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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호 이야기-62화 (62/234)

62화

“제가, 제가 지금 제정신이 아니어서 그래요. 지금 좀 이상해져서.”

그러나 그런 이야기를 민선우한테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나 스스로도 갑자기 이런 생각을 하며 우울해지는 내가 감당이 안 되는데 남이 들으면 얼마나 어이가 없을지 예상이 됐다.

나는 숨을 고르며 애써 괜찮은 목소리를 냈다. 이런 복잡한 것보단 내가 말하기에도, 상대방이 듣기에도 가볍게 넘길 수 있을 만한 이야기가 되게끔 수습하고 싶었다.

“드릴 것이 없다는 말은 그러니까, 그거예요. 그…. 옷이요, 옷. 일자리도 주셨고 옷도 사 주시고. 자꾸 그러시는데 저는 그만큼 좋은 걸 드릴만한 능력이 없으니까요. 그게 갑자기 부담이 되어서, 그래서요.”

눈물을 대충 닦아 내고 하하 웃는 얼굴을 지어냈다. 민선우는 꽤 오랫동안 나를 지그시 쳐다봤다. 내 눈물이 멈추고 숨이 안정될 때까지 가만히 쳐다만 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또다시 손으로 내 얼굴 전체를 쓸어 남아 있는 눈물을 닦아 주며 말했다.

“참, 엉뚱하고 신기한 사람이에요. 진호 씨는.”

녀석은 양손으로 내 얼굴을 감싸고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안 그래도 옆으로 안겨 있는 자세였기에 가까웠던 얼굴이 이젠 코가 닿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처음엔 순진해서, 단순한 사람이라 그런 줄 알았는데…. 이렇게 겁이 많고 생각이 많아서 혼자 재고 따지다가 바보 같은 결론을 내는 거라곤 생각도 못 했지 뭐예요.”

“어….”

“본인이 거짓말 더럽게 못하는 거 알고 있어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민선우가 잘못 알았다. 나 거짓말 진짜 잘한다. 특히 괜찮은 척하는 건 누구보다 자신이 있었다. 세상만사 가볍게 여기는 척도 잘하고, 단순한 척도 잘한다. 민선우 역시 방금 그렇게 말하지 않았는가. 내가 순진하고 단순한 줄 알았다고.

“저 거짓, 훌쩍, 거짓말 잘해요.”

오늘 진짜 왜 이러는지 모르겠는데 주둥이가 뇌랑 따로 놀기로 작정했나 보다. 나도 모르게 생각이 툭 말로 튀어 나가 버렸다. 민선우가 내 얼굴을 놓아주었다. 녀석의 눈밖에 보이지 않던 시야에 얼굴 전체가 들어왔다. 뭐가 그렇게 재밌는 건지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언뜻 보면 모를 수 있어도 진호 씨랑 같이 있다 보면 다 보여요.”

“뭐가요…?”

“지금 많이 혼란스러울 거 알아요. 진호 씨는 우리보단 상식적인 사람이니까 이 상황을 바로 받아들이기는 어렵겠죠.”

나는 내 말을 무시하고 넘어가는 민선우에게 항의하듯 인상을 찌푸렸지만, 녀석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갔다.

“드라마도 아닌데 다섯 명이 갑자기 다가가는 거. 충분히 당황스럽고 부담스러웠을 거예요. 거절하고 싶을 때도 있었겠죠. 그런데도 최대한 우리한테 맞춰 주려고 하는 것도 알아요.”

그렇게 말하면서 민선우는 제 볼을 내 이마에 대고 양팔로 나를 꽉 끌어안았다.

“처음엔 나를 좋아해서 받아 주는 줄 알았어요. 아쉽게도 그건 아니었지만, 무슨 이유에서건 우리의 억지에 어울려 주기로 결정한 것 같아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내가 좋아하는 줄 알았다니. 간도 쓸개도 다 빼 줄 것처럼 굴어서 그렇게 생각했던 걸까? 아니면, 아니면 나도 모르는 새 꽤 오래전부터 그들에게 감정을 내어 주고 있었나. 생각이 다시 복잡해지려고 했다. 그 순간 민선우가 자기와 눈을 마주하도록 내 턱을 잡고 위로 조금 당겼다.

“또. 또 혼자 생각 많아지려고 한다.”

“아, 아닌데요. 조용히 듣고 있던 건데….”

뜨끔했다. 사실, 나도 내가 생각이 많은 걸 알아서 일부러라도 생각을 많이 안 하려고 한다. 깊게 파고들어 봤자 우울해지기만 하는 것을 아니까. 그런데 오늘은 자꾸 그게 잘 안 된다. 멘탈이 쿠크다스가 되었는지 조금만 걸리는 것이 있어도 혼자 이것저것 생각하다 바스러질 듯 굴었다.

나는 민선우의 눈을 피해 시선을 밑으로 내리깔았다. 반쯤 감긴 눈 위로 따뜻하고 말랑한 것이 닿았다 떨어졌다.

“조금만 쉽게 생각해 줘요. 진호 씨는 그저 우리의 억지에 어울려 주는 것만으로도 이 모든 것을 받을 자격이 충분한 거예요.”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잔잔한 미소를 띤 얼굴이 보였다.

“그게 물건이 되었든, 마음이 되었든. 뻔뻔하다 생각하지 말고 받아요. 우리에게 뭘 더 주려고 하지 않아도 돼요. 도망가지 않는 것만으로 이미 진호 씨는 많은 것을 해 주고 있어요.”

민선우가 하는 말은 내 고민에 대한 해결책은 아니었다. 당연했다. 내가 이야기하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녀석이 한 말 중에 유독 박히는 말이 있었다. 마음이든 뭐든 받아라. 마음을, 받아라.

“저한테 마음이 있으신 건가요?”

질문을 들은 민선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그럼 우리가 뭐 때문에 이러는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돌아온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그들이 뭘 바라고, 무엇 때문에 이러는지 내가 어떻게 알겠느냐고 물을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냥 단순히, 전에는 바로 옆에 있어도 눈에 띄지 않던 놈이 갑자기 알짱대는 것이 신기했던 참에, 다른 놈들도 그런 거 같으니 괜히 욕심이 난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했다고는 더더욱 말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나는 침을 한 번 삼키고 더듬거리며 최대한 무난한 단어를 찾아 나열했다.

“어…. 그냥, 그냥…. 관심…, 호기심…? 승부… 욕까지는 아닌가….”

말을 할수록 일그러지는 민선우의 표정에 나는 결국 끝을 흐렸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녀석은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허탈하다는 듯이 웃었다.

“하하, 이런…. 나는 진호 씨가 다섯 명이랑 동시에 만나는 것 때문에 도덕적으로 혼란스러워 하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아직 선택이고 뭐고 할 준비도 그럴 마음도 없는데, 우리가 자꾸 뭔가를 주니까 그게 부담스러운 줄 알았고요. 한참 잘못 짚었네요, 제가.”

민선우가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리면서 살짝 고개를 젖힌 그대로 눈만 내려서 나를 봤다.

“애초에 단어 선택을 잘못했어요. 관심을 그렇게 받아들일 줄이야. 하하, 그래도 그렇지. 진호 씨. 나는 그렇게 한가한 사람이 아니에요. 그건 다른 놈들도 마찬가지고.”

나는 조금 화가 나 보이는 민선우의 표정에 다시 한번 침을 꿀꺽 삼켰다. 생각지도 못한 녀석의 격한 반응이 당황스러웠다.

“솔직히 말하면, 그래요. 사랑은 아니에요. 그렇다고 내가 호기심에 한번 ‘건드려 보자.’라든가, 단순히 다른 놈들한테 지기 싫다는 생각으로 이 짓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건 진짜 억울해요.”

억울하다고 말하는 부분에서 민선우는 눈썹을 축 늘어트렸다. 정말 서운해 보이는 모습에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들 지경이었다.

“정말 내가, 우리 다섯 명이 진호 씨를 그 정도로만 여기고 있었으면 의사가 어떻든지 간에, 구슬리고 협박하고 망가트려서라도 한 번 가지든가, 아니면 그냥 손을 뗐겠죠.”

“네…? 망가트려요…?”

“뭐 하러 이런 귀찮은 짓을 해요. 다른 놈들 거슬리는 거 참아가면서.”

중간에 들린 무서운 말에 내가 몸을 흠칫하며 묻자 잠시 민선우가 잠시 말을 멈췄다. 그러나 내 질문에는 답해주지 않고 하던 말을 계속했다.

내 표정을 보고 작게 웃으며 한숨을 내쉰 녀석은 안심하라는 듯이 내 등을 쓸어내렸다.

“나는 지금 겁 많은 나비 놀라지 말라고, 도망가지 말라고 최대한 천천히 다가가고 있는 거예요. 나비가 너무 귀엽고, 가엾고, 예뻐서 그 모습 계속 보려고 얼마나 아껴 주고 있는데. 협약 맺은 것도 그것 때문이에요. 급하게 서두르고 싶지 않아서.”

나는 아까 전까지만 해도 남사스러운 짓을 하려고 했던 민선우에게 그건 급한 게 아니었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참았다. 저렇게 말하는 것을 보니 그 정도는 녀석에게 ‘천천히’ 축에 속하나 보다. 반박해 봤자 무시당할 것 같기도 했고, 어딘가 모르게 따뜻한 이 분위기를 깨기 싫어서 가만히 듣고 있자니 쇄골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민선우의 기다란 손가락이 남궁후가 남긴 흔적을 꾹 누르고 있었다.

“제약을 걸지 않으면 나비의 몸엔 이런 게 한 개가 아니었겠지. 나도 결국은 못 참았을지도 몰라. 그렇게 못 하게 하려고 규칙을 정하고, 세이프 워드를 정해서 서로를 묶은 거야. 우리 나름대로 나비를 서로에게서 지켜주기 위해서.”

나는 협약이라고 하면 인형 팔다리를 각각 잡고 내 거라고 외치며 당기는 이미지를 그렸는데, 말을 듣고 보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그것 보다는 서로 갖고는 싶으나 잡아당기면 찢어질 것 같아서, 모두의 한가운데다 놓고 서로를 경계하는 쪽에 가까운 것 같았다. 그리고 내 예상보다 훨씬, 그들은 인형을 많이 아끼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렇게 애지중지하고 있는데 마음을 받고 있는지도 몰랐다니. 눈치가 없는 건지, 자신이 없는 건지.”

정확히 말하면 둘 다다. 나를 이리 대해 준 사람이 없었으니 이게 마음을 받는 건지 뭔지 눈치로 알 수가 없었고, 중간중간 녀석들이 나한테 잘해 준다 싶어도 그게 애정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라곤 생각이 들지 않았다.

잠깐 의심을 했던 적은 있지만 그럴 리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나는 내가 그런 애정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자신이 없었다.

“진호야. 네가 도망가려고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최대한 너를 존중하며 다가갈 거야. 마음이 다치지 않게, 천천히. 그러니까 이 작은 머리로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기억해.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받을 자격이 있다.”

눈초리에 못 이겨 답을 하니 녀석이 흐뭇하게 웃으며 가볍게 입을 맞춰 주었다. 나는 여전히 내가 그들에게 마음을 줄까 봐 걱정하는 거라는 말은 못 하고, 알겠냐는 말에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곤 민선우의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고민은 하나도 해결이 되지 않았지만, 웃음이 났다. 나도 마음을 받고 있었구나. 그게 사랑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애지중지 대하고 있었던 거구나. 그럴 리 없다고, 또 혼자 착각하는 거라고 치부했던 그 행동들이, 마냥 착각은 아니었구나.

“고마워요.”

나는 작게 속삭이며 생각했다. 역시 마음을 주는 것은 안 되겠다고. 지금은 그저 조금의 틈이 생겼을 뿐인데도 애정 어린 말 몇 마디 들었다고 울던 내가 웃고 있지 않은가. 지금도 이런데, 내 마음을 줘 버린다면 나는 그들에게 속절없이 끌려 다닐 것이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단 애정이 담겨 있다고는 하지만, 그들의 감정이 진지하다고 생각하기엔 아직도 걸리는 점이 너무 많았다.

당장 주어지는 달콤함에 취해 홀랑 넘어가 버린다면 필시 언젠가는 괴로워질 거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이 다정함 속에서 흔들리지 않을 자신은 없지만 나는 최선을 다해 내 마음을 지킬 것이다. 해 본 적이 있으니 이번엔 더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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