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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호 이야기-64화 (64/234)

64화

그래, 내가 너한테 친절한 답을 기대하고 물어봤겠냐. 나는 턱을 들어 앞을 가리키는 녀석을 짜게 식은 눈으로 봐 준 다음 고개를 돌렸다. 커다란 판에는 얼굴 사진들과 함께 배역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오늘 연기하는 배우들인 모양이었다. 나는 봐도 누가 누군지 몰라서 그렇구나- 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괜찮겠네.”

정새빈을 따라 뭐 중요한 거라도 있나 싶어 판을 샅샅이 보던 나는 갑작스러운 말에 녀석을 바라봤다.

“뭐가요?”

“오늘. 다르거든, 누가 나오느냐에 따라.”

정새빈은 손가락으로 사진 하나를 콕 집더니 자기 취향이라는 소리도 덧붙였다. 정말 마음에 들었는지 고개까지 끄덕거린다. 표정은 그대로인데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럴 거면 제일 좋아하는 거 물어볼 때 해괴망측한 거 말고 뮤지컬이라고 대답할 것이지.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입장 시간을 알리는 직원의 안내에 따라 회관 안으로 걸어갔다. 정새빈은 팸플릿을 읽느라 움직일 생각을 안 해서 내가 그냥 팔을 잡고 끌고 갔다.

“쫑쫑아, 왜 라이온킹이야?”

자리에 앉아서 이리저리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정새빈이 물었다. 이제야 팸플릿을 다 읽은 모양이었다. 이젠 녀석의 두루뭉술한 말에 되묻기도 지친다.

대충 왜 라이온킹이 좋냐는 거겠지 뭐. 아니면 뭐 어쩔 거야. 몰라, 쟤도 지 맘대로 말하니까 나도 그냥 내 맘대로 말할 거야. 나는 무대를 마저 둘러보며 대답했다.

“재밌잖아요. 신나고.”

말이 끝나자마자 회관이 완전히 어두워졌다. 나는 내 대답을 들은 건가 확인하기 위해 정새빈을 봤다. 어두워서 다른 건 자세히 보이지 않았지만 나를 보고 있는 녀석의 눈동자는 또렷하게 보였다. 눈싸움하듯 서로의 눈만 보고 있다가, 무대에서 들리는 소리에 내가 먼저 고개를 돌렸다.

조용한 회장을 가르는 음악. 힘을 더하는 악기 소리와 코러스, 동물 분장을 한 배우들. 조금은 오글거릴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눈에 담기는 모든 것이 심장을 뛰게 했다. 복도를 가로지르는 배우들을 봤을 땐 엉덩이가 들썩거릴 지경이었다.

아, 나 이거 좋아하네.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어지러이 움직이던 배우들이 자리에 멈춰서고, 주인공인 아기 사자가 들어 올려졌다. 수십 번은 봤던 라이온킹. 이제는 집에 테이프 기계도 없고, 더 봤다간 망가질 것 같아서 보관만 하고 있지만, 한때는 내가 우울할 때마다 보던 영화였다.

처음엔 노래가 신나서였다. 이국적인 분위기의 노래와 귀여운 동물들이 다양한 표정을 가지고 움직이는 모습이 재밌고 신나서 좋아했다. 그다음엔 주인공 사자에게 감정 이입을 하면서 봤다. 많은 우여곡절을 겪고, 스스로 미움받고 있다고 생각하며 자라온 주인공은 사실 언제나 주변으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멀리 떠나버린 그를 찾아왔던 히로인과 위험해지는 것을 무릅쓰고 주인공을 돕기 위해 먼 길을 떠나온 친구들이 좋았다. 그를 지키느라 죽어야 했던 아버지 사자도, 돌아온 그를 누구보다 환영해 주는 엄마 사자도 좋았다.

영화를 보면서 항상 혼자 생각했었다. 나는 느끼지 못하고 있지만, 사실 나의 부모님도, 내 친구들도, 내가 눈치채지 못한 누군가도 사실은 나를 사랑해주고 있지는 않을까, 하고.

주인공이 움직이는 시간 동안 나는 분명 그럴 거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우울했던 감정을 달래곤 했다.

“와 형, 진짜 너무 재밌는데요? 장난 아니다. 와, 영상이랑 진짜 다르네요!”

1부가 끝나고 회장이 밝아졌다. 나는 멍하니 무대만 보고 있다가 솟구치는 흥분을 이기지 못하고 여전히 무대에 시선을 고정한 채 녀석을 잡고 흔들며 말했다. 정새빈은 아무 대답이 없었지만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던 나는 얼른 뒤를 돌아보며 다시 한번 얘기했다.

“아니, 나 뮤지컬 좋아하네! 와씨, 빨리 2부 시작했으면 좋겠어… 요….”

젠장. 어쩐지 너무 차지게 잡힌다 했어.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꽉 쥐고 있던 손을 풀었다. 한껏 구깃구깃해진 정새빈의 옷깃. 그냥 손 닿는 데를 잡은 건데, 그게 녀석의 멱살이었다. 나에게 멱살을 잡혀 이리저리 흔들렸을 정새빈은 아무 말 없이 나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하, 하하하. 아니 제가 너무 흥분해서 멱살을 그만…. 죄송해요. 팔인 줄 알았어요, 팔.”

괜히 민망해진 나는 한껏 구겨진 셔츠의 앞섶을 탁탁 펴 주면서 어색하게 웃었다. 주변을 살펴보니 뒷자리 사람들이 날 향해 수군거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씨, 쪽팔려.

“…억!”

뒷목을 긁으며 고개를 숙이는데 위에서 무게감이 느껴졌다. 덕분에 그냥 사람들 눈을 피해 살짝만 숙이려던 고개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앞으로 고꾸라질 듯 내려갔다. 보이진 않지만 이런 짓을 할 범인은 딱 한 사람. 내 옆에 앉아 있던 또라이밖에 없었다. 나는 내 위로 엎어진 놈에게 이를 악물고 말했다.

“이, 게 뭐, 하는 짓, 일까요?”

“심장.”

말을 좀 알아듣게 하라고, 미친놈아.

힘을 줘서 누르는 건지 아니면 온몸에 힘을 빼고 엎어진 건지는 몰라도 진짜 더럽게 무겁다. 한 손은 무릎에 두고, 한 손은 목을 긁다가 녀석의 몸에 눌리는 바람에 오로지 복근의 힘으로만 무게를 지탱해야 했다. 숨이 턱턱 막혀 온다. 나는 목 끝까지 차오른 씨발 소리를 삼키며 다시 한번 친절하게 말했다.

“심장이고, 나발이고, 힘들어 뒤질 거, 같으니까, 일단 좀, 나오는 게, 어떨까요?”

물론 내용까지 친절하게 바꾸는 것은 실패했다.

“으으응, 조금만 더.”

저것은 앙탈인 건가. 내 날개 뼈가 있는 부근에 녀석의 얼굴이 부비작대는 것이 느껴졌다. 아까 나를 보며 수군댔던 뒷사람들은 지금쯤 경악을 하고 있겠지? 멀쩡한 사내놈 위에 얹힌 사내놈이 머리를 비비며 애교를 부리는 모습이라니.

쪽팔려 죽을 것 같은 마음에 어떻게 해서든 떨쳐내고 싶었지만, 평소 운동을 멀리하던 내 복근은 버티는 것만으로도 이미 한계라고 외치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앞 좌석에 머리를 박거나 머리를 지키기 위해 몸을 틀어서 바닥에 나뒹굴게 되거나 둘 중 하나일 것 같았다.

더 최악인 것은 내가 앞으로 넘어지면 내 위에 있는 놈한테 완전히 깔린 꼴이 될 거란 점이다. 그럼 나는 2부고 뭐고 당장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 내 위에 있는 또라이랑은 다르게 나는 수치심이란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얼마간을 버텼을까. 온 힘을 다 끌어모아 간신히 몸을 지탱하고 있는데 이젠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정말 더 이상은 못 버틸 것 같아서 안 나오는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윽…. 제발 좀 비, 켜….”

“어. 2부.”

“……?”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무게감이 사라졌다. 회장의 불이 꺼짐과 동시에 정새빈이 자기 자리로 돌아간 것이다.

순식간에 가벼워진 몸을 일으키자 매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무대를 보고 있는 정새빈이 보였다. 아 진짜 때릴까, 이 새끼. 꿀밤이라도 한 대 날리고 싶은 마음에 주먹을 꾸욱 쥐었다. 누군 쉬는 시간 내내 숨 막히고 힘들어서 낑낑댔는데, 웃어?

힘들어서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몰랐는데 그새 사람들이 다 자기 자리에 앉아 있었다. 방금 전까지 그러고 있었다는 건 내가 앉은 좌석이 보이는 모든 사람이 우리가 겹쳐 있는 걸 봤다는 얘기잖아. 그 생각을 하니 쪽팔려 죽겠는데, 정작 본인은 저렇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군다고?

나는 주먹을 부들거리며 녀석을 째려봤다. 이미 쥐 죽은 듯이 조용해진 회장에서 난리를 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진짜 그냥 째려만 봤다. 그러나 녀석은 내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무대만 주시했다.

“하….”

그래, 내가 참아야지. 나는 절로 나오는 한숨을 내쉬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때마침 극이 시작했다. 힘찬 노랫소리를 들으며, 열 받았던 것은 차츰 잊어버리고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모두가 자기를 싫어한다고 생각하던 아기 사자는 유쾌한 친구들을 만나 즐거움을 아는 청년 사자가 된다. 아름다워진 어릴 적 친구와 사랑에 빠지고, 자기 자신에게 남아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죄책감을 덜고 용기를 얻는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 고향에서 그는 어머니를 핍박하고 있는 삼촌, 악당을 보고 눈이 돌아간다.

나는 액션을 시작하려는 배우들을 보며 습관적으로 눈을 감았다. 그런 내 귀에 언젠가의 채예령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진호야, 너 왜 자꾸 눈 감아. 제일 재밌는 장면인데!’

채예령은 영화 볼 때도 참견이 심했다. 보다가 눈도 좀 감고 그럴 수도 있지 그걸 굳이 큰 소리로 외쳐서 사람을 민망하게 만들었다.

‘시끄러. 보기 싫은 걸 어쩌라고.’

나는 어이없어하는 녀석을 한번 흘겨보고 다시 눈을 감았다.

서로를 때리고 상처 입히는 것은 보고 싶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에겐 악당을 물리치는 통쾌한 장면일지 몰라도 나에겐 아니었다. 나에게 이 영화에서 물리치고 싶은 캐릭터는 없었다.

나오는 모든 캐릭터가 소중했다. 하나같이 나의 꿈을 담고, 나를 대변하는 내 친구들이었다. 주인공은 내가 되고 싶었던 나의 이상이었고, 주인공의 두 친구는 채예령 곁에 있는 나와 같았다. 위엄 있으면서도 다정한 아버지와 따뜻한 어머니는 내가 항상 꿈꾸던 모습 그 자체였고, 주인공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연인은 나의 희망이었다.

그리고 악당은, 그는 나의 못된 생각들을 모아 놓은 존재였다. 열등감에서 나오는 치기 어린 공격성을 있는 그대로 표출하는 그는 미움받기 싫어 꽁꽁 숨겨놓은 내 안의 못된 마음과 너무 닮아 있었다. 그래서 그가 하는 행동들에 공감했고, 그만큼 더 안타까워했다.

‘그냥 다 사이좋게 지내면 더 좋았을 텐데. 서로 그냥 조금만 더 쉽게, 좋게 생각했으면…….’

‘어휴, 진호야. 주인공이랑 주인공 아버지는 그러려고 했는데 저 악당이 그걸 다 엎은 거잖아. 마지막에도 그냥 떠나게 해줬더니 오히려 덤비다가 자업자득으로 죽은 건데 뭘 울고 그래.’

나도 안다. 악당은 못된 짓을 많이 했다. 그럼에도 그가 그냥 후회할 정도로만 혼나고 죽지는 않길 바랐다. 자기 행동을 후회하고, 반성한 뒤에 다른 애들과 둥글게 살아갔으면 했다.

어린이 만화 영화니까 어쩌면 그렇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그런데 결국 악당은 마지막까지 잘못된 선택을 했고, 죽어버렸다. 앞으로 펼쳐질 밝고 행복한 세상에 그는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처럼.

나는 매번 그 장면을 보는 것을 힘들어했다. 그래서 딱 그 장면에서만 눈을 감고 있다가, 다시 밝고 행복한 장면에서 눈을 떴다. 그럼 울지 않고 끝까지 행복하게 영화를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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