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제가 왜 애한테 갔냐면요, 물론 몸이 먼저 움직여서 간 건데 그러니까 몸이 왜 먼저 움직였냐면, 왜 어른들은 보통 애들은 어리니까 잘 모를 거라고, 금방 잊을 거라고 생각하곤 하잖아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근데 우리 어렸을 때 생각해보면요, 사실 그거 아니잖아요.”
저거 지금 날 내팽개치고 아이한테 갔던 것에 대해 왜 그랬는지 변명 중인 거지…? 아무래도 후가 아무 말 없었던 것을 진호는 ‘서운할 것이다’에 대한 긍정으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당연히 설명을 안 해주니까 다는 모르더라도 초등학생 정도 되면 대충 어떤 분위기구나, 뭐 때문에 그러는구나, 저게 무슨 말이구나 알 수밖에 없고, 아니까 당연히 기억에 남고. 그죠? 저는 그냥 평범한 애였는데도 그랬으니까 똑똑했을 형은 더 그랬을 거 같은데.”
“…뭐, 비슷하지.”
사실 후는 어렸을 때부터 워낙 자타공인 똑똑한 아이여서 그런 일을 겪은 적은 없었다. 그가 알아야 할 것에 대해선 스스로가 명확한 설명을 요구하는 편이었고, 알면 안 될 것에 대해서는 어른들 쪽에서 알아서 철저히 입단속을 하는 편이었다. 그래서 주변엔 진호가 말한 것처럼 무방비하게 행동했던 사람은 없었지만 보통의 아이에게 보통의 어른들이 어떻게 하는지는 알고 있었으므로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거 생각하면 아까 그런 일은, 꽤 오래 마음을 불편하게 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거기다 어떻게 보면 자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일에 어른들이 몸싸움까지 하려고 들었으니까…, 만약 그걸 그대로 보게 되면 어쩌면 평생 잊히지 않는 기억이 되어버릴 수도 있겠다,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럼 그 아이도 놀이공원을 싫어하게 될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 들어서 가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마지막 말은 지척에서 귀를 기울이고 있던 후도 간신히 들었을 정도로 작았다. 들으라고 한 것보단 자조적인 혼잣말이었던 것 같아 캐묻고 싶은 것이 많은 말이었음에도 후는 입을 다물었다.
씁쓸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쓰다듬어 줘야 하나 싶어 손을 올리려는 순간 진호가 다시 힘차게 고개를 들었다.
“뒤늦게 눈 가려준다고 그전에 본 게 잊히고 그런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제가 옛날에 받았던 느낌이라도 느끼게 해주고 싶었어요. 다르거든요. 그 상황에 그냥 내던져진 것 같은 느낌이랑 그래도 나를 보호하기 위한 손길이, 누군가가 있구나, 하는 느낌이랑.”
후는 하마터면 쓰다듬는 게 아니라 뒤통수랑 하이파이브를 할 뻔했던 손을 뒤로 물렸다. 허공에서 어정쩡하게 머물고 있는 그의 손을 보면서 진호가 눈썹을 모았다. 또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머리를 뒤로 물리며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는 것을 보니 헛웃음이 나왔다. 후는 물렸던 손을 뻗어 진호의 정수리에 올려놓고 혼자 쓸데없는 생각을 못 하도록 질문을 던졌다.
“마지막에 애한테 그렇게 말한 것도 그래서야? 네가 느꼈던 느낌을 느끼게 해주고 싶어서?”
“어…아뇨. 그건…형도 봤는지 모르겠는데 그 애 계속 주눅이 들어있더라고요. 이건 아닌데 싶어서 생각하다가 제가 그런 상황이었을 때 듣고 싶었던 말을 해주면 괜찮아질까 하는 마음에 냅다 지른 거였어요.”
진호가 민망하다는 듯이 웃었다. 운이 좋게 꽤나 유용한 정보를 얻었다. 그러니까 그게 진호가 듣고 싶은 말이었다는 거지…. 후는 아까 진호가 아이에게 했던 말을 곱씹으면서 진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잘했어. 그 전에 표정은 못 보긴 했는데 너랑 얘기하고 난 후에 확실히 엄청 밝아진 건 알겠더라.”
그러면서 시계를 확인하는데, 제법 시간이 지나있었다. 토네이도가 아니라 밥부터 먼저 먹어야 할 것 같다. 후는 머리에 있던 손을 내려 진호에게 어깨동무를 했다. 이야기가 대충 끝난 것 같으니 식당을 향해 출발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진호는 아직 끝나지 않았었는지 걸음을 옮기면서 말을 이었다.
“아무튼 그래서 그런 거니까 너무 서운해하지 말라는 말이었어요.”
그러고 보니 이 이야기는 진호가 한 행동에 대해 변명하기 위해 시작한 것이었다. 후는 일방적으로 서운해하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을 상기하면서 인상을 찌푸렸다.
“네 얘기 듣느라 말할 타이밍을 놓쳐서 말을 못 했는데, 다른 건 몰라도 그 오해는 좀 풀고 가자. 나 하나도 안 서운했어. 그게 왜 서운해, 애 챙긴 건 오히려 잘한 일이지.”
“…잘한 일인 거, 머리로는 알아도 마음이 안 그럴 때 있잖아요.”
이쯤 되면 진호는 그냥 그가 서운해한다고 믿고 싶은 거 아닐까. 후는 식당을 찾아 두리번거리던 것을 멈추고 진호를 내려다봤다. 눈길을 느낀 건지 앞을 보고 걷던 진호도 힐끔 곁눈으로 그를 봤다.
“진짜 하나도 안 서운해. 그때 진심으로 짜증 난 상태여서 다른 감정 느낄 여력이 없었어, 나. 오히려 네 모습을 보고 내 성격대로 하려던 걸 참았으니까 칭찬을 받아야지. 너도 우리 대학 다녔으면 내가 정한 타겟한테 어떻게까지 하는지 알잖아. 네가 그거 막은 거야.”
물론 아무것도 안 하진 않았지만. 후는 생각난 김에 주머니를 한번 토닥이며 지갑을 확인했다. 당연히 지갑은 아주 잘 있었다. 밥 먹고 화장실 한 번 가야겠다.
“엄밀히 말하면 제가 막은 게 아니라 형이 절 생각해서 잘 참아준 거 아니에요? 제가 형한테 고마워해야죠. 그렇게 다른 감정이 들지 않을 정도로 짜증이 나는데도 저 때문에 참고 그 아저씨한테 져준 거잖아요. 아무래도 이건 제가 형한테 죄송할 일이 맞는.….”
“그만. 아니야, 그거 아니야.”
후는 듣자 듣자 하니까 점점 삼천포로 빠지는 진호의 자아비판에 결국 걸음을 멈췄다. 이대로 뒀다간 아주 땅 파고 들어갈 기세였다. 마음 같아선 저 사고방식 자체를 좀 어떻게 하고 싶었지만 지금 그걸 하기엔 장소고 시간이고 적절하지가 못했다. 근데 그렇다고 저 죄송하다는 소리를 계속 듣고 있자니 답답하고 안쓰러워 죽을 것 같아서 후는 진호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너. 이제 죄송하다는 말 금지. 한 번 할 때마다 키스 오분이야.”
“…예?”
후의 특단의 조치를 듣고 진호는 인상을 찌푸리더니 다시 걷기 시작한 후를 따라 걸으면서 따지듯 말했다.
“아니 제가 죄송한 마음에 죄송하다고 하는 건데…!”
“십분.”
“아니 이건 죄송하다고 한 게 아니라 항의를!”
“십오분.”
점점 늘어나는 시간에 진호는 입을 꾹 닫고 자리에 멈춰 섰다. 후는 오지 않고 버티는 것으로 불만을 표시하는 진호를 따라 걸음을 멈추고 팔을 잡고 있던 손을 내려 깍지를 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손등을 쓸면서 부드럽게 잡아당기자 진호가 못 이긴 척 걷기 시작했다. 물론 얼굴엔 아직도 불만이 가득했다.
“잘못한 사람이 사과하는 건 당연한 건데….”
“너는 지금 사과할 것도 없는데 사과할 거리를 만들어서 사과하고 있으니까 그러지.”
“아니거든요!”
“아니긴…. 맞거든?
다소 무거웠던 후와 진호의 대화는 금세 가벼운 실랑이가 되었다. 후는 분한 얼굴로 씩씩대는 진호를 보며 이 표정 보겠다고 던진 말이 이렇게 길어질 거라고 누가 알았겠냐는 생각을 하면서 한숨을 삼켰다.
새빈에게 받은 메시지에 ‘자기애가 심히 부족함’이라고 적혀있던 것을 이제야 온전히 이해했다. 입을 비죽이면서 터덜터덜 걷는 진호를 보며 후도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그들에게 공유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근데 그 전에, 일단 얘 밥부터 먹이고.
“이제 방금 있었던 일은 잊어. 재밌게 노는데 하등 쓸모없는 기억이니까 아예 지워버려. 그리고 배 채우는 거에 집중하자. 저녁 늦게까지 놀려면 밥을 잘 챙겨 먹어야 해.”
후는 다시 텐션을 높이기 위해 밥 먹이고 디저트까지 푸짐하게 먹여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점점 가까워지는 건물 두 개를 순서대로 가리켰다.
“저기는 양식인 거 같고, 그 앞엔 한식 파는 것 같은데 어디 갈래?”
진호는 아직도 완전히 납득하지 못한 얼굴을 했지만 그 역시 더 언급해봤자 좋을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조그맣게 알았다고 중얼거리면서 그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건물이 몇 걸음 남지 않을 때까지 고민하던 진호는 결국 가장 무난한 답을 내놨다.
“아무거나 괜찮아요.”
앞의 일로 인내심의 한계에 다다른 후는 두 번 묻지 않았다.
“그럼 한식.”
진호는 그 단호함에 조금 놀란 듯했지만 딱히 불만은 없는 것 같았다. 후는 식당으로 걸으면서 나머지 놈들에게 보낼 메시지 내용을 정했다.
‘착하기가 마치 호구와 같으므로 적절한 제재가 필요함.’
직설적이면서도 다소 불친절한 정보였지만 후는 이렇게만 보내도 그놈들이라면 진호랑 지내면서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을 거라는 것을 알았다.
* * *
‘진호야.’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와 함께 귀에 따뜻한 것이 닿았다. 고개를 젖혀서 위를 보니 그가 고개를 숙여 나를 보고 있었다. 내 귀를 덮고 있는 것은 그의 손이었다.
‘우리 산책하고 올까?’
웃으면서 속삭이는 그 말에 물끄러미 그를 살폈다. 왜 갑자기 산책을 가자고 하는 걸까, 아버지의 통화가 끝나길 기다려야 하는 거 아닌가. 나는 몇 가지 떠오른 질문 중에 뭘 먼저 물어야 하나 생각하면서 다시 정면을 보기 위해 고개를 바로 했다. 아버지는 여전히 통화 중이었다. 귀를 막고 있는 손 때문에 아까보단 작았지만,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서 소리치고 있어서 내용을 알 수 있을 정도로는 들렸다.
‘이기적으로 굴지 마.’
‘내일은 네가 데리고 있기로 한 날이잖아.’
‘자꾸 이러면 계약 위반이야.’
아버지가 화를 내고 있는 대상은 엄마였다. 나는 머리가 아픈지 관자놀이를 누르며 한숨을 뱉는 아버지를 보면서 이 통화가 더 길어질 것을 예상했다. 보통 그랬다. 아버지가 소리치는 날에는 다툼이 길어졌고, 한숨까지 쉬는 날에는 하루가 지나도록 이어지기도 했다.
그래도 오늘은 조금은 특별한 날이니까 다른 때보단 일찍 끝났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괜히 옷자락을 만지작거리는데, 소리가 더 작아졌다. 나는 내 귀를 누르는 힘이 강해진 것을 깨닫고 고개를 젖혀 그를 보았다. 다시 올려다본 그는 여전히 웃고 있었으나 입 꼬리가 부들거리는 것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이 보였다.
‘있잖아 진호야, 어른들이 미안해. 우리가 미안해.’
귀가 막힌 덕분에 웅웅거리는 소리로 들렸지만 그는 분명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저 풍선 사주세요.’
그 순간 내 볼 위로 차가운 물방울 하나가 톡 떨어졌다. 주르륵 흐르는 느낌에 손을 들어 닦으려는데 그의 손이 먼저 닿았다. 내 얼굴을 한번 쓸어내린 손이 내 손을 꼭 잡았다. 나는 갑자기 커진 소리들 사이에 섞인 아버지의 목소리를 뒤로 하고 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아버지와 달리 그는 천천히 걸었기 때문에 나도 내 보폭대로 걸어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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