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얼마 전에 호 형이랑 같이 있다가요…. 그러니까, 과외를 하기로 했는데, 그 과외 끝나고 밥, 밥을 먹고요.”
진호는 겁을 잔뜩 먹은 나머지 말을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선우를 안정시키기 위함인지, 달래듯 그의 손과 손목을 살살 쓸어내렸다. 그럼에도 턱을 쥐고 있는 힘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선우의 표정 또한 계속 무표정했다.
“대화를 했는데 뭔가에 도, 움이 되었다고 갑자기 보답으로 키스를, 그러니까 기분 좋게 해 주겠다면서 갑자기 스킨십을 해 왔는데, 제가 잘 뿌리쳤거든, 요? 진, 진짜예요. 잘 뿌리쳤는데 나중에 보니까 이, 이런 게 있었어요.”
알면서 물어본 거였지만 막상 진호가 직접 인정하는 것을 들으니 더 화가 났다. 선우는 이대로 가다간 협약이고 뭐고 진호에게 몹쓸 짓을 할 것만 같아 이를 악물었다. 진정해. 그렇게 되뇌며 반창고를 든 손을 꽉 쥐어 그게 마치 호라도 되는 양 온 힘을 다해 구겨 버렸다. 일단 알아낼 것은 다 알아냈다. 여기서 어떻게 할 것이 아닐 바에야 이쯤해서 조금 풀어줄 필요가 있었다.
선우는 아직도 겁을 잔뜩 먹은 주제에 슬쩍슬쩍 비치기 시작하는 반항기 어린 눈빛을 마주하며 생각했다. 그래, 우선은 원래 목적인 쇼핑을 하러 가야겠다. 그러나 본인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물리고 빨렸다.’는 진호를 이대로 곱게 집에 보내줄 생각은 없어졌다.
“하…. 쪽팔려….”
선우는 심술을 참지 못하고 일부러 사람들 앞에서 진호를 나비라고 불렀다. 성인 남성을 지칭하기엔 너무 뜬금없는 단어에 엘리베이터 안의 사람들은 진호를 힐끔대기 시작했다.
당연히 진호의 얼굴은 티가 나도록 붉어졌다. 짓궂게 굴고 싶은 마음에 한 번 더 불러 볼까 하던 선우는 웃으며 입을 다물었다. 사람들의 눈초리가 부담스러웠는지 진호가 조그맣게 중얼거리며 선우의 팔에 얼굴을 묻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귀여워라. 자기를 의지하는 듯한 몸짓에 선우는 만족감을 느끼며 아직도 진호를 주시하고 있는 눈길을 따라갔다.
‘눈, 돌려.’
이젠 아주 대놓고 보고 있는 그들을 향해 싱긋 웃으며 입 모양으로 말하니 그제야 민망한 듯 고개를 돌린다. 그 모습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다시 앞을 보는데 때마침 내려야 하는 층에 도착해 문이 열리고 있었다.
선우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진호의 손목을 잡고 부드럽게 당겼다. 그리고 조금 멍한 표정으로 열심히 따라오는 진호가 귀여워서 부러 더 성큼성큼 걸었다. 말랑한 손을 충분히 느끼기 위해 그가 멍하니 있는 사이 깍지를 껴잡았다.
그러다 어느새 정신을 차린 건지 조금 꼼지락대던 작은 손은 이내 포기한 듯 저를 마주 잡아왔다. 선우는 진호의 그런 반응에 굳이 키스 마크 때문이 아니어도 오늘 쇼핑만 하겠다는 다짐은 못 지켰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 나 옷 안 필요한데. 집에 많은데….”
선우는 매장으로 끌려가면서도 혼자 꿍얼대는 진호를 힐끔 내려다봤다. 설마 백화점에 온 이유가 내 옷을 사는 거라고 생각했을 줄이야. 선우가 보기에 진호는 정말 보통 엉뚱한 것이 아니었다.
선우를 포함한 다섯 명이 각자의 시간을 할애해서 진호의 호감을 얻겠다고 선포한 것이 무려 며칠 전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놈들과 마음에 들지 않는 약속까지 하며 얻은 시간인데 그 시간에 진호를 쇼핑 들러리로 활용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았다.
선우는 진호가 작금의 상황을 의도적으로 외면하려고 하고 있거나,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영악하고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다면 어떻게든 이 상황을 이용하여 이득을 취하려고 했을 텐데.
예를 들어 지금과 같은 상황에선 기회를 잡은 듯 조금이라도 더 비싼 것을 요구하고 원하는 바를 이루려고 하겠지. 그러나 진호는 전혀 그러지 않았다. 선우는 그런 진호의 모습이 재밌으면서도 살짝 안타까웠으나 그는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치수 재는 건 제가 하겠습니다. 줄자 이리 주세요.”
선우는 감히 진호의 몸에 손을 대려고 했던 직원에게 빼앗듯 줄자를 받아들었다. 매장에 들어설 때부터 자꾸 같은 점원과 눈을 마주치며 살살 웃는 진호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선우는 시키는 대로 얌전히 자세를 잡는 모습에 마음이 풀리는 자신을 보며 조그맣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역시 영악하게 굴거나 이 상황을 무겁게 받아들이는 것보다는 어떻게든 쉽게, 가볍게 생각하려 하는 진호의 대처가 어찌 보면 가장 현명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냥 영악하게 구는 것도 나름의 재미가 있겠지만, 혹여나 자신이 처한 상황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서 이게 얼마나 비정상적인지 따지려고만 든다면, 그리고 영악한 머리를 굴려 도망가려고 한다면 오히려 더 큰 문제가 발생할 터였다. 그들에게가 아니라 진호에게.
기본적으로 선우를 포함한 다섯 명의 윤리관은 엉망진창인 편이었다. 되도록 상식적으로, 윤리적으로 살아가려고 하긴 하지만 원하는 바가 있고 그것이 딱히 서로에게 피해를 끼치는 일이 아니라면 비윤리적인 일을 하는 데에도 거리낌이 없었다.
멀리 볼 것도 없이 선우부터도 만약 인간성을 지키면서 진호를 가질 수 없을 것 같다는 판단이 서고, 그럼에도 한 번쯤 가져 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면 어떤 비윤리적인 짓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진호는 선우가 웃는 낯으로 얼마나 배배 꼬인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눈을 마주치자마자 하하, 하고 웃었다. 진호로서는 치수를 재느라 가까워진 선우가 자기를 빤히 보고 있으니 민망해서 낸 웃음소리였지만 선우는 진호에게 타고난 애교가 있는 것도 진호로서는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혹여나 거칠게 대해야만 하는 때가 올 때, 그의 애교가 그를 어느 정도는 지켜줄 것이다. 물론, 그 애교가 저렇게 아무에게나 발휘되는 것을 볼 땐 당장이라도 그 머리채를 잡아 그만을 보도록 만들고 싶어지지만 말이다.
선우는 자기 뒤에 있는 점원에게 알 수 없는 눈짓을 하며 방긋 웃는 진호를 또다시 일부러 애칭으로 불렀다. 또 잔뜩 붉어진 얼굴로 이제야 자신에게 집중하는 그의 볼을 치며 진심 어린 충고를 했다.
“자꾸 쓸데없이 다른 데 보고 그러면 신경 쓰이잖아요.”
물론, ‘계속 그렇게 신경 쓰이게 하면 진호 씨에게 결코 좋지만은 않을 거예요.’라는 뒷말은 생략했다. 오늘은 더 이상 진호를 겁먹게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러나 선우는 곧 말했어야 했나, 하고 조금 후회했다. 옷을 갈아입어 보라고 보냈더니 실실 웃으면서 직원의 귓가에 속닥거리는 진호를 보며, 선우는 결국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룸 예약 부탁드립니다. 30분 이내로 도착할 거예요.”
그가 애용하는 프라이빗 ‘카페’에 예약을 마친 그는 옷을 다 입었음에도 점원과 이야기하느라 미적대고 있는 진호의 뒤에 가서 섰다. 갑자기 가까워진 형체를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들던 점원은 선우의 무표정한 얼굴을 발견하고 얼굴을 굳혔다.
선우는 그런 점원을 계속 내려다보며 뒤를 돌아보려는 진호의 어깨를 잡아 힘으로 제지했다. 쇼핑은 끝났다. 이제 카페로 갈 시간이었다.
“건물이 너무 어두운거 아니에요? 아무 간판도 없는데….”
선우는 창문에 찰싹 붙어 중얼거리는 진호를 곁눈질하며 미소를 지었다. 선우가 예약한 곳은 ‘카페’라는 이름을 가진 호텔이었다. 같은 건물 지하에 있는 SM클럽의 VIP 회원에게만 이용 자격이 주어지는 곳인데, 일반인은 출입이 불가하다는 점 때문에 선우가 여러모로 애용하는 장소였다.
건물 자체가 방음을 최우선으로 설계되었고 창문도 모두 막아 놓았다. 그리고 내부 역시 조명을 최소한으로 사용하여 빈말로라도 밝다고 말할 수 없는 곳이었다. 선우는 진호에게 이런 것들을 자세히 이야기해 줄 생각이 없었다. 알려줘 봤자 좋을 것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각 방은 일반 호텔의 스위트룸처럼 꾸며져 있으므로 당연히 티테이블이 있었고, 룸서비스로 각종 음료도 주문할 수 있었다. 선우는 이런 서비스를 이용해 프라이빗 카페라고 속일 작정이었다.
진호를 안심시키기 위해 ‘룸 카페’라는 것이 있다는 정보도 이미 조사해 놓은 상태였다. 물론 직접 가 보진 않았기 때문에 비슷한 구석이 전혀 없다는 것을 선우는 몰랐다.
“인테리어가 꼭 공포 영화에나 나올 것 같다….”
진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두 손을 교차하여 팔을 감싸 안았다. 그리고 추운 듯 몸을 웅크렸다. 종을 울려 지배인을 부른 선우는 그런 진호를 보고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이 건물의 내부는 바깥의 계절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언제나 같은 온도로 설정되기 때문에 추울 리가 없었다.
그런데 진호는 급기야 몸을 떨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심상치 않아 보였던 선우는 주의를 분산 시키기 위해 일부러 더 말을 걸며 대화를 이어 갔다. 그러나 그런 노력도 무색하게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들리자마자 진호의 안색이 급격히 창백해졌다.
“잠…. 흐흡…, 후…. 잠깐….”
이젠 호흡마저 가빠지는 진호를 보고 선우는 인상을 찌푸리며 그에게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가자 진호가 얼마나 심하게 떨고 있는지가 느껴졌다. 선우는 본인의 양팔을 붙잡고 있는 진호의 손 위로 조심스레 손을 올려놓았다.
“진호야.”
진호는 선우가 지척에서 이름을 부르는데도 대답은커녕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대로 얼어 버린 사람처럼 같은 곳만 보면서 입으로는 계속 영문 모를 소리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선우는 진호가 뭘 보고 그러는 건지 확인하기 위해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그들을 방으로 안내하기 위해 다가오고 있는 카페의 지배인이 있었다. 단정한 정장 차림의 그도 손님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확인했는지 걸음걸이를 조금 빠르게 했다. 그러자 굳은 것처럼 있던 진호가 경기를 일으키며 움직였다.
“무, 무서, 힉, 워. 무서워. 갈, 갈래요…!”
선우는 반사적으로 진호를 끌어안았다. 뒤를 돌아 엘리베이터로 가려던 진호는 앞이 가로막힌 것에 더 겁을 먹었는지 발버둥을 치기 시작했다. 선우는 허리를 잡고 있던 팔을 더 옥죄고 남은 한 손으로 허우적거리던 진호의 두 손을 한꺼번에 잡았다. 진호의 등이 선우의 가슴에 밀착되었다.
꽉 조이는 느낌이 안정감을 준 것일까, 떨림이 아주 조금 잦아들었다. 선우는 그 틈을 타 진호의 몸을 돌려 마주보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다시 발버둥 칠 것을 막기 위해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게 한 채로 허리를 팔로 감싸 잡아당겼다.
“민, 민선우?”
“그래, 진호야. 나야.”
선우는 이 와중에도 자신을 알아보는 모습에 만족스러운 나머지 웃음이 나올 뻔한 것을 꾹 참았다. 여전히 숨 쉬는 법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구는 진호의 턱을 들어 올려 숨을 쉬라고 속삭였다. 진호는 새파래진 입술을 벌려 공기를 들이마셨다. 그러나 뭔가에 막힌 것처럼 자꾸 깊게 들이쉬지 못하고 뱉어 내 버렸다.
“아, 아프, 힉, 무서, 워요. 무, 서워.”
“쉬-. 나비야, 착하지. 내가 여기 있잖아.”
진호는 겁에 질린 어린아이 같이 온 얼굴이 젖도록 눈물을 흘렸다. 선우는 그 모습이 안타까워 눈가에 입을 맞추며 진호의 호흡을 돕기 위해 천천히 등을 쓸어내렸다.
“아냐, 아, 냐. 나는 놔 두, 놔 두고 가잖아. 흐흡 나는, 나는 혼자 가야 해서, 그래서 그래요. 지금 갈래. 아아, 벌써, 왔, 가야 하는, 데.”
“김진호!”
조금 잦아드는 것 같던 떨림이 다시 심해지면서 진호가 발버둥 쳤다. 순간 방심했던 선우는 놓칠 뻔했지만 다행히 팔이 완전히 풀리기 전에 다시 힘을 주어 끌어당길 수 있었다. 두 손이 자유로워진 진호는 자신의 두 귀를 막고 가까워지고 있다고 소리를 질렀다.
선우는 아까 진호가 지배인을 보고 있던 것을 떠올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어느새 근처까지 온 지배인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 지배인은 그것만으로도 알아들었는지 바로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진호야, 나 봐. 내가 못 오게 했어. 이제 안 와. 착하지? 나 봐, 진호야.”
선우는 달래듯 속삭이며 그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 진호는 겁에 질려 초점이 없었던 아까와는 다르게 원망스러운 빛이 또렷한 눈동자로 그를 올려다봤다.
“너, 싫어. 너는 가 버, 가 버릴 거야. 힉, 알아 나는, 나….”
그 말을 끝으로 눈이 감기고 고개가 젖혀지면서, 몸의 힘이 빠졌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