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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호 이야기-68화 (68/234)

68화

새빈은 자기 혼자 병원을 가야 하나, 냉찜질인가 온찜질인가 계속 중얼거리는 진호를 가만히 보고 있었다. 저번에도 그러더니 진호는 새빈의 솔직한 표현에 속아 제가 당한 일은 잊어버리고 그의 눈치를 보며 쩔쩔맸다.

확실히 진호가 때리면 아프긴 했다. 평소에 사람을 때린 경험이 별로 없는 티를 내듯 힘 조절을 전혀 하지 않고 냅다 지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방어를 위해 한 방을 날리는 정도가 뭐 얼마나 큰 상처를 내겠는가. 조금만 만져 봐도 물렁살인 게 딱 드러나는 몸인데, 거기에 한 대 맞은 걸로 병원에 갈 정도였으면 새빈은 벌써 오래전에 죽었어야 했다.

단지 그는 생리적인 현상을 참아 내는 게 귀찮았다. 조금이라도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고, 고통을 느끼면 금세 눈물을 흘렸다.

그런데 그게 진호 눈엔 정말 너무 아파 죽겠어서 그러는 걸로 보였나 보다. 입술까지 잘근잘근 씹어 가며 안절부절못하는 반응도 볼만했지만 성에 차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는 이 정도는 그에게 별거 아니라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어… 그….”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말이 오히려 분위기를 더 경직시키고 말았다. 눈치는 보더라도 할 말은 하던 진호가 로봇이라도 된 것처럼 별 의미 없는 소리만 뱉어 내고 있었다.

새빈은 본인의 말투에 자조가 섞였었는지 곱씹어 보며 소파에 쓰러지듯 누웠다. 지금에서야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었지만 그래도 그의 인생의 암흑기라고 불릴 수 있는 시기의 일에 관한 말이었으니 자기도 모르는 새 사연 있는 뉘앙스를 풍겼을 수도 있긴 했다.

문제는 애매하게 눈치 있는 진호가 그걸 알아채 버려서 버퍼링이 걸렸다는 점이었다. 저렇게 말주변이 없으면 차라리 눈치가 없거나 무신경한 성격인 편이 살아가기 편할 텐데 안타깝게도 진호는 둘 다 아니었다.

새빈은 고민했다. 이 이야기를 하면 분위기는 필시 진창으로 처박힐 것이다. 아까의 해맑은 표정이 나올 일은, 적어도 오늘은 없겠지. 그러나 이미 얼어 버린 분위기를 다시 살리는 것도 요원해 보였다.

결국 생각하기 귀찮아진 새빈은 진호에게 결정을 미루기로 하고 옆으로 돌아누웠다. 진호는 이제 어, 아, 하는 소리도 내지 않고 입술을 앙다문 채 손만 쥐었다 펴고 있었다. 그런 그를 보면서 몇 마디 더 던져 반응을 살핀 새빈은 진호가 궁금해하는 것 같아 말해 주기로 했다.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지만, 흔적이 남아 버린 그의 과거를.

“그러나 왕자는 왕이 원하는 새장 안의 왕자가 되어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답니다. 그렇게 왕자의 몸은 점점 망가져 가고 있었지요.”

사실 새빈은 이 이야기를 하는 데 있어 별로 거리낌이 없는 편이었다. 흉터에 관해서도 딱히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거나 하지 않았다. 치료를 하지 않고 놔둔 것 자체도 흉터들을 자유를 쟁취하는 과정에서 얻어 낸 훈장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정도로, 지금 그에게는 아무런 타격도 줄 수 없는 ‘그냥 그런 일’이었다.

그러나 그가 어떻든 남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 또한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의 과거를 들었던 사람들은 대부분 동정의 눈길을 보내며 그를 이해하게 된 것처럼 굴고는 했다.

물론, 진짜 그를 이해했다기보다는 자기 기준에서 미친놈이라고 여겼던 놈이 왜 이렇게 미친놈이 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의미겠지만, 아무튼 대다수의 반응은 거의 정해져 있었다. 남들과 다른 반응을 보였던 것은 친구의 범주에 들어와 있던 네 명의 놈들과 채예령밖에 없었다.

“그러다 유약한 왕비가 둘째 왕자를 낳았지 뭐예요? 다행히 둘째 왕자는 왕이 원하던, 말 잘 듣는 우수한 인재였어요. 그제야 왕은 첫째 왕자를 놓아주었습니다. 그렇게 첫째 왕자는 염원하던 자유를 얻어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와- 해피엔딩!”

짝짝짝-.

뒤로 갈수록 말하는 것 자체가 귀찮아진 새빈은 대충 결말을 짓고 혼자 박수를 쳤다. 당연하게도 진호는 박수를 치기는커녕 이야기가 끝났음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새빈은 진호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를 동정하고 안타까워할 거라고 예상했다. 굳이 보여 줄 필요 없던 속살을 보여 준 이유도 그의 동정심이 경계심을 허물고 조금 더 유한 태도로 변화시켜 주길 바라서였다.

가장 좋아하게 된 얼굴을 못 보게 된 이 시점에서, 새빈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진호의 얼굴과 조금 더 친절해진 그의 태도를 보고 싶었다. 그를 위로해 주는 차원에서 섹스도 해 주면 더 좋고.

“……안아도 돼요?”

새빈의 계획이 잘 통한 모양인지 여전히 바닥을 보고 있던 진호는 그 자세 그대로 굳어 조그만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니, 워낙 조그마해서 혼잣말이라고 느껴진 말은 분명 새빈을 향한 것이었다.

원래부터 동정표를 얻을 생각이었던 그에겐 더할 나위 없이 뿌듯한 반응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미끄러지듯 소파에서 내려가 바닥에 앉은 채로 진호를 향해 팔을 뻗었다.

새빈은 ‘안는다’라는 말엔 포옹의 의미도 있지만, 섹스를 한다는 의미도 있는 것을 곱씹으며 입꼬리를 씰룩댔다. 힐끗 눈을 치켜뜨고 새빈의 위치를 확인한 진호는 꾸물꾸물 움직여서 오더니 그를 마주 안았다.

새빈은 잠시간 진호의 등 뒤에 얌전히 손을 올려놓고 때를 기다리다가 손을 내리기 시작했다. 그는 진호가 하고 싶어 하는 위로를 하도록 내버려 두고 그사이 원하는 바를 이룰 생각이었다.

“미안해요.”

엉덩이를 주물럭거리기 직전이었던 새빈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예상 범주에 있던 말이 아니었다. 보통 괜찮으냐는 질문이나 지금은 아프지 않느냐는 질문이 가장 많았고, 말해 줘서 고맙다는 말이 그 뒤를 이었다.

가끔 물어봐서 미안하다는 말을 들은 적도 있었지만, 진호는 그런 의미로 한 말은 아닌 것 같았다. 지금 내가 사과 받을 일이 있었던가? 눈을 굴리며 생각해 봤지만 그런 일은 떠오르지 않았다.

“제가요, 그런 것도 모르고… 저번에도 오늘도 너무 당황스럽기도 하고 그래서…. 아니, 사실 이런저런 일이 아니더라도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는데, 그래도 아무튼 제가 진짜 죄송해요.”

그렇게 말하는 진호는 잔뜩 주눅이 들어 있었다.

“앞으로는요, 형이 아무리 미친놈처럼 굴어도 절대절대 힘 안 쓸게요. 차라리 욕을 하면 했지, 절대 안 때릴게요.”

“…나 욕 듣는 것도 익숙한데.”

“어…… 그럼, 그럼 욕도 안 할게요. 근데 오늘 같은 일이 또 있을 때 제가 격하게 반응 안 하면 안 멈춰 주시잖아요. 저도 그대로 당하기엔 울화통이 좀 치미기도 하고…. 아니, 이게 아니라…… 음…아. 그럼 이건 어때요? 제가 아무리 화가 나도 단어는 둥글둥글한 걸로만 쓸게요.”

진호는 새빈의 어깨에 괴었던 턱을 뗐다. 그는 조금 거리를 벌려 눈을 맞추고는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예를 들면 ‘개짓거리 하지 말고 꺼져 주세요.’ 하는 게 아니라 ‘강아지 같은 행동 하지 말고 집에 가 주세요.’ 이렇게 얘기하는 거예요. 이 정도면 욕은 아니면서도 제가 무슨 심정인지는 알 수 있을 거 같지 않아요?”

뭐가 다른 건데. 말이 아무리 아 다르고 어 다르다지만 유순한 단어를 쓴다고 해서 공격적인 내용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거기다 속으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저렇게 대놓고 말하는데 바보가 아닌 이상 그걸 말 그대로 들을 수 있을 리가.

이걸 단순하다고 해야 하는 건지 엉뚱하다고 해야하는 건지, 아니면 정말 멍청한 구석이 있다고 해야 하는 건지 새빈은 순간 고민했다.

“그럼 앞으로 그렇게 할게요. 알았죠? 앞으로는 형이 어떤 미친… 아니, 뇌세포가 가출한 것 같은 행동을 하더라도 때리지도 않고, 나쁜 말도 최대한 안 할게요.”

고쳐진 말이 묘하게 더 기분 나쁘게 들린다는 걸 말해 줘야 할까.

위로를 해 올 거라는 생각을 엎다 못해 점점 영 이상한 데로 빠지는 내용을 들으면서 새빈은 아직까지도 진호의 엉덩이께를 헤매던 손을 늘어트렸다. 아무래도 오늘은 분위기상, 저번처럼 힘으로 찍어 누르지 않는 이상은 진호가 그의 위에서 허리를 돌리는 일은 없을 것 같았다.

힘을 써서 할까 잠깐 생각해 봤지만, 만약 여기서 힘을 쓰게 되면 아까 그 해맑은 미소를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을 알기에 그냥 관두기로 했다.

하, 귀찮아. 원하던 것을 이루지 못할 것 같다는 판단이 서자 만사가 귀찮아졌다. 진호에게 대충 고개를 끄덕여 보인 새빈은 소파에 팔을 걸치고 턱을 괴었다. 그리고 남자치곤 말랑말랑한 진호의 팔을 대신 주물거리는 것으로, 힘을 써서라도 풀고 싶다고 외치는 내면을 달랬다. 그걸 물끄러미 보고 있던 진호는 안아 주기 타임은 충분하다고 생각했는지 다시 조금 떨어져 앉아 관자놀이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옛날에요. 저 어렸을 때, 천식이 되게 심했어요. 최근엔 저도 그런 때가 있었나 싶을 만큼 괜찮아지긴 했는데, 그때는 어디 멀리 가려면 이만한 산소 호흡기 같은 기계를 꼭 가져가야 할 정도였어요.”

그 말소리를 들으면서 새빈은 습관적으로 거실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대화의 매너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지만, 어차피 진호도 그가 아니라 다른 곳을 보면서 얘기하고 있었다.

“그래서 병원을 자주 갔어야 했거든요. 근데 저희 부모님이 많이 바쁘셔서 갑자기 응급실 가야 할 때 아니면 저 혼자 가야 했어요. 가끔 채예령이나 걔네 부모님께서 같이 가 주기도 했지만 아무튼.”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새빈은 내용에 비해 말투가 너무 가볍다고 생각했다. 휑한 거실에 흥미를 잃은 그는 진호의 표정이나 관찰해야겠다 싶어 고개를 돌렸다.

“병원이니까 당연히 가면 싫어하는 일들만 했어요. 검사하고, 피 뽑고, 뭐 치료한다고 이것저것 하고 약도 받아서 먹어야 하고. 근데 있잖아요, 그중에서도 제가 가장 싫어했던 건 그거였어요. 왜 부모님이랑 같이 안 오고 혼자 왔냐는 말.”

진호는 가벼운 어조에 어울리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연한 질문이었는데 그때는 그게 그렇게 듣기 싫었어요. 아픈 것도 짜증 나는데 의사 선생님이고 간호사 선생님들은 맨날 꼭 한 번씩 물어보니까. 그 질문도 싫고, 분위기도 싫고, 매번 같은 대답을 해야 하는 것도 싫고 아무튼 다 싫었어요.”

새빈이 저를 보는 것을 모르는 건지 느끼면서도 모른 척을 하는 건지 몰라도 진호는 계속 눈을 내리깐 채로 말하고 있었다.

“그런 기억들이 쌓이고 쌓여서 저는 병원을 가기 싫어한다는 이야기인데. 어… 말로 하니까 진짜 별거 아닌 이유네요. 하하, 고작 질문 때문에 스물일곱… 아니, 스물여섯 살 먹은 지금도 병원을 잘 안 간다니까 웃기네.”

뒷머리를 긁으면서 겸연쩍게 웃는 진호를 보며 새빈은 고개를 기울였다. 자기 나이를 ‘올려서’ 말하는 실수가 흔한 편은 아니라는 것을 차치하고서도 진호의 이야기엔 전반적으로 지적하고 싶은 부분들이 많았다.

새빈은 이걸 여기서 짚을 것인가 아니면 듣고 흘릴 것인가 고민했다. 호기심이냐 귀찮음이냐. 그러나 새빈이 뭘 결정하기도 전에 고개를 든 진호가 변명하듯 다른 이야기로 방향을 틀어 버렸다.

“어, 제가 갑자기 왜 이런 이야기를 했냐면요. 그, 형도 형 얘기 해 주셨으니까 저도 해야 할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어서 한 것도 있고요. 또 뭐라 해야 하지. 딱 맞는 이야기는 아니긴 한데 뭔가 그런 걸 얘기하고 싶었어요.”

횡설수설하는 게 아무래도 그가 미간을 찌푸린 채 비스듬한 자세로 자신을 보고 있으니 오해한 듯했다.

그리고 직후 제 얘기를 할 땐 심각한 내용임에도 시종일관 가볍던 어투가 진중하게 바뀌었다.

“저만 해도 어렸을 때 있었던 일 때문인지 병원에 간다는 생각만 하면 기분이 나빠지거든요. 그런 걸 보면 어렸을 때 있었던 안 좋은 일은 기억에 더 남는 거 같은데 형한테 그, 일이 좋았을 리는 없을 것 같고…. 저처럼 형도 비슷한 일이 생기면 기분이 안 좋았을 거 같아서, 그래서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서요.”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진중한 것은 아니고 시무룩했다.

“안아 드린 건 제가 힘든 기억 떠오를 때 좀 따뜻한 곳에 있으면 괜찮아질 때가 있더라고요. 이불 가져오긴 좀 그래서 그냥 그렇게라도 따뜻하게 해 드리고 싶어서…. 절대 괜히 위로한다면서 제 죄책감 덜어 내려고 했던 거 아니었어요.”

양손을 저으며 아니라는 것을 표현하고 있는 진호를 보며 새빈은 진호의 사고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큰 문제가 닥쳐도 단순하게 받아들이고 금방 잊은 것처럼 굴던 것은 정말 겉모습에 지나지 않은 듯했다. 남들 눈엔 그렇게 보이게 행동해 놓고 결국 저 안에 다 담아 두고 스스로를 탓하는 모양이었다.

계속 그런 사고방식을 고수하면 진호는 제가 처한 상황을 얼마 견디지 못하고 무너질 것이 너무 빤했다.

그건 곤란했다. 새빈은 망가진 것은 좋아하지 않았다.

“쫑쫑아.”

새빈은 진호와 자신을 위해 안전장치를 하나 걸어 두기로 했다. 그러나 그전에 한껏 가라앉은 진호의 마음을 좀 달래 놔야겠다고 생각했다. 새빈은 사람이 보통 어떤 상황에 닥쳤을 때 자기가 받고 싶었던 행동을 상대방에게 해 주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상기하며 팔을 벌렸다.

“안아도 돼?”

따뜻하면 기분이 좀 나아지더라. 그렇게 얘기하는 새빈을 보며 진호가 어깨를 늘어트리고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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