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그렇게 말하며 정새빈은 옆으로 털썩 누워 버렸다. 하체는 그대로 두고 상체만 천장을 보게끔 누운 녀석은 전등 빛을 향해 손을 뻗더니, 손가락을 벌렸다 오므리기를 반복했다.
“…아.”
뭔가 사연이 있을 것 같이 한숨을 쉬고 생각에 빠진 듯한 표정을 지었다.
큰일이다. 또 내가 가장 어려워하는 상황이 닥친 것 같다. 그러니까 나는, 여기서 더 물어서 정새빈이 속을 털어놓을 수 있게 해야 할지 아니면 그냥 모르는 척 다른 이야기를 해야 할지 결정해야 했다.
전에 남궁호 때처럼 뭐라도 선택해서 의사를 표현해 달라고 하기엔, 지금 여기에 있는 건 구급상자와 신었던 양말뿐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말하고 싶으면 물파스, 다른 얘기를 하고 싶으면 빨간약을 들어 주세요, 라고 하는 건 좀 아닌 것 같았다. 거기다 그때 남궁호가 지었던 어이없다는 표정을 생각해 보면 그냥 그 방법 자체가 막 그렇게 좋은 것 같지도 않았다.
에이씨, 차라리 그냥 ‘아, 그렇구나!’ 하고 자연스럽게 웃으면서 넘기는 건데 순간적으로 어색하게 반응해 버렸다. 눈을 이리저리 굴리면서 생각해 봐도 뭐라고 해야 할지 영 감이 잡히지 않아, 하던 것이라도 끝내기 위해 밴드에서 종이를 뗐다. 까진 피부에 접착 부분이 닿아서 쓰라리지 않도록 잘 조준해서 붙이고 나니 그나마 좀 덜 아파 보였다.
자, 이제 뭐라고 말문을 열어야 하나.
“아, 또 멍청한 표정.”
입을 꾹 다물고 눈치를 보는데, 내 눈 바로 앞에 놓인 녀석의 손가락이 보였다. 어느새 정새빈은 내가 있는 방향으로 상체를 틀어 나를 보고 있었다. 바닥에 앉은 나와 시선의 위치가 비슷해서 그런지 녀석의 표정이 더 잘 보였다. 반대로 녀석에게도 내 이 애매한 표정이 잘 보이리라는 생각을 하는 순간, 정새빈이 피식 웃었다.
“정말 말주변이 없네, 쫑쫑이는. 그런데 또 눈치는 있고. 오지랖 부리고 싶지 않아 하면서 어중간하게 착한 심성 때문에 무시도 못 하고.”
전에 네 명 뒷담화 할 때부터 알아보긴 했지만, 사람이 참 돌려 말하거나 포장해서 말하는 법이 없었다. 틀린 말이 아니라서 반박하기엔 뭐하지만, 가만히 듣고 있자니 기분 찝찝하게 만드는 말을 참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나는 약간 울컥하는 기분에 입을 삐죽거리고 싶은 것을 꾹 참으며 녀석의 발을 바닥에 살살 옮겨 놓았다.
“…다른 건 몰라도 지금 앞담화 당하고 있는 건 알겠네요.”
정새빈은 웃는 표정 그대로, 미간을 한껏 찌푸린 나와 마주 보고 있다가 눈을 감았다. 나는 아직도 물어봐야 할지 아니면 다른 화제를 꺼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분위기만 읽고 있었다.
이대로 가만있으면 어영부영 넘어갈 것 같기도 하고? 눈을 도로록 굴리면서 마른 입술을 축이는데, 녀석이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쉬워. 사랑의 매를 사랑한 완벽주의자 아버지, 장남.”
정새빈은 ‘장남’이라고 말하며 자기를 가리켰다. 하체까지 쭉 펴서 이제 완전히 소파 위에 옆으로 누운 녀석은 팔을 접어 턱을 괴었다. 매우 편안해 보이는 자세를 취한 정새빈이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자, 여기엔 뭐라고 말할래?’ 하는 듯한 표정에 나는 한숨을 삼켰다.
뭐라고 해야 하는 거야? ‘사랑의 매여도 체벌을 당하는 건 좋은 기억은 아니죠.’ 하고 말하면 너무 주제넘는 것 같고, ‘아 그렇구나.’하면 또 너무 무관심한 것 같고, ‘아버지가 완벽주의자셨나 보네요.’나 ‘장남은 힘들죠.’ 하는 건 또 할 말 없어서 말꼬리 잡고 늘어지는 것처럼 들릴 것 같았다.
답답함에 머리라도 쥐어뜯고 싶은데 나를 빤히 보고 있는 정새빈 때문에 그러지도 못하고 손만 쥐었다 폈다. 그러다 침묵이 너무 길어지는 것도 실례인 것 같아서 일단 소리라도 내려고 입을 열었다.
“어… 그…….”
그러나 정새빈은 내가 무슨 말을 할 기회도 주지 않고 질문을 던졌다.
“궁금해?”
“…예?”
아, 이건 또 무슨 시련이야. 자기 이야기가 궁금하냐는 말이겠지?
솔직히 나도 사람인지라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런 말을 하는 건지 좀 궁금하긴 했다. 뭔가 사연 있어 보이는 배경을 듣고 나니 더 그랬다.
문제는 여기서 궁금하다고 고개를 끄덕여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는 거다. 마음을 다치지 않게 하려면 여기서 내가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아까부터 계속 같은 맥락의 고민이었다.
“그… 궁금…하다는 표현보다는 뭐랄까, 그, 아니 궁금하지 않은 건 아닌데 그게 그러니까…….”
하…. 나는 그냥 병원 가기 싫어한다는 것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싶었을 뿐인데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흘러온 거야…. 곤란한 마음에 어색한 웃음을 달고 관자놀이를 긁었다. 그러자 그걸 본 녀석은 접었던 팔을 펴고 소파에 철퍼덕 얼굴을 묻듯이 엎어졌다. 내가 답답해서 그러는 것 같았다.
그래, 내가 정새빈 입장이었어도 엄청 답답했을 것 같다. 말 한마디 하는 데 이렇게 고민하다 결국 사람 복장 터지게 만드는 애가 또 있을까? 아마 없을 거다.
나는 또다시 나의 한심함을 뼈저리게 느끼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와 동시에 정새빈의 목소리가 들렸다. 빨리 말하라는 질책이 들려올 거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녀석은 뜬금없이 동화 구연을 시작했다.
“옛날 옛날에 가부장적인 완벽주의자 왕이 다스리는 집에 왕자가 태어났어요.”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감았던 눈을 떠 녀석을 봤다. 정새빈은 잔잔한 미소를 띤 채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고, 여전히 반쪽 얼굴을 소파에 묻은 채였다.
“왕은 왕자가 정말 완벽한 아이일 거라고 기대했지요. 자기의 아들이니까 당연히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왕자는 생각보다 평범한 아이였지 뭐예요?”
말투만 들으면 정말 유치원 선생님이 책을 읽어 주는 것 같아서 웃길 법도 한데, 이상하게 웃음이 나지 않았다. 정작 말하는 사람은 웃고 있었지만 내용의 흐름은 전혀 재밌지가 않았다.
“조용해서 불만, 약해서 불만, 남들보다 우수하지 못해서 불만, 불만, 불만, 불만. 왕은 모든 것이 다 불만족스러웠어요.”
녀석은 ‘불만’을 여러 번 말하면서 손가락을 마치 지휘하듯 움직이다가 우뚝 멈췄다. 그리고 주목하라는 듯 내 눈앞에서 손가락을 빙 한 번 돌리더니 천천히 손을 내렸다.
“그래도 왕자를 완벽하게 만들고 싶었던 왕은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가르쳐 보았지만, 이런, 이런. 왕자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 하려고 하는 똥고집쟁이였어요.”
나는 당연히 그 손가락이 움직이는 것을 따라 시선을 옮겼고, 허리까지 내려간 녀석의 손은 옷을 들어 올렸다.
“…형, 이게 무슨…!”
놀란 마음에 눈을 크게 뜨고 녀석을 보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이번엔 고민이고 뭐고 나도 모르게 반응이 먼저 나갔다.
“그래서 왕은 왕자가 말을 처들을 때까지 쥐 잡듯이 패 보기로 했답니다.”
녀석의 하얀 피부에는 거무죽죽한 얼룩과 우둘투둘한 흉터가 군데군데 자리 잡고 있었다.
* * *
새빈은 얌전한 핸드폰을 보며 웃었다. 역시 그가 보낸 것들이 진호의 취향이 아닌 모양인지 읽었다는 표시 뒤에도 몇 분간 답장이 오지 않았다. 그의 예상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은 반응을 보며 새빈은 미리 복사해 놓은 링크를 하나 더 보냈다. 읽었다는 표시와 함께 이번에는 바로 답장이 왔다.
[라이온킹을 뮤지컬로도 해요? 이거 갈 수 있음 이거 가요, 우리!]
이번에도 예상한 반응이었다. 처음부터 진호가 라이온킹 뮤지컬을 고를 거라고 확신했음에도, 그가 좋아하지 않을 것 같던 전시회나 음악회 등의 링크를 먼저 보내 본 이유는 단순히 진호의 반응을 관찰하기 위해서였다.
단번에 싫다고 하지 않은 것을 보면 역시 진호 자체가 사람에게 싫다는 말을 쉽게 하지 못하는 성격이거나, 새빈도 ‘잘 보여야 하는 사람’ 리스트에 발을 걸쳐 놓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아직까지는 전자일 확률이 높다. 그래도 다섯을 한꺼번에 묶어 놓은 ‘협약’이 진호의 심경 변화에 어느 정도는 영향을 미쳤길 바라며 새빈은 앉은 자세 그대로 고개를 뒤로 젖혀 천장을 봤다.
환한 전등 빛이 바로 눈을 찔렀다. 그러나 그는 눈을 감는 대신 팔을 뻗어 손으로 전등 빛을 가리고 손가락을 벌렸다 오므리는 행동을 반복했다. 그가 생각에 잠길 때마다 하는 별 의미 없는 습관이었다.
방을 나설 때까지만 해도 택시를 타고 가려던 새빈은 복도를 걸으면서 고민했다. 차를 가지고 가는 것이 나으려나. 평소에 하지 않을 뿐이지 어떻게 하는 것이 데이트 상대에게 조금이라도 더 매력적으로 보일지 새빈도 알고는 있었다. 운전하는 것을 귀찮아하긴 해도 싫어하는 편은 아니었으므로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차 키의 행방을 알기 위해 가족 중 누군가를 찾아가야 하는 것이 달갑지 않았다.
걸음을 멈추고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하던 새빈 앞에 때마침 사람이 지나갔다. 얼굴이 눈에 익은 것으로 보아 일한 지 오래된 사람 같았다. 새빈은 아직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사람을 향해 돌아섰다.
“키.”
“…지하 주차장에 가 보시면 걸려 있을 겁니다.”
그 사람은 갑작스럽고 불친절한 물음에도 놀라지 않고 돌아서서 원하던 대답을 내놓았다. 역시 그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인 듯했다. 운이 좋았다. 새빈은 자신이 노력하는 만큼 진호가 그를 재밌게 해 주길 바라며 느릿느릿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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