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멍한 표정과 다르게 한껏 벌려진 팔을 보는데 가슴이 뭉클했다. 태도만 봐서는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걸로 보였는데 제대로 다 듣고 있었나 보다. 뭔가 따뜻한 느낌이 드는 가슴께를 문지르며 나는 고개를 저었다. 감동받은 거랑 안기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괜찮아요. 이 정도는 기분 안 좋아질 정도의 얘기도 아니고, 아까부터 형이 하도 주물럭거려서 팔은 뜨거워진 것 같기도 하고요.”
거기다 아까 말은 안 했지만 정새빈을 안고 있을 때 밑으로 슬금슬금 내려가는 손이 다 느껴졌다. 쟤한테 다시 안기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데 내가 자진해서 저 품으로 걸어갈 이유는 없지. 조금 울적해진 마음은 나중에 핫팩이라도 끌어안고 이불 덮으면 달래질 일이었다.
“…까비.”
무미건조하게 중얼거린 정새빈은 허공에 있던 팔을 그대로 더 벌려서 소파에 걸쳤다. 나는 녀석이 목을 뒤로 젖혀 천장을 보는 것까지 보다가 슬쩍 핸드폰을 켜서 액정을 확인했다. 벌써 시간이 꽤 지나 있었다.
이 분위기에 그냥 가라고 하긴 좀 그렇고 밥이라도 먹여 보내야 할 것 같았다. 냉장고에 뭐가 있더라. 나도 앉은 자세 그대로 고개만 젖혀 천장을 보면서 음식들을 생각하고 있는데 정새빈이 갑자기 나를 불렀다.
“진호야.”
“…왜요.”
원래 이게 맞는 건데 이상하게 쟤 입에서 내 이름이 나오면 일단 긴장부터 된다. 쫑쫑인지 뭔지 하는 호칭일 때는 그나마 내가 아는 미친놈 상태라는 거니까 그쪽이 오히려 더 편한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사람을 불러 놓고 계속 천장만 보고 있는 정새빈의 턱을 보면서 나는 꿀꺽 침을 삼켰다. 또 뭔 소리를 하려고 저래.
“나는 너랑 섹스 할 거야.”
하…… 이러니까 내가 긴장을 해, 안 해. 저런 남사스러운 이야기를 일상 대화를 하는 톤으로 이야기하는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다.
“근데 아마 다른 놈들도 비슷하겠지. 너랑 시간을 보낼수록 더. 이건 추측 아니고 확신. 그렇게 될 수밖에 없어.”
“…예?”
뭐라는 거야. 이런 게 바로 신종 저주인가 싶다.
내가 이해한 것이 맞다면 다른 녀석들도 나랑 그 짓을 하고 싶어 한다는 거고, 나랑 시간을 보낼수록 그 마음은 더 커질 거라는 걸 확신한다는 소리인데….
성적인 접촉을 하고 싶어 한다는 건 나도 이미 대충 알고 있긴 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걸 뭐 하러 당사자 앞에서 강조하듯이 얘기하는 거야? 나는 입을 열면 욕이 나올 것 같아 그냥 침묵하는 것을 선택했다.
계속 똑같은 포즈로 입만 놀리는 정새빈을 보아하니 어차피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쫑쫑이는 아직 누구랑도 진지한 관계가 될 생각이 없어 보이지만 우리가 관두지 않는 이상 결국 진도는 점점 나가겠지,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너는 그때마다 우리한테 말 안 하고 있는 이유에 발목이 잡혀 거부하지 못할 거 같고.”
나는 욕을 하지 않기로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입 모양만으로 욕을 하고 있던 입을 다물었다. 항상 하던 성희롱인 줄 알았는데 흘러가는 낌새가 심상치 않아서였다.
“문제는 쫑쫑이가 우리와 달리 꽤나 상식적인 사람이란 거야. 생각도 많은데 분명 혼자서 우리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곱씹겠지. 그러다 정상 범위의 도덕적 잣대를 끌고 와서 스스로를 괴롭힐 거 같은데…… 그게 걸려.”
천장을 보면서 혼잣말하듯 말하던 정새빈이 드디어 턱을 조금 내렸다. 녀석은 뭔가를 가늠하듯 얇게 뜬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굳어 버린 얼굴을 어쩌지 못하고 그대로 그 눈을 마주했다.
“‘쟤네가 아무리 미친놈들이어도 결국 그걸 끝까지 거부하지 못한 건 내 선택이잖아’ 같은 좆같은 논리로 스스로를 혐오하게 되어 버리면 매우 곤란해.”
매우. 그렇게 강조하며 녀석이 고개를 기울였다. 도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건지 흐름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는 무슨 말인지 따져 묻기 위해 입을 열었다.
“아니, 그게 무슨…….”
“봐, 오늘도. 공공장소에서 찝쩍거리던 미친놈한테서 벗어나려고 발등 밟은 걸로 너, 나한테 미안하다며. 저번 일도 그렇고, 너는 남이 한 행동은 아무렇지도 않게 넘겨 버리려는 경향이 있으면서 네가 한 행동에 대해선 너무 엄격하달까, 잘못을 극대화해서 생각하는 것 같아.”
말을 끊고 들어오는 정새빈에 나는 바로 반박하지 못했다. 녀석이 한 말이 정확히 맞다고 볼 수는 없지만, 부정할 수도 없었다.
확실히 나는 남을 오랫동안 탓하고 있는 성격은 아니었다. 이미 일어난 일이고, 그 사람에게 뭘 어떻게 해 달라 할 것도 아니니 해결하지도 못할 감정을 오랫동안 가지고 있고 싶지 않았다.
거기다 가끔은 사람들이 나에게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 나로 인한 것임을 알기에 내가 상처를 입었더라도 그들을 탓하기 뭐할 때가 있었다. 그 탓에 내가 한 행동에 대해서는 꽤나 냉정하게 옳고 그름을 가리고 오랫동안 잘못을 곱씹는 것도 맞았다.
그러는 것치곤 잘못된 행동을 많이 하는 편이지만, 그래서 더더욱 그런 것들을 잊지 않고 되짚으며 조금이라도 덜 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은 나 하나밖에 없으니까 나라도 잘해야 이 세상을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건 형이 잘못한 게 맞지만 그래도 폭력을 쓰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법을 쓸 수도 있었던 거니까요. 거기다 형 얘기를 들으니까 더 그랬으면 안 됐다고 생각해서….”
“보통은 말이야, 합리화를 해. ‘그 상황에선 그 선택이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생각해. 그리고 실제로 나는 거기서 네가 말로 뭐라고 해 봤자 들어줄 생각 없었어. 결국 네가 선택한 방법은 너를 위해선 정말 어쩔 수 없었던 선택인 거지.”
나는 정새빈의 말에 입을 다물어 버렸다. 한없이 진지해지는 분위기가, 나를 분석하는 눈이 불편했다.
무슨 이야기를 하다 이렇게 된 거지? 앉아서 고민할 것이 아니라 그냥 부엌으로 가 버렸어야 했다. 정새빈이 입을 열 틈을 주지 말았어야 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간지럽지도 않은 목을 긁고 있는데 녀석의 손이 내 얼굴을 들어 올렸다.
“쫑쫑아. 쓰레기는 우리. 너는 쓰레기통에 굴러 들어온 작은 참새.”
녀석은 우리, 라고 말할 때는 스스로를 너, 라고 말할 때는 나를 가리켰다. 그 사소한 행동이 뭐라고 정새빈이 말한 내용이 그 손가락을 따라 내 머리에 콕콕 박혀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정신 빼놓은 맹수 아가리에 머리 처넣는 줄도 모르고 쫑쫑거리며 왔던 순간부터 작은 참새에게 주어진 선택권이라곤 아주 사소한 것들뿐이야. 아프게 잡아먹힐 것인가, 아픈 거 없이 잡아먹힐 것인가.”
정면에서 부딪혀 오는 눈이 여전히 불편해서 턱을 빼내려고 고개를 비틀자 낌새를 눈치챈 정새빈이 손에 힘을 주었다. 턱이 부서질 것만 같은 고통에 미간을 찌푸리며 항의하듯 노려봤지만 녀석은 웃기만 할 뿐 손에서 힘을 풀지는 않았다.
정새빈은 최면을 거는 사람처럼 내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속삭였다.
“앞으로 일어날 모든 비도덕적인 일들의 원인은 모두 우리야. 네가 하는 모든 비상식적인 선택들은 미친놈들 사이에서 너를 지키기 위함이야. 그러니까 네 잘못은 하나도 없어. 모든 건 우리가 쓰레기여서 일어나는 일들인 거야.”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으면서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말을 들으며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이 이야기를 하는 의도가 뭔지 정확히 파악이 되지 않았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문득 저번에 민선우가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쉽게 생각해, 너는 받을 자격이 있어.’
전혀 다른 이야기인데 왜 그게 생각났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놈이 했던 말이 귓가에서 맴도는 것 같았다.
“민선우가 그랬어? 하, 그 소시오패스가 감정까지 생각해 줬다 이거지. 하하, 쫑쫑아. 넌 정말 너만 잘하면 망가질 일은 없겠다. 스스로만 잘 간수하면 되겠네.”
“네? 그게 무슨….”
민선우를 생각하고 있던 사람 당황스럽게 정새빈이 갑자기 민선우를 들먹거리며 혼자 중얼거렸다. 거기다 뒤를 이은 말들은 그냥 넘길 수 없는 것들이었다.
내가 망가질 일은 뭐고, 스스로만 잘 간수하면 된다는 게 무슨 뜻인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건데 물어본다고 대답해 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나는 무슨 말이냐고 물으려던 말끝을 흐리고, 아까부터 녀석에게 하고 싶었던 반박이나 하기로 했다.
“형. 참새가 생각하기에 유일한 선택지였어도 일단 쓰레기통에 걸어 들어갔다는 것 자체가 참새한테도 어느 정도 잘못은 있는 거고, 이런저런 핑계를 대도 결국 쓰레기가 다 묻을 때까지 거길 벗어나지 않는다면 그것도 참새가 선택한 거니까 자기가 책임져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는데요.”
내 말이 끝나자마자 코웃음 소리가 들렸다. 정새빈이 정말 어이없는 소리를 들었다는 표정을 하고 고개를 젓고 있었다.
“걸어 들어온 건 그래, 그건 네 잘못이라고 치자. 근데 쫑쫑아 벗어난다는 선택지는 없다니까. 아까 내가 말해 줬잖아. 잊지 말라고도 했는데 벌써 기억이 안 나? 벗어나려고 하는 순간 ‘매우 아프고 잡아먹힌다’ 당첨인데 어디 한 군데 부러진 상태로 감금당하고 싶어?”
“부러… 네? 감금이요?”
“영악하게 굴어 쫑쫑아. 네가 원하는 대로 속도 조절하라고 우리가 목줄도 쥐여 줬잖아. 지금처럼 얌전히 그 자리에서 적당히 반항하고 까불면서 지내. 괜히 우리가 허용한 범위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순간 널 위해 꽂아 놓은 안전핀을 네 손으로 빼 버리는 건데, 굳이 그러고 싶어?”
이번에도 정새빈의 말 위로 민선우에게 들었던 말이 겹쳐 들렸다.
‘도망치지만 않으면 존중할 거예요.’
“도망이라…. 뭐, 나중에 네 선택에 정당성을 부여해야 할 때가 왔을 때, 내가 지금 한 말이 믿기지 않거든 한번 도망치는 척해 보든가. 그럼 네가 ‘선택한 건 나’라고 말한 것이 얼마나 건방 떤 건지 알 수 있을 테니까. 아, 근데 진짜 도망치지는 말고.”
그럼 나부터 부러트리고 싶어질 것 같아서.
정새빈은 살벌한 말을 덧붙이며 고개를 기울였다. 평온한 얼굴과 밝게 비추는 전등 빛, 앞머리가 사라락거리며 눈썹을 가리는 모양새까지 더해져 참 평화로워 보였지만 그걸 보고 있는 내 마음은 심란하기 그지없었다.
“내가 했던 말들을 지금 당장 이해할 필요는 없어. 이 머릿속에 잘 입력해 놨다가 나중에 네가 처한 상황과 네가 했던 선택들에 대해 회의감이 들고 자기혐오가 들면 떠올리라고 해 주는 말이니까. 나는 참새가 쓰레기통 속에서도 계속 반짝반짝 살아 있어 줬으면 좋겠거든.”
죽어 인형이 되지 말고. 정새빈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드디어 내 턱을 놓아주었다. 그러고는 그대로 거실에 대자로 눕더니 눈을 감아 버렸다. 더 이상 이야기할 것이 없다는 태도를 보며 나는 방금 했던 대화를 곱씹어 보았다.
나에게 가장 충격적인 이야기는 부서트리고 어쩌고 하는 것이었지만 정새빈이 나에게 전하고 싶은 것은 그 전의 내용인 듯했다.
앞으로 녀석들과 엮인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하든 그에 따른 책임은 내가 아니라 녀석들에게 있다는 것. 이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혹여나 내가 스스로를 자책하다 자멸할까 봐, 혹은 도망갈까 봐 염려가 되나 보다.
나는 애초에 선택권이 없다는 것에 화를 내며 무력감을 느껴야 하는 건지, 아니면 미래의 내 마음의 짐을 덜어 주고 책임을 져 주려고 한다는 맥락에서 위로를 받아야 하는 건지 헷갈렸다.
아니, 사실 둘 중에 헷갈려 할 때가 아니라 미친놈들과 좆같이 엮였다는 사실에 진절머리를 내며 지금이라도 얼른 멀리 도망치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이 집을 떠날 수가 없었고, 그러기 싫었다. 예령이와의 관계를 끊기는 싫었고, 가족과 멀어지는 것도 힘들었다.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덮으며 눈을 감았다. 그들이 쓰레기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에 준하는 미친놈들이라고는 생각한다. 이 틈에 있으면 분명 무슨 사달이 나도 나겠지. 지금도 당장 내 앞에서 나랑 섹스 할 거라고 저렇게 확정지어 말하는 새끼가 있는데 뭔가 일이 나지 않을 리가 없어.
그러나 멀리 떠날 생각이 없는 시점에서 이 상황을 벗어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머릿속이 너무 복잡한 나머지 절로 나오는 한숨을 삼키는데 정새빈의 목소리가 들렸다.
“쫑쫑아, 쉽게 생각해. 좋게 좋게, 둥글게 둥글게.”
민선우도 했던 말. 나도 라이온킹을 볼 때마다 생각했던 그 말. 쉽게, 좋게. …그래, 씨발. 내가 언제부터 그렇게 철저하게 옳은 선택만 해 왔다고.
쉽게 생각하자 김진호. 이미 일은 벌어졌으니 흘러가는 대로 냅둬 보자. 그러다 보면 어떤 결말이든 나겠지. 그냥 이대로 가면 혹여 과거와 같은 일이 벌어져도 나 또한 구해질 것이 확실해 보이니 그냥 그걸로 됐다 하고 넘어가는 거야.
그냥 몇 번이고 다짐했던 대로 그 시기를 넘길 때까지 나는 내 마음만 잘 간수하자. 그러다 후에 내 선택에 의해 숨이 막혀 오면, 그럴 때가 오면 정새빈의 말처럼 녀석들의 탓을 하면서 견뎌 내야겠다.
그렇게 나는 복잡하게 엉킨 머릿속 실타래를 푸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잘라 버렸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