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지잉-.
울리는 핸드폰을 켜니 메시지가 하나 와 있었다. 정새빈이었다. 그러고 보니 내일은 정새빈을 만나는 날이었다. 얼마 전에 하고 싶은 게 있냐고 묻는 녀석에게 아무거나 상관없다고 말했던 것이 생각났다.
양치를 하던 나는 칫솔을 문 채 손의 물기를 닦고 화면을 넘겼다.
[골라]
텍스트도 지 같이 쓰는 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왠지 음성 지원이 되는 듯한 메시지를 보고 피식 웃으며 밑으로 내리니 여러 개의 링크가 있었다. 차례대로 유명 화가의 내한 전시회, 피아노 독주회, 모빌리티 쇼 등의 사이트들이었다.
여기를 가자는 얘기겠지? 나는 왼손으로 핸드폰을 옮기고 다시 양치질을 시작했다. 저번에 음악회 가서 퍼질러 자고 다시금 깨달은 건데, 나는 이런 문화생활과는 영 맞지 않았다.
역시나, 링크에 들어가서 이리저리 살펴봐도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전시회는 가서 5분 컷 할 수 있을 것 같고, 피아노 독주회는 분명 잠들 것 같고. 심지어 모빌리티 쇼는 차로 가도 1시간이 넘게 걸리는 곳에서 한다.
나는 일단 다른 할 만한 것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대안도 없이 다 마음에 안 든다 그러면 괜히 까탈스러운 데이트 상대처럼 구는 것 같아서였다. 근데 딱히 하고 싶은 게 없었다.
하, 이거 완전, 딱 그거잖아.
‘뭐 할래?’
‘아무거나.’
‘그럼 이거 할래?’
‘아, 그건 싫어.’
‘그럼 뭐하고 싶은데?’
‘아무거나.’
인터넷에서 밈으로 봤을 땐 왜 저러냐 싶었는데, 지금은 화자에게 너무 공감이 간다. 정말 아무거나 해도 상관없는데 정새빈이 보낸 선택지들은 모두 싫고, 그렇다고 다른 할 걸 생각해 보면 딱히 하고 싶은 건 없어서 아무거나 하고 싶은 느낌적인 느낌. 내가 생각하고도 어이가 없어서 입을 헹군 물을 뱉으면서 웃어버렸다.
지잉-.
입을 닦으면서 요즘 많이 보는 영화라도 좀 찾아봐야겠다, 생각하는데 핸드폰이 몇 번 더 울렸다. 볼 것도 없이 정새빈이었다. 내가 답을 하지 않는 이유를 눈치챈 건지 [ㅋㅋㅋ] 하는 웃음과 함께 링크 하나를 더 보내왔다. 보는 사람도 없는데 괜히 혼자 머쓱해서 뒷머리를 긁었다.
이번엔 뭘 보냈나 확인해 보는데, 익숙한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이거다, 하는 마음에 정새빈에게 바로 답장을 했다. 내일의 일정이 정해지는 순간이었다.
* * *
-나 거의 다 도착했어.
“저도 준비 다 했어요! 지금 나가면 돼요?”
우리 집은 골목에 있어서 차 세울 데가 마땅치 않았다. 거의 다 왔다는 말에 마음이 급해져 신발을 구겨 신고 얼른 집을 나섰다.
현관문을 잠그고 골목으로 나가니 이제 막 들어서고 있는 차 한 대가 보였다. 운전석에 정새빈이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이 어딘가 어색하게 느껴졌다.
이미지로는 기사가 운전하는 차 뒷좌석에 앉아서 늘어져 있는 망나니 도련님 포지션이 어울리는데, 운전이라니. 좁은 골목에 들어오느라 좌우 백미러를 살피는 모습이 뭔가 웃겼다.
이게 뭐라고 웃음이 나오지? 운전 진짜, 너무 안 어울리네. 나는 혼자 큭큭대면서 내 앞에서 멈춘 차에 탔다. 녀석은 오랜만이라는 내 인사에 고개만 끄덕이더니 턱으로 안전벨트를 가리켰다.
직접 안전벨트를 매 줬던 민선우와 달리 정새빈은 내가 맬 때까지 가만히 보고 있다가 출발했다.
“형, 이거 찾아보니까 바로 매진될 만큼 인기 많던데 표 어떻게 구했어요?”
“책상에 있었어.”
저게 뭔 소리야. 나는 어이없는 대답에 바로 정새빈을 쳐다봤지만 놈은 똑같은 표정으로 앞을 보고 있었다. 웃음기 하나 없는 것을 보니 진담이었나 보다.
“쫑쫑인 처음?”
“네, 처음이에요. 아, 근데 어렸을 때 영화로는 봤어요.”
“알아.”
뭐를. 네가 뭘 아는데. 라고 얘기할 뻔했지만 잘 삼켰다. 저 녀석이랑 대화하다 보면 자꾸 태클을 걸게 되는 것 같다. 말을 길게 하지도 않는데 묘하게 사람 열 받게 하는 뭔가가 있었다. 나는 살짝 고개를 저으며 최대한 부드러운 말투로 물었다.
“형이 알긴 뭘 아는데요?”
내용까지 부드럽게 만드는 데는 실패했다. 그때까지 앞만 보던 정새빈이 질문을 듣자마자 내 쪽을 한 번 보더니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테이프 봤어. 쫑쫑이네 책장.”
“아…. 그건 또 언제 봤대요.”
아무래도 내 방에 왔을 때 책장에 꽂혀 있던 테이프를 봤나 보다. 그래서 내가 영화로 본 것은 안다는 건가. 설마, 그거 보고 일부러 이거 보자고 그런 건 아니겠지? 나는 몸을 앞으로 숙여서 정새빈의 얼굴을 정면으로 살폈다. 평소엔 흐리멍덩한 눈이 운전을 하느라 그런지 또렷했다.
“원래 이런 거 잘 보러 다녀요?”
“응.”
“저한테 보내준 링크들에 있었던 전시회랑, 뭐 그런 것들도요?”
“…응.”
“형은 이미지랑 다르게 되게 문화생활을 즐기네요?”
“뭐….”
한 대 때릴까. 나는 모든 질문에 한 글자로만 대답하는 녀석에게 한 방 먹여야 하나 그냥 말을 말아야 하나 잠깐 고민했다. 억지로 끌어올린 입꼬리가 부들거렸다.
마지막은 열 받아서 좀 비꼰 건데도 똑같은 대답이 돌아온 걸 보고, 이 새끼 내 말 안 듣고 있는 건가 싶었다. 말 많을 땐 누구보다 많은 놈인 걸 알아서 그런지 이쯤 되니까 어떻게든 긴 대답을 듣고야 말겠다는 쓸데없는 오기가 생겼다.
“형, 제일 좋아하는 게 뭐예요?”
대학 때 들었던 교양 수업에서 배웠다. 긴 답을 원한다면 열린 질문을 던져라. 나는 그때 교수님의 가르침을 떠올리며 매우 열린 질문을 던졌다. 이제 적어도 한 글자보다는 긴 대답이 오겠지.
“섹스.”
머리가 아팠다. 그래도 긍정적인 면을 보자면, 확실히 한 글자보다는 긴 대답이긴 했다. 내용이 얼토당토않아서 그렇지 확실히 내 질문에 대한 답도 되었고, 아까보단 길었다. 나는 하하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취미는 뭐예요?”
“섹스.”
내가 기대한 답은 미술품 관람이라거나 음악 듣기였지만 당황하지 않았다. 그래. 그럴 수 있지. 그게 취미가 될 수 있나 싶지만 제일 좋아하는 거니까 뭐, 취미 삼을 수도 있지. 나는 이번엔 입을 앙다문 채 억지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 그럼. 음…. 형이 제일 잘하는 건 뭐예요?”
때마침 신호에 걸려 차를 세운 정새빈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나를 향해 씩 웃는 정새빈을 보며 직감했다.
“섹스.”
그래, 씨발.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다, 이 새끼야. 이제 긴 대답이고 뭐고 질문할 의욕을 잃었다. 나는 그냥 창밖이나 쳐다보기로 했다. 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내리고 싶어졌다.
“진짜야. 나 섹스 좋아하고 잘해. 저번에도 말했잖아.”
드디어 녀석의 입에서 문장이 나왔지만 하나도 반갑지 않았다. 나는 조그맣게 녀석이 한 말을 따라 하며 흉내 냈다. 정새빈은 ‘줘붠에도 말훼짜나-’라고 하면서 일부러 얄미운 표정을 짓는 나를 힐끔 보더니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가 내렸다. 진짜 사람 김빠지게 하는 데 뭐 있는 녀석이다.
나는 다시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주차장이라 볼 건 없었지만 저놈을 보고 있는 것보단 나을 것 같았다. 후진 기어 소리가 나기 전까지 차 안에는 정적이 맴돌았다.
주차를 마친 녀석이 시동을 껐다. 나는 그래도 여기까지 녀석 덕분에 편하게 왔으니 고맙다고 말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녀석은 뭐가 급한지 이미 내리고 있었다.
나는 그 뒷모습을 보고 뭐야, 우리 늦기라도 한 건가, 싶어 덩달아 급하게 안전벨트를 풀었다. 그리고 내리기 위해 차 문을 열려는데, 어느새 조수석 쪽으로 온 정새빈이 문을 열어줬다. 뭐 하는 건가 싶어서 황망하게 올려다보니 정새빈이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입을 열었다.
“그다음 잘하는 거, 듣는 거. 특기 관찰, 취미 대나무 숲.”
“네…?”
“오늘 할 일. 쫑쫑이가 다 낡은 테이프를 가지고 있을 정도로 좋아하는 라이온킹, 뮤지컬로 보여 주기.”
잡으라는 듯이 내 앞에 내밀어진 손에, 고개를 들자 녀석이 나를 내려다보며 웃고 있었다. 반쯤 감긴 눈과 나른하게 올라간 입꼬리를 보며 홀린 듯이 녀석의 손 위에 내 손을 올렸다. 솔직히 조금 멋있었다.
“어….”
단추를 다 채우지 않아 살짝 벌어져 있는 셔츠 사이로 보이는 하얀 목선과 쇄골이 퇴폐적이면서도 섹시한 분위기까지 풍겼다. 녀석은 내릴 생각은 안 하고 멍하니 자기를 올려다보는 내 손을 한 번 꽉 쥐었다 폈다.
“가자.”
“네. 가, 가요.”
나는 허둥지둥 내리면서도 계속 정새빈의 얼굴을 힐끔댔다. 어느새 다시 멍한 얼굴로 돌아온 녀석은 차 문을 닫더니 어딘가로 향했다. 가는 방향을 보니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이었다. 성의 없긴 했지만 아까 이런 데 자주 온다던 대답은 진짜였나 보다. 걸음에 망설임이 없었다.
“지가 뭐 백마 탄 왕자님이야 뭐야. 손은 왜 내밀고 지랄이야.”
정신 차려, 김진호. 겉은 저래도 속은 완전 또라이인 놈이라는 걸 기억해. 나는 놈의 뒤를 따라가며 양손으로 내 뺨을 두드렸다.
“좌석도 되게 좋은 데네.”
티켓을 받고 좌석 배치도를 확인해 보니 저번 음악회 때처럼 중간 섹션의 중간 자리였다. 커다란 회장에 중간 좌석, 그리고 옆자리의 정새빈까지 겹쳐서 그런지 자연스레 그때 기억이 났다. 설마 이번에도 잠들진 않겠지?
조금 불안해졌지만 그래도 뮤지컬은 사람들이 움직이고 말도 하니까 그렇게 쉽게 잠들지는 않을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거기다 내가 좋아하는 내용이니까.
나는 작게 주먹을 쥐면서 이번엔 끝까지 깨어 있어 보겠다는 다짐을 하고, 어느새 없어진 정새빈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언제 저만치 갔는지 꽤나 멀리 떨어진 녀석은 가만히 서서 어딘가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형, 뭘 그렇게 봐요?”
“저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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