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운전도 하시네요? …아. 내 말투 왜 이렇게 나왔지? 그, 시비 거는 게 아니라 그냥 의외라서 말한 거예요! 말투가 좀 이상하게 나오긴 했는데 아무튼 무시하거나 그런 거 아니고 그냥 좀 신기해서 그런 거예요! 진짜!”
운전을 하는 그가 웃겼는지 키득대면서 차를 탄 진호는 제법 그에 대한 경계심이 풀려 있었다. 아직 다른 애들한테 하는 것처럼 굴지는 않는 것 같지만, 그래도 무작정 배척하려는 태도는 보이지 않았다. 말투가 의도와 다르게 나갔는지 말해 놓고 자기가 더 놀라서 수습하는 모습을 보면서, 새빈은 이 정도면 나름 잘 풀려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협약 후 처음 만난 날 얼마나 그를 경계하던지. 자신이 무해하다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해 몇 시간 동안 아무것도 안 하고 거실 바닥에 누워만 있었는데도 전방 1m 이내로 오지 않았다. 그걸 생각하면 질문하기 위해서라지만 굳이 허리까지 숙여 눈을 맞추려는 진호의 태도는 나름대로 엄청난 변화였다.
되도록 이 상태를 유지하려고 했던 새빈이었지만 안타깝게도 그 태도는 잠깐의 대화 이후 다시 퇴보 위기에 놓여 있었다.
“아… 진심 내리고 싶다….”
새빈은 진호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핸들 위에 걸친 손가락을 까닥였다. 그에게 전보단 관심이 생겼는지 이것저것 물어봐 오는 것이 나름 귀여워서 제 딴은 솔직히 대답해 줬건만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니, 그게 무슨 취미냐고.”
새빈은 주차장을 들어설 때까지 창밖에 시선을 고정하고 투덜대는 진호를 힐긋댔다. 정말 섹스가 제일 좋아하는 것이자 취미이고, 잘하는 게 맞는 새빈은 조금 억울했지만 부연 설명을 할 생각은 없었다.
나름의 서사라고 할 만한 게 있기는 했지만, 그에게는 그 이야기까지 꺼내며 진호를 이해시킬 만한 열정이 없었다. 말하기 어려운 이야기라서가 아니라 그냥 귀찮았다.
그래도 새빈은 진호가 그를 ‘이상하고 위험한’ 사람으로 보던 것에서 겨우 ‘그냥 이상한’ 사람으로 보기 시작했는데 다시 ‘역시 이상하고 위험한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는 진호의 상식선에서 수용할 수 있을 만한 답을 해 주기로 했다.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새빈은 주차를 다 끝내고 망설임 없이 차에서 내려 진호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자기도 허둥지둥 내리려고 하는 진호를 보며 조수석 앞에 서서 마치 신사인 양 차 문을 열고 손을 내밀었다. 진호가 약해지는 포인트를 공략할 만한 멘트도 덧붙이며 새빈은 사람들을 손쉽게 홀렸던 미소를 지었다.
“…설마 했는데….”
진호는 멍한 얼굴을 하고 그를 빤히 쳐다봤다. 오늘의 일정 자체가 그를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에 놀란 것 같았다.
새빈은 그날 진호와 대화하면서 방을 관찰했었다. 사실 말하면서 별생각 없이 둘러본 것에 더 가까웠지만 아무튼, 둘러보던 그의 눈에 박히는 물건이 하나 있었다. 새빈도 좋아했던 기억이 있는 만화 영화의 비디오 테이프였다.
어린이를 위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 책장에 꽂혀 있는 뜬금없는 노란색. 심지어 더 이상 테이프를 사용하지 않는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가지고 있다는 것은 필시 특별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마침 며칠 전, 책상 위에 동일한 이름의 뮤지컬 표가 놓여 있는 것을 보자마자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한 자리 더 구하는 것 정도야 일도 아니었다. 새빈은 고민 없이 다음 만남에선 진호가 좋아할 것 같은 뮤지컬을 보기로 결정했다.
다정하거나 본인을 위하는 행동에 약해 보이는 진호가 마음에 들어 할 거라는 예상은 다행히 맞아 들어간 것 같았다.
“미친… 왜 섹시해 보이고 난리….”
거기다 중얼거리는 것을 듣자니 진호에게 새빈의 이미지가 그렇게 좋지 않음에도, 외모만큼은 나름대로 먹혀 들어간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손 위로 살포시 얹어지는 진호의 손을 한번 꽉 쥐고, 새빈은 이 정도면 오랜만에 운전을 했던 보람을 느끼게 해 주는 수확이었다는 생각을 하며 먼저 걸어갔다. 진호 스스로가 방금 전 자신의 멍청스러웠던 반응에 대해 창피해하고 있는 것 같아 혼자 추스를 시간을 주기 위한 일종의 배려였다.
“와… 미쳤다.”
시작하기 전까지만 해도 시큰둥하던 진호의 표정은 첫 곡과 동시에 달라졌다. 커진 눈, 벌어진 입, 상기된 볼까지. 극이 진행됨에 따라 박자에 맞춰 발을 까닥이기도 하고, 손을 마주 잡기도 하고, 엉덩이를 들썩거리기도 하는 모양새가 신나고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어린아이 같았다.
“아…! 그게 아닌데…. 그냥 가족들이랑 있지….”
그것도 모자라 조금 슬픈 내용이 진행되자 진호는 두 손으로 입을 막고 그렁그렁한 눈을 하고 있었다. 아주 작았지만 안타까움을 못 이기고 중얼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그의 모습만 보고 있어도 어떤 흐름인지 대강 알 수 있을 정도로 다이내믹한 반응이었다.
“푸흡-.”
새빈은 바람 새는 소리에 다시 진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는 아랫입술을 꼭 깨문 입으로 웃고 있었다. 표정을 보니 크게 웃고 싶은 것을 겨우 참은 모양이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눈물이 그렁그렁했던 주제에 환하게도 웃는 진호를 보며 새빈은 한 가지를 알 수 있었다. 지금의 모습과 비교하면 그동안의 진호의 웃는 모습은 그냥 입꼬리를 끌어 올린 것에 불과한 것 같았다.
떠올려 보면 이전의 그의 웃는 얼굴에선 자조적인 느낌이 들기도, 긴장이 느껴지기도 했다. 새빈이 그를 오래 보거나 자주 본 것은 아니라서 단언할 수는 없었지만, 그에게 보여 줬던 것과 다른 놈들과 있을 때 지었던 진호의 웃는 얼굴은 그랬다.
당시로선 기본적으로 좀 투덜대고 시큰둥한 인상이라서 그런가 싶었는데 오늘 이 모습을 보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때의 진호는 정말 웃었던 것이 아니라 웃으려고 노력하는 것에 가까웠다는 것을.
그렇게 생각하니 아까 티켓을 받을 때 진호가 취했던 행동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줄을 설 때부터 뚱해지기 시작한 표정은 모든 절차를 마친 직원이 붙임성 있는 미소를 지으며 ‘일행분이 있으신 것 같은데 표 한 장이 맞으신가요?’ 하고 물었을 때 완전히 경직되었다. 의미 없이 ‘아….’ 하는 소리를 내던 진호는 입을 달싹이다 결국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거기다 직원과 대화하는 내내 눈을 마주하는 행위가 껄끄러운 모양인지 힐긋대기만 할 뿐, 다른 곳을 보며 말하는 그의 모습은 확실히 인간관계에 있어 그렇게 호감을 살 수 있는 모습은 아니었다.
직원은 진호의 반응에 조금 민망했는지 어색하게 웃으며 마무리하는 인사를 했고, 그 인사말이 떨어지자마자 진호는 곧장 뒤돌아서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평소에 시끄러울 정도로 재잘대며 다양한 표정을 지었던 그에게선 전혀 볼 수 없었던 모습이었다.
그래서 새빈은 참 알 수 없는 애라는 생각을 하며 캐스팅 보드를 보러 가려다 말고 멈춰 서서 끝까지 지켜봤었다. 아무래도 그 모습이 ‘노력하지 않는’ 진호의 모습인 것 같았다.
“하하하!”
그늘이라곤 볼 수 없는 순수한 모습이 무대 조명을 받아 반짝였다. 노력하지 않는 일상에서의 뚱한 표정도 아니고, 누군가에게 호감형으로 보이기 위해 만들어 낸 것이 아닌 그의 순수한 미소는 새빈이 본 어느 사람보다 해맑고 즐거워 보였다.
새빈은 고개를 돌려 무대를 봤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다른 것은 몰라도 음악이라면 모든 장르를 불문하고 좋아했다. 웬만한 것들에게 원체 관심이 없고 금방 귀찮아하는 새빈을 그나마 즐겁게 해 주던 것 중에 하나였다.
그는 음악을 처음 접했던 때를 떠올렸다. 심장이 터지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두근거렸던 순간. 하지만 지금은 가장 좋아하는 뮤지컬을 보면서도 역시 괜찮다는 느낌밖엔 들지 않았다.
새빈은 진심으로 기뻐하는 진호를 보고 있자니 본인도 느껴 본 지 오래된 그때 그 시절의 두근거림을 느껴 보고 싶었다. 그래서 극이 끝나고 마침 고개를 숙인 진호의 위로 냉큼 엎어졌다.
“이 도, 라이… 새….”
‘끼’까지 나올 줄 알았지만 진호는 새에서 멈췄다. 진호의 위에 엎어져 있던 새빈은 욕해도 상관없는데, 하는 생각을 하며 머리를 더 꾸욱 눌렀다. 진호의 심장은 매우 빠르게 뛰고 있었다.
기분 좋아. 옷과 자세 때문에 힘껏 눌러야지 그나마 느껴지는 주제에, 그 안에서 세차게 뛰고 있는 심장 박동이 귀여웠다. 눈을 감고 가만히 듣고 있자니 자신의 심장도 그에 동화되어 세차게 뛰는 것만 같았다.
시간이 지나 그 박동이 점점 느려지기 시작할 즈음 타이밍 좋게 2부가 시작됐다. 새빈은 진호가 극에 집중하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지금 그가 보고 싶은 것은 뮤지컬이 아니라 그 뮤지컬을 보고 있는 그였다.
“아… 끝, 났다.”
진호의 얼굴에 그늘이 돌아왔다. 텅 빈 무대를 보면서 중얼거리는 소리에 공허함이 묻어났다.
배우들이 다시 등장하는 순간 들려오는 박수 소리에 놀랐는지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도 계속해서 머뭇거리는 진호가 새빈은 재미없었다.
아니, 재미가 없다기보단…… 그래, 안타까웠다. 아까의 반짝임이 다시 보고 싶었다. 그래서 그가 좋아하던 무대가 아직은 끝이 아님을 행동으로 보여 줬다.
무대 인사를 위해 걸어 나오는 배우들을 보며 진호는 다시 최면에라도 걸린 것처럼 빠져들어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새빈은 역시 이 표정이 좋다고 생각했다. 재밌다고는 생각했을지언정 한 번도 예쁘단 생각을 한 적은 없었던 진호가 예뻐 보였다.
상기되어 있는 볼과 반짝이는 눈, 순수한 기쁨을 담은 얼굴이 그를 흥분시켰다. 특히나 이 예쁜 모습을 그놈들은 보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하니 성취감까지 차올라 머리가 어질할 정도였다.
진호의 상기된 볼 위에 다시 그늘이 지지 않았으면, 그의 심장이 계속해서 세차게 뛰어 줬으면 했다. 그래서 그 느낌을 그에게 전염시켜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저 듣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것 같으니 같이 심장 박동을 올릴 수 있는 격한 행위를 하고 싶었다. 그가 잘하고, 좋아하는, 섹스 같은 행위.
“하… 좆나 꼴려….”
“예? 뭐라고요?”
해맑게 웃으며 자기 위에서 허리를 돌리는 진호를 생각하니 새빈의 중심부가 금방 단단해져 왔다. 그를 보면서는 방금 같은 표정을 지어 주지 않을 테니 커다란 스크린에 뮤지컬 영상이라도 띄워 놓고 해야 하나 싶었다.
새빈은 그 모습을 상상하면서 습관대로 몸을 진호에게 밀착시키고 그의 옷 속으로 손가락을 넣었다. 슬쩍 쓸어내리는 손길에도 흠칫거리는 반응이 귀여웠다. 그대로 새빈은 원하는 바를 이루려고 했다.
“뭐? 다시 보러 와? 하- 참! 아까 직원이랑 눈 마주쳤다고요. 알아요? 이제 전 여기 다신 못 와요!”
하지만 그와는 달리 상식을 갖춘 진호의 맹렬한 잔소리를 들으며 그의 손에 순순히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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