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후의 고갯짓에 시선을 옮겼던 남자는 다시 고개를 돌려 후를 매섭게 노려보더니 내키지 않는다는 듯이 거칠게 멱살을 놓았다. 거의 밀치듯이 내팽개친 덕분에 뒤로 밀릴 뻔한 후는 치미는 짜증을 삭히기 위해 이를 악물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옆에 호가 있었다면 분명 낄낄대면서 놀렸을 광경이었다. 그래도 그가 있었다면 참을 필요도 없이 그냥 이 아저씨 인생 좆되게 해주는 건데, 오늘 후의 옆에는 호가 아니라 진호가 있었다. 그것도 굉장히 어쩔 줄 모르겠단 얼굴을 하고.
“학생도 아닌 것 같은 놈이 교복 입고 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어. 재수가 없으려니까 별….”
후는 아이의 팔을 잡아당겨 자리에 세우면서도 끝까지 투덜대는 남자를 보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하, 진짜 계속 사람 성질 건드네 이 아저씨. 그래, 어차피 앞에서 대놓고 엿 먹이는 건 그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진호가 걸리니 지금 당장은 참아 넘겨주더라도 아예 아무것도 안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상기한 후는 남자의 뒷주머니에 꽂혀있는 지갑과 앞주머니에서 삐져나온 핸드폰을 보면서 입꼬리를 올렸다. 마침 주먹다툼이 일어날까 봐 슬쩍 물러났던 사람들도 흥미를 잃고 다시 빽빽이 자리를 잡고 선 참이었다.
이쪽을 보는 사람은커녕 어느 각도로 봐도 사람 등이나 머리밖에 보이지 않을 거라는 걸 체크한 후는 진호를 확인했다. 사람들에게 밀려 어느새 후의 옆에 찰싹 붙어 선 진호는 한껏 인상을 찌푸리고 남자와 아이를 보고 있었다.
진호가 자신을 보고 있지 않다는 것까지 확인한 후는 손을 움직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진호가 갑작스레 움직였다. 흠칫 놀란 후가 뻗던 손을 멈추고 옆을 보니 진호는 아이의 어깨를 두드리고 있었다. 긴장한 것이 무색하게 진호가 남자와 아이의 시선을 끌어 줘서 오히려 그를 도와주는 모양새가 되었다. 후는 운이 좋다는 생각과 함께 멈춰있던 손을 움직이면서 진호가 뭘 하려고 저러나 귀를 기울였다.
“있지, 걱정 안 해도 돼. 아까 너희 아버지랑 여기 형이 기분이 잠깐 안 좋아서 그런 거지, 진짜 싸운 거 아니었어. 그…원래 이런 건 앞에서 보고 싶은 게 당연한 거라 가끔 이런 일 있으니까 신경 쓰지 마. 이제 우리 다 화 풀렸고, 기분도 좋아. 진짜야. 그러니까 걱정 말고 퍼레이드 봐.”
소리에 묻혀 안 들릴 것 같았는지 허리를 굽혀서 아이와 눈을 맞추고 말하는 모습이 제법 어른 같았다. 아이는 진호의 웃는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가 머뭇거리면서 후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미 목적한 바를 이루고 난 후였던 그는 주머니에 손을 꽂고 삐딱한 자세로 서 있던 중이었다. 별생각 없이 아이의 눈을 마주한 후는 다리를 툭 치는 느낌에 진호를 봤다. 그는 매우 험악한 얼굴을 하고 입 모양만으로 뭔가 말하고 있었다. 그게 ‘웃어요.’라는 말인 것을 눈치챈 후는 활짝 웃어 보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다음 아이와 진호의 시선이 향한 곳은 당연하게도 남자였다. 남자의 뒤에 서 있던 후는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고개를 끄덕거리는 것으로 보아 남자 역시 진호의 매서운 눈빛을 이기지 못하고 장단을 맞춘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진호를 본 아이는 그때까지 무표정했던 얼굴을 풀고 작게 웃더니 퍼레이드가 진행되고 있는 곳을 향해 몸을 돌렸다. 이쯤에서 또 헛소리를 투덜댈 것 같았던 남자는 끝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진호는 아이의 뒤통수를 가만히 보고 있다가 남자에게 눈인사를 하고 후의 팔을 잡아당겼다. 하고 싶은 거 다 했나 보네. 후는 자기 팔을 잡고 사람 사이를 비집으려는 진호를 잡아당겨 감싸 안고 어깨로 사람들을 헤쳤다. 물론 그사이에 진호 몰래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남자의 핸드폰을 액정이 바닥을 향하도록 떨어트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후는 확실히 하기 위해 떨어진 핸드폰을 사람들 발 사이의 빈 공간으로 찼다. 그는 발에 차인 핸드폰이 어딘가로 날아가 사라지는 것을 보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지갑은 혹시 운이 좋아서 다시 주울 수도 있으니 화장실 쓰레기통에 버릴 예정이었다.
멱살까지 잡혀줬는데 겨우 이 정도로 끝내고, 나도 진짜 착해졌다. 후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 자리에 멈춰 섰다. 인파를 빠져나오자마자 그를 잡아당기는 힘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까 아이한테 한 것도 그렇고 시종일관 말리려던 태도를 봐선 잔소리를 하기 위함인 것 같았다.
후는 벌써부터 조금 억울했지만,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그럴 수도 있다고 되새기며 진호의 말을 기다렸다. 그리고 들린 말은 그의 예상을 보기 좋게 벗어났다.
“멋있었어요, 형. 속 시원했어요.”
적당히 들어주다가 길어지면 그냥 끌고 가서 토네이도나 태워야겠다고 생각하던 후는 눈을 크게 뜨고 진호를 내려다봤다. 진호는 그의 얼굴을 힐끔 보더니 민망한 듯 눈을 피하며 말했다.
“그 표정은 뭐예요. 이상한 말한 것도 아닌데.”
“어…아니, 좀 참지 그랬냐고 잔소리할 줄 알았는데 의외여서.”
후의 대답에 그를 한 번 올려다본 진호는 그의 팔을 잡아끌며 다시 걷기 시작했다. 고개를 팩 돌리고 앞을 보며 말하는 것을 보니 마주보고 말하기 민망해서 그런 것 같았다.
“그 아저씨가 못되게 말했잖아요. 열받는 게 당연하죠. 저도 짜증 나서 한 마디 해주고 싶었는데, 저는 이상하게 그런 상황에 닥치면 막 심장이 두근거리면서 말문이 턱 막히고 얼굴 빨개지고 그래서 말을 잘 못하겠더라고요. 괜히 횡설수설하게 되고, 더 문제 일으킬까 봐 착한 척하게 되고.”
일부러 참는 것이 아닌 이상에야 하고 싶은 말을 안 하고 살아본 적이 없던 후로서는 겪어본 적 없는 일이었지만, 진호 같은 타입이 꽤 있다는 것은 안다. 보통 이런 타입은, 일이 다 끝나고 나서야 하고 싶었던 말이 떠오른다 그랬던 거 같은데.
“막상 당하고 있을 땐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저자세로 말하고, 꼭 자기 전에야 따지는 말들이 생각나서 혼자 이불 차고 그런다니까요. 오늘은 형이 그래도 사이다 역할 해줘서 좀 덜 그럴 거 같긴 하지만. 아무튼 아까 그 아저씨는 진짜 한마디 들을 만했어요.”
후는 허공에 주먹질을 하면서 자기도 솔직히 한 대 쥐어박고 싶을 정도였다고 열받아하는 진호를 보면서 피식 웃었다. 아까 태도를 봐선 착하거나 호구 같거나 둘 중 하나라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화를 낼 줄은 아나보다 싶었다. 어쩐지 다행이라고 생각한 후는 아까와 너무 다른 태도로 씩씩거리며 화를 내는 진호를 조금 놀려주고 싶어졌다.
“나는 네가 또 그 와중에 애까지 살뜰히 챙기길래 이렇게 착해서 세상 어떻게 살아가려고 하나 했는데, 화도 낼 줄 알아 우리 곰돌이? 기특한데?”
비어있는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일부러 더 얄밉게 얘기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성큼성큼 걸어가던 진호가 우뚝 멈춰 섰다. 후는 욱해서 소리치는 진호를 기대하며 돌아서는 그를 향해 능글맞은 미소를 지어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돌아본 진호는 분하다는 얼굴이 아니었다.
“어, 그건…… 죄송해요. 아저씨가 형 멱살 잡는 거 말리려는데, 애가 놀라는 게 보여서요. 그런 장면을 보게 하는 건 아닌 거 같아서, 그래서 저도 모르게 몸이 먼저 나갔어요.”
후는 시무룩해진 진호를 보며 당황스러운 마음에 머리를 긁적였다. 장난으로 던진 돌에 개구리가 맞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냥 한 말인데 뭐가 또 죄송하고 그래.”
“형이랑 같이 따지기는커녕 멱살 잡힌 거 보면서도 아저씨 안 말리고 떨어져 있었잖아요. 마치 남 일인 것처럼….”
진호는 말을 흐리면서 고개를 숙였다. 곰돌이, 곰돌이 했다고 진짜 곰인형이 되어버린 건가. 다 큰 남자애가 왜 이렇게 말랑해, 속에 솜 들어차 있는 것처럼. 그 정도 일에 저렇게 시무룩해진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으면서도 후는 기껏 올려놓은 진호의 텐션을 이런 식으로 다운시키고 싶진 않았기 때문에 황급하게 그의 말을 부정했다.
“내가 진짜 맞은 것도 아니고 뭘 그렇게 미안해하냐. 어차피 그런 사람들은 원래 행동만 그렇지 보통 진짜로 때리진 못 해.”
그렇게 말해도 진호는 계속 아래만 보고 있었다. 후는 한숨을 쉬면서 진호의 손을 그의 팔에 가져다 댔다. 그의 돌발행동에 그제야 진호가 눈을 크게 뜨면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봐. 돌덩이지? 키랑 덩치도 내가 훨씬 컸고 나 어렸을 때부터 운동해서 일부러 엿 먹이려고 맞아줄 때는 있어도 진짜 맞고 다닌 적 없어. 그런 상황에서 네가 같이 말려줘야 할 만큼 약하지 않아.”
“…단단하긴 하네요. 근데 형이 센 건 센 거고, 사람들 사이에서 아저씨가 그렇게 막 몰아붙이는데 혼자 뒀잖아요. 일행으로서 형 옆에서 편들어줘야 했던 건데 홀랑 애한테 가버린 거니까. 입장 바꿔서 생각하면 좀 서운했을 것 같아서, 그래서 죄송한 것도 있는데요.”
후는 다시 고개를 숙이는 진호를 보며 또 한숨을 쉬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겠는데, 그게 왜 그렇게 결론이 나는지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는 사고방식이었다.
사람들이 숙덕대고 누군가가 공격적으로 나오는 상황에 같이 맞서주지 않은 것에 대해서 서운해 할 수도 있다는 건 그럴 수도 있다고 치자. 그러나 진호가 그 남자의 역성을 든 것도 아니고 어른들끼리 싸움이 나는 바람에 내팽개쳐져 있던 아이를 챙겨주기 위해서 그런 건데, 그걸 가지고 다 큰 어른이 서운하다 투정 부리면 그건 그 어른이 정신 차릴 일이지 진호가 사과할 일은 아니었다.
후는 속이 꽉 막힌 것 같은 답답한 마음에 소리를 지르고 싶은 것을 참으면서 말을 골랐다. 내가 초딩이냐, 도 아니고. 너 멍청이냐도 아닌데. 후가 이마를 짚으며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데, 그 침묵을 또 뭐라고 생각했는지 진호가 어물어물 말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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