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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호 이야기-77화 (77/234)

77화

진호의 웃는 모습이 찍혔는지 확인하려던 후는 사람들을 힐끔거리면서 그의 뒤로 가서 서는 진호를 보고 자세를 바로 했다. 핸드폰을 채가는데도 계속 멍 때리고 있어 불안했는데 새로운 사진들로 갤러리가 가득 찬 것으로 보아 제대로 찍긴 한 것 같았다.

자세한 건 나중에 확인하지 뭐. 좀 주목받을 짓을 하긴 했지만 너무 대놓고 숙덕대는 분위기였다. 후는 사람들로부터 진호를 가려주면서 여학생을 향해 삐딱하게 물었다. 당연하게도 여학생은 마음을 바꾼 상태였다.

후는 자꾸 제 등 뒤로 시선을 주면서 어딘가 아쉬운 기색을 보이는 학생에게 입 모양으로 ‘이제 가라 좀’ 하고 말하면서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도 꿋꿋이 진호의 대답을 기다리던 학생은 후가 퉁명스럽게 답을 전달하자마자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파이팅 넘치는 포즈와 함께 행복하시라고 말하면서 멀어졌다.

“그게 무슨 소리……?”

후의 마음엔 쏙 들었던 소리가 진호에겐 영문 모를 소리였는지 눈만 빼꼼 내놓고 학생을 바라보는 것이 꽤나 귀여웠다.

후는 시간을 확인하고 다시 진호에게 시선을 옮겼다. 사실 후는 당연히 놀이공원이 닫을 때까지 놀다 갈 예정이었다. 밤이 되면 어두워지긴 하겠지만 워낙 조명이 번쩍번쩍하는 곳이니 그렇게 어둡다는 생각이 들지도 않을 거고, 폐쇄된 공간은 더더욱 아니기 때문에 문제가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장소 자체가 진호를 불안하게 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왜인지 몰라도 어두운 것을 싫어하는 녀석인데, 긴장된 곳에서 맞는 밤은 그의 정신 건강에 그다지 좋을 것 같진 않았다. 그렇다고 적당히 놀다 가는 것은 후의 스타일이 아니어서 좀 아쉬웠다.

고민 끝에 후는 아직도 여학생들을 보는 진호를 끌어다 마주 세우고 말하면서 그의 표정을 기민하게 살폈다. 진호가 난처해하는 기색이면 아쉽지만 오늘은 해지기 전에 귀가할 생각이었다.

거절할 것만 같은 표정을 지은 진호는 꽤나 오랜 시간 어딘가를 응시했다. 이리저리 움직이는 눈동자를 보며 뭘 그렇게 볼까, 생각하면서도 후는 그 시선을 따라가기보단 가만히 진호만 보고 있었다. 상념에 빠진 그를 자극하고 싶지 않았다.

얼마를 기다렸을까, 진호는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중얼거렸다.

“괜찮을 거야.”

그러더니 후를 힐끔 보고 입술을 비죽이며 정상적인 포즈면 찍어주겠다고 조건을 걸어왔다. 후는 그 퉁명스러움에 짓궂음으로 맞받아치며 걸음을 늦췄다. 종종걸음으로 쫓아오는 것이 귀여워서 일부러 더 빨리 걸었던 건데, 뭔가 굉장한 용기를 낸 것 같은 이 순간엔 조금이라도 불안한 마음이 들게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이거 안전바 다 내려온 거 맞아? 아닌 거 같은데…진짜 아닌데 이거….”

“응? 왜, 뭐 문제 있어? 못 탈 거 같으면 사람 불러줄까? 아까 어떤 ‘애기’도 손들고 내리더라고. 정 무서워서 못 참겠으면 손 들어줄게.”

“…아니거든요? 그냥 안전바가 좀 헐거운 거 같아서 그러지 하나도 안 무섭거든요. 전혀괜찮거든요.”

다리 떨면서 허세는. 후는 전혀 괜찮다는 말은 어느 나라 문법이냐고 물어보려다가 담담한 척하는 모습에 웃음이 터질 것 같아 고개를 돌렸다. 진짜 미치겠네.

“흐으으읍!”

“푸하하하하”

후는 떨어지자마자 숨을 들이켜며 경악으로 물드는 얼굴을 보고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아 너무 재밌는데. 타기 직전까지 자긴 아무렇지도 않은 척 허세를 부리는 모습에서부터 저렇게 미친 듯이 무서워하는 얼굴까지 무엇 하나 웃기지 않은 게 없었다.

솔직히 후는 진호가 놀이 기구를 진짜 잘 탈까 봐 내심 걱정했다. 기구의 스릴만으로도 재밌긴 하지만 그거야 한두 번 타면 별 감흥도 없어지는 거고, 후에게 있어 놀이 기구의 최대 묘미는 못 타는 사람을 살살 긁어 놀이 기구에 타게 만들고, 그 반응을 구경하는 것이었다. 특히 진호처럼 저렇게 자존심 세우는 애들은 더욱더 놀려먹는 재미가 있는 법이다.

“다음엔 저거!”

비틀대는 진호가 다른 데로 새지 않게 어깨를 꽉 끌어안고 슬렁슬렁 걸어가던 후가 어딘가를 가리켰다.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돌린 진호가 주먹을 꼭 쥐고 이를 악물며 말했다.

“…아니, 배를 왜…저러라고 발명된 게 아닐 텐데 도대체 왜….”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는 진호를 보면서 숨죽여 큭큭대던 후는 헛기침으로 웃음기를 날리고 능청스럽게 말했다.

“저기 초등학생들 단체로 가네. 저거 별로 안 무섭다더니 진짠가 보다. 아아, 재미없겠는데.”

“아 그래요? 그럼 우리 저건 타지 말…!”

“근데 또 왔으니까 안 타긴 뭐하잖아, 그치? 무슨 말인지 알지? 그냥 쉬어가는 느낌으로 타자.”

“…그죠. 왔으니까 안 타긴 뭐하다는 게 뭔 말인지 존나 모르겠지만…쉬는 느낌이겠죠….”

씨발. 자기 딴에는 그 마지막 욕을 매우 작게 말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바로 옆에 있는 후에겐 너무나 잘 들렸다. 이는 바득바득 갈리고, 꽉 쥔 주먹은 부들거리고 있었다.

후는 그렇게 싫으면 그냥 무섭다고 하지 뭘 저렇게 버틸까 싶으면서도, 다 알면서 딱 자존심 세울 정도로만 적당히 살살 긁는 스스로의 성격이 참 나쁘다는 생각을 했다. 근데 어쩌겠어. 이렇게 재밌는데. 그래도 아무것도 안 할 때는 중간중간 눈에 보이게 기분이 다운되는 모습을 보이던 진호였는데, 지금은 그런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후는 이게 바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것 아니겠냐면서 어떤 미친놈이 이딴 걸 만드는지 정말 이해가 안 간다고 궁시렁대는 진호와 놀이기구 입구를 향해 걸었다.

그렇게 몇 개를 더 탔을까, 진호는 도저히 못 하겠다고 생각했는지 다음엔 뭘 탈까 두리번거리며 걷는 후를 멈춰 세웠다. 퍼레이드를 보러 가자는 말에 버텨볼까 생각하던 그는 온몸의 무게를 실어 잡아당기는 모습이 귀여워 못 이기는 척 끌려가 주었다.

“와아, 요정님 너무 예쁘시다. 와, 저기 왕자님도 있다. 헐! 캐릭터 너무 귀엽다.”

퍼레이드 같은 걸 볼 생각이 전혀 없던 후는 당연히 진호만 보고 있었다. 저렇게 하느니 그냥 조용히 있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어설프게 연기를 하는 모습이 참 볼만했다. 많아진 사람들한테 치여서 점점 그에게 붙어오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후는 곁눈으로 늘어선 행렬이 얼마나 남았나 확인하면서 다음엔 어떤 놀이 기구를 타야 더 다이나믹한 표정을 보여 줄까 머리를 굴렸다.

하나 정도 타고 밥을 먹여야 할 것 같은데. 밥을 먹이고 나선 토할 수도 있어서 소화될 때까진 나름대로 얌전한 것을 탈 예정이었기에 이번 것이 매우 중요했다. 역시 아까 눈여겨봤던 토네이도가 좋을 것 같다는 결론이 설 때쯤, 감탄사 래퍼토리가 떨어졌는지 진호가 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가 뭔가 말하려고 입을 벌린 순간, 불청객이 끼어들었다.

“아까부터 보니까 퍼레이드엔 관심 없으신 것 같은데, 좀 나와주시죠? 다 큰 사람들이 앞에 있으니까 애들한테 안 보이잖아요.”

그 말에 후는 아이를 한 번 확인하고 다시 남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말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이 있던 사람들이 그들을 힐끔대는 것이 느껴졌다. 이건 또 무슨 경우야.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처음엔 진호를 향해 말하던 남자는 후의 삐딱한 눈빛을 느꼈는지 한껏 인상을 찌푸린 채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렇게 기싸움을 하느라 찾아온 침묵을 깬 건 잔뜩 당황한 진호였다.

“그게, 저희가 관심이 없는 건 아니고 재밌게 보고 있긴 했는데요, 아니 일단은 꼬마야 앞으로 올래? 여기는 좀 보이려나? 어차피 저희 이제 슬슬 갈까 했거든요. 그래도 나름 뒤에서 본다고 봤는데 그래도 저희 때문에 애가 못 봤나 봐요. 죄송해요.”

조금 상기된 톤으로 말을 시작한 진호는 자기 앞을 가리키면서 아이에게 오라고 하다가 또 남자를 향해 사과를 하는 등 두서없이 굴었다. 사람들 사이에 있어 동작이 크진 않았지만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며 허둥지둥하는 모습도 보였다. 유연한 대처는 아니었지만 누가 봐도 분란이 일어나는 것을 막고 싶어 하는 모습이었다.

대뜸 삐딱하게 나오는 말을 그대로 듣고 넘기는 성격은 아닌지라 한마디 하려고 했던 후는 그런 진호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래, 별일도 아닌데 참고 그냥 가자. 그는 그렇게 되뇌면서 자리를 옮기기 위해 진호의 팔을 잡았다.

맹세컨대, 남자가 다음 말을 하지 않았다면 정말 그럴 예정이었다.

“됐고요, 가려고 하신 거면 얼른 나오세요. 쓸데없이 말 길게 하지 마시고.”

“아…하하, 제가 말을 길게 하려고 한 건 아닌데….”

남자는 진호를 치워버리듯 밀면서 그렇게 얘기했다. 진호는 조금 기분이 상해 보였지만 부드럽게 넘어가려는 듯 머쓱하게 웃으며 자리를 내어 주었다. 그 행태를 본 후는 결국 짜증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아저씨 말 진짜 듣는 사람 기분 좆같이 하시네요.”

“…형?”

시끄러운 와중에도 선명하게 들릴 만큼 큰 목소리로 뱉은 비난에 남자가 놀란 눈을 하고 후를 돌아봤다. 진호도 적잖이 놀랐는지 황망한 투로 그를 불렀다. 그러나 후는 이제 시작이었다.

“우리가 뒤에 있다가 사람 밀어가면서 앞으로 온 것도 아니고, 이 자리가 그렇게 애들 시야 가린다 뭐다 할 정도로 앞자리인 것도 아닌데 왜 이딴 얘길 듣고 있어야 하는 건지 진짜 이해가 하나도 안 가는데 어떻게 생각해요, 아저씨?”

“뭐…?”

“말 몇 마디 듣고 우리가 관심이 있네, 없네 혼자 결론 내린 것도 웃기지만 그건 일단 차치하고, 설사 관심이 없다고 쳐도 우리가 댁보다 앞에 서 있었단 얘기는 우리가 먼저 왔다는 거겠죠? 관심 없는 우리보다 늦게 오니까 당연히 안 보일 정도로 먼 자리에 서신 거 아닌가 싶은데.”

점점 길어지는 실랑이에 주변에선 이미 그들을 보면서 수군거리고 있었고, 본인한테 시선이 몰려서인지 아니면 상황 자체에 열받은 건지 남자의 얼굴은 터질 듯이 빨개졌다. 그럼에도 이미 스위치가 켜진 후는 그러거나 말거나 한쪽 입꼬리만 올린 채 말을 이었다.

“애초에 애한테 그렇게 탁 트인 시야를 제공해 주고 싶었으면 일찍 와서 자리를 맡아 놓으시던가, 그게 아니면 얌전히 자기 자리에서 봐야지. 그것도 아니고 남이 부지런히 와서 잡은 자리가 탐이 나셨으면 ‘정중히’ 부탁을 하는 게 맞지 않을까? 대뜸 인성질을 할 게 아니라.”

“뭐? 너 말 다 했어?! 이게 듣자 듣자 하니까 어린 녀석이!”

“…어어! 아, 아저씨 이건 놓고!”

분을 이기지 못한 남자는 결국 후의 멱살을 잡았고, 놀란 사람들은 몇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며 보고 있던 진호가 황급히 남자를 말리려고 달려들었으나 정작 멱살이 잡힌 후는 더 짙게 웃을 뿐이었다. 진호를 봐서 적당히 사과만 받고 끝내려고 했으나 아무래도 눈앞의 남자는 그럴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래, 짜증 나게 한 사람 인생 시궁창 만드는 것만큼 자극적인 놀잇거리가 없지. 이대로 남자가 그를 한 대라도 때린다면 장담하건대 그 몇 배로 남자의 인생을 피곤하게 만들어줄 자신이 있었다.

그렇게 짜증을 풀 계획을 세우면서 이 장면을 찍고 있는 핸드폰 개수와 그걸 들고 있는 사람들의 인상착의를 확인하던 후의 시야에 진호가 걸렸다.

너는 또 왜 거기서 그러고 있냐. 후는 자기와 눈을 마주친 진호의 모습을 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그래, 알겠다, 알겠어.

“아저씨, 놔요.”

“뭐 이 새끼야? 놓긴 뭘…!”

“안 놓으면, 애한테 사람 때리는 거 보여주려고? 나는 상관없는데, 당신 애랑 내 애는 아닌 거 같으니까 놔 빨리. 힘으로 내치기 전에.”

그러면서 후는 아이 뒤에 서서 눈을 가려주고 있는 진호를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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