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짝짝짝-
웃고 울다 보니 어느새 뮤지컬이 끝나있었다. 무대가 한차례 텅 비워지더니 배우들이 나와 차례대로 인사를 했다. 사람들이 박수 치는 걸 얼떨떨하게 따라 치고 있는데 여기저기 일어나는 사람들이 보였다.
“일어나고 싶어?”
점점 일어나는 사람의 숫자가 많아져서 나도 같이 일어나야 하나 싶은 마음에 엉거주춤하게 자세를 잡는데, 정새빈이 그걸 봤나 보다. 상체를 기울여 턱을 괴더니 웬일로 제대로 된 질문을 던졌다.
“일… 어나야 하는 거 아니에요?”
말하면서도 무식한 질문인 것 같아 점점 목소리가 작아졌다. 그래도 용케 들었는지 녀석은 내 말이 끝나자마자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입을 열었다.
“좋았으면. 좋았어?”
“네! 진짜 엄청요!”
나는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빈말이 아니라 정말 좋았다. 만화 영화보다 훨씬 현장감이 넘쳤고, 심장을 두근거리게 했으며 현실을 잊게 해줬다.
어제만 해도 보다 보면 어렸을 때가 생각나 우울해지지는 않을까 걱정했었는데 괜한 기우였다. 아까 밖에서 잠들까 봐 걱정했던 것도 정말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나를 빤히 보던 정새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연스레 녀석을 따라 시선을 올리는 나를 내려보며 씩 웃더니 내 양팔을 잡았다.
“끙-차.”
“어…?”
정새빈은 마치 무를 뽑듯이 나를 들어 올렸다. 당황스러운 상황에 아무 소리도 못 내고 일으켜 세운 대로 일어선 나는 멍하니 녀석을 쳐다봤다. 정새빈이 내 턱을 잡아 무대 쪽으로 돌렸다.
“반짝거리지?”
무대에선 배우들이 일렬로 서서 인사하고 들어가고를 반복하고 있었다. 정새빈이 속삭인 말처럼 그들은 밝은 조명 밑에서 반짝거렸다.
배우들이 서로의 손을 잡고 환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나의 이상과 꿈, 기대와 정체성 그리고 못난 마음이 모두 행복해하고 있었다.
커다랗게 울리는 노래와 브라보를 외치는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 나는 어느새 손뼉을 치고 있었다. 그들이 모두 들어갈 때까지 멈추지 않고 박수를 쳤다. 모든 것들이 끝나자 사람들이 웅성거리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후….”
나는 가시지 않는 흥분과 왜인지 혼자가 된 것 같은 허전함에 쉽사리 나갈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렇게 한참을 무대와 웃으며 나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었을까, 회장은 직원 몇 분과 나, 정새빈만 남았다.
“그렇게 좋으면 또 보러 올까, 진호야?”
고개를 끄덕일 뻔했지만 참았다. 나는 아쉬운 마음을 떨쳐내며 고개를 저었다.
“왜?”
“이거 표 엄청 비싸잖아요. 구하기도 힘들다고 그랬….”
거절하면서도 아쉬운 마음에 계속 무대만 보고 있는데, 정새빈이 또 내 턱을 잡더니 자기 맘대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아, 말로 하지…! …왜 자꾸 사람 턱을 잡고….”
내 목소리는 점점 기어들어 갔다. 내 시야에 가득 찬 정새빈은 웃고 있었다. 나를 내려다보느라 내려 깐 눈, 한쪽 입꼬리가 조금 더 올라가 있는 얇고 붉은 입술, 새하얗고 투명한 피부. 녀석은 내 턱을 잡은 채 엄지손가락으로 내 볼을 쓸며 나직하게 말했다.
“반짝이는 게 좋아서 그래.”
구미호한테 유혹당하는 선비가 이런 마음일까? 나는 자꾸 벌어지는 입을 꾹 다물고 손으로 이마를 때렸다. 정신 차려. 홀리지 마. 너 이렇게 미남계에 약한 애였어? 나는 눈앞에 있는 사람이 또라이 정새빈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면서 입을 열었다.
“저도 공연 보는 거 좋긴 한데, 괜찮아요. 오늘 본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해요.”
제법 단호하게 뱉어진 대답에 나는 안심하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런데 그 순간 가슴에 얹어진 내 손 위로 정새빈의 손가락이 닿았다. 그리고 내 가슴께를 보는 건지 눈을 내리깐 채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아니야. 네가, 쫑쫑이가 보고 싶은 거야.”
정새빈은 아까와는 또 다른 미소를 짓고 있었다. 홍조가 띄워져 있어서 그런지 어딘가 쑥스러워하는 것 같기도 하고, 저 녀석에게선 결코 볼 수 없을 것 같던 풋풋한 느낌이 나는 것 같기도 했다.
“저요…?”
“응. 지금처럼. 반짝반짝.”
뭐야, 이 녀석 갑자기 왜 이래. 내가 반짝거린다는 말인 것 같긴 한데…… 수줍어 보이는 녀석을 보고 있자니 덩달아 쑥스러운 느낌이 들어 고개를 숙였다.
녀석의 하얗고 섬세해 보이는 손이 보였다. 완전히 겹친 서로의 손에서 전해지는 온기.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어, 그, 이제 그만 집에 갈까요?”
묘해지는 분위기가 부담스러운 마음에 일부러 더 호들갑스럽게 말하며 손을 뺐다. 허공에 그대로 떠 있는 녀석의 손을 내려주고 출구를 가리키며 뒤를 돌았다.
“사람들도 다 나갔네요. 저희도 얼른 가…!”
그러나 호기롭게 출발한 것 치고 몇 발자국 가지 못하고 자리에서 멈춰 섰다. 뒤따라오던 정새빈이 갑자기 뒤에서 끌어안은 탓이었다.
“왜 이래요, 형. 가자니까요…?”
이쪽을 힐끔대는 직원들의 눈치를 보며 녀석의 팔을 잡고 내리는데 풀리긴커녕 더 옥죄어 왔다. 뒷목에 닿은 녀석의 이마는 뜨거웠고, 머리카락은 예민한 피부를 간지럽혔다.
“하… 진짜 …어.”
이대로 있다간 이상한 소리라도 낼 것 같은 불안함에 머리를 숙여서 녀석의 머리카락을 피하려는데 정새빈이 뭐라고 중얼거렸다. 고개를 들었는지 간질거리는 것은 멈췄지만 이번엔 녀석의 숨이 닿아 소름이 돋았다. 도저히 못 참을 것만 같아 나는 뒷목을 손으로 거칠게 문지르며 녀석에게 되물었다.
“뭐라고요?”
그러자 정새빈은 몸을 완전히 밀착시켜오며 내 귀에 속삭였다.
“쫑쫑이하고 섹스하고 싶어, 지금 당장.”
동시에 옷 위로도 느껴지는 묵직한 무언가가 내 엉덩이에 닿았다. 귀에 닿는 숨과 어느새 옷 사이로 들어와 내 허리를 쓰다듬는 손가락이 간지러웠다. 나는 녀석을 저지시키기 위해 다급하게 팔을 잡아 내렸으나 진짜 꼼짝도 하지 않았다. 힘으로 벗어나는 것은 포기하고 말로 설득하려고 고개를 돌리는데, 씨발.
“읏, 잠…!”
이쪽을 보고 있는 직원과 눈이 마주쳐버렸다. 나는 경악하는 직원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눈을 아래로 깔았다. 신음이 나오려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한쪽 발을 높게 치켜들었다가 녀석의 발등을 향해 힘껏 뻗었다.
“윽…!”
순간 허리에 감긴 팔이 느슨해진 틈을 타 얼른 팔을 쳐내고 뒤로 돌아 녀석과 마주 봤다. 정새빈의 얼굴은 한껏 찡그려져 있었다. 나는 아까 직원이 있었던 자리를 한번 힐긋대고 허공을 헤매고 있는 녀석의 손을 잡고 끌었다.
“공공장소에서 개소리하지 말고 얼른 따라오기나 해요. 집에 가게.”
다행히 녀석은 이번엔 돌발행동 없이 따라 나왔다.
“일단 저기 소파에 앉아 봐요.”
계속 절뚝거리며 걷는 정새빈이 걱정되어 집에 오자마자 소파를 가리켰다. 누굴 때리고 그러는 걸 좋아하지 않는데 이상하게 쟤하고 엮이면 나도 모르게 힘을 쓰게 되는 것 같다. 나는 녀석이 앉는 것을 확인하고 최태혁이 돌아간 후엔 쓸 일이 없었던 구급상자를 찾아 선반을 열었다. 그때 그놈 치료한다고 이것저것 사놨던 터라 구급상자는 아직도 제법 묵직했다.
상자를 한쪽 팔에 들고 뚜껑을 여는데 멀뚱히 나만 보고 있는 정새빈이 시야에 걸렸다.
“양말 좀 벗어주세요, 형.”
별생각 없이 상처 부위를 보기 위해 뱉은 말인데 그게 웃겼는지 키득대는 소리가 들렸다.
“쫑쫑이 변태.”
또 헛소리하네, 저게 진짜. 나는 구급상자를 뒤적이며 정새빈에게 걸어가다 말고 멈춰 섰다.
“잘못 들으셨나 본데요, 형. 저는 다른 거 말고 양.말. 양말을 벗으라고 했거든요?”
“그니까 변태.”
녀석은 가슴 앞으로 팔을 교차시키더니 새침하게 고개를 팩 돌렸다.
이걸 한번 던져볼까. 아니, 아니다. 나는 폭력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다. 하마터면 던질뻔한 구급상자를 꽉 쥐고 녀석의 앞쪽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상한 소리 하느라 아직도 양말을 신고 있는 녀석의 발을 내 무릎에 올렸다.
“아파….”
피부가 벗겨졌을까 봐 천을 들어 올리며 최대한 살살 벗기는데 녀석이 조그맣게 중얼거리는 것이 들렸다. 힐끔 보니 허리 숙여 발을 보는 얼굴이 울상이었다.
조심스레 양말을 벗기자 드러난 발은 피까지 비칠 정도로 피부가 까져 있었고 발등은 또 벌겋게 부어올라 있었다.
내가 너무 세게 밟긴 했지. 나는 밀려오는 미안한 마음에 아랫입술을 잘근거리며 발을 요리조리 살폈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병원…을 가야 하나? 핸드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해 보니 영업 중인 병원이 없을 만한 시간이었다. 그럼 일단….
“필요 없어.”
“…?”
잠시 망설이다 가까운 응급실이라도 찾으려고 지도를 검색하는데 정새빈의 손이 휴대폰 액정을 덮었다. 녀석의 시야가 나보다 위에 있긴 하지만, 검색하는 내용까지는 못 보는 각도였기 때문에 얘가 갑자기 왜 이러나 싶었다.
“아니, 제가 뭘 할 줄 알고….”
“병원.”
나는 녀석의 대답에 머리를 뒤로 물리며 경계했다. 저번에도 그러더니 얘 무슨 표정만으로 다 아는 건가.
“하하, 멍청한 표정.”
녀석은 당황한 내 표정이 웃겼는지 내 코앞에서 손가락질을 하며 소리 내서 웃었다. 자기가 더 바보 같은 표정을 하고 있으면서 누구보고 멍청하대.
“사람 자꾸 멍청해 보인다고 그러는 거 아니에요. 저 그리고 어? 나름 똑똑해요! 나름.”
“응응~”
“으휴, 정말. 진짜 응급실 안 가봐도 되겠어요? 그때 너무 당황해가지고 정말 온 힘을 다해서 밟아서 많이 아플 텐데….”
입으로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핸드폰을 내려놓고 다시 구급상자를 끌어왔다. 나도 죽을 거 같을 때 빼곤 병원에 가기 싫어하는 사람이라 그 마음을 알 것 같아서였다. 본인이 싫다는데 강요하고 싶진 않았다. 나는 이럴 땐 냉찜질인지 온찜질인지 이따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일단 연고와 면봉을 꺼내 들었다.
정새빈은 상체를 앞으로 내밀고 내가 하는 것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상처를 볼수록 미안한 마음이 들어 호호 불면서 정성껏 약을 바르던 나는 녀석을 힐긋 보며 말을 건넸다.
“혹시 형 병원 가는 거 싫어해요? 저도 진짜 웬만한 일 아니면 잘 안 가요. 가서 별로 좋은 기억이 없어서 그런가 병원 간다고 생각하면 괜히 더 아픈 거 같고 막 그렇더라구요.”
마지막 말은 스스로 생각해도 좀 철이 없는 것 같아서 민망한 마음에 일부러 농담조로 이야기했다. 그리고 밴드를 뜯으면서 고개를 젖혀 정새빈과 눈을 마주치려는데, 녀석은 내가 아니라 자기 발을 보고 있었다.
“싫은 게 아니야. 아는 거지.”
시선을 따라 꼼지락거리는 발가락을 한 번 보고 다시 정새빈을 보면서 이젠 익숙해진 패턴대로 녀석에게 되물었다.
“뭘 아는데요?”
“이 정도 다친 건 놔두면 알아서 낫는다는 거.”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