처음이었다. 남궁후는 그게 웃겼는지 하하하, 하고 소리 내서 웃더니 알겠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 다녀올게. 두 개 타고, 풍선 사서 올게.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그렇게 나는 혼자가 되었다. 남궁후의 등이 점점 멀어질수록 심하게 떨게 되는 다리를 꾹 눌렀다. 괜찮아, 나는 스물일곱살이야. 여기서 길을 잃어도 집을 못 찾아갈 나이가 아니잖아. 그리고 남궁후가 안 올 사람이 아니잖아. 그렇게 되뇌면서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길게 내쉬었다. 숨을 내쉬느라 숙인 시야에 들고 있던 아이스크림 컵이 들어왔다.
그때는 아이스크림 콘이었다. 구슬 아이스크림보다 소프트 아이스크림이 훨씬 저렴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벤치 위로 다리를 올려 두 팔로 끌어안았다. 무릎에 볼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그러자마자 옛 기억이 머릿속에 생생히 펼쳐졌다.
그날. 그와 나는 해가 질 때쯤 산책을 갔다. 나에게 풍선을 사주기 위해 우린 주변의 기념품 가게와 가판대를 돌아다녔다. 그러나 내가 사고 싶었던 모양의 풍선은 어디에도 없었다. 다른 것들은 다 있었는데 참 희한하게 내 발걸음을 멈추게 했던 모양의 풍선은 없었다.
지금이라면 그냥 있는 것 중에 아무거나 집어 들었을 텐데 그때의 나는 이왕 사달라고 한 거 마음에 들었던 것을 받고 싶었던 것 같다. 이것저것 권하는 그에게 나는 계속 고개만 저어댔다. 결국 우리는 돌고 돌아 아버지가 통화를 하고 있던 장소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더 이상 소리를 지르고 있지는 않았으나 여전히 통화 중이었다. 나는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통화가 끝나고 우리가 없는 것을 본다면 혼자 남은 것 같은 느낌이 들까 봐 조금 걱정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아까 그 풍선이 있던 곳을 다녀오자는 그의 말에 아버지를 가리키며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의 표정을 보아 통화가 금방 끝날 것 같았으므로 자리를 지키고 있고 싶었다. 그러자 내가 가리킨 대로 아버지를 한번 본 그가 머리를 헝클어트리더니 뭔가를 결심한 듯한 얼굴로 내게 비장하게 말했다.
‘그럼 진호야, 어디 가지 말고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고 있어.’
허리를 굽혀 나와 눈높이를 맞추고 말하는 그에게 나는 별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를 혼자 두고 싶지는 않았으나, 그 풍선은 가지고 싶어서였다. 그렇게 그는 내내 쥐고 있던 내 손을 놓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뱉은 말은 얼른 다녀오겠다는 약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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