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기분 나빠. 무서워. 갈래. 집에 갈래.
순간 머리를 강타한 생각에 얼어있는 다리를 억지로 움직여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몇 걸음 가기도 전에 두껍고 단단한 뭔가가 허리에 걸렸다.
뭐야, 뭔데. 갈 거야. 나 가게 해줘. 살려줘. 다급하게 뒤를 도는데 내 허리께를 막았던 단단한 것이 나를 감싸 당긴다. 그리고 따뜻한 무언가가 턱을 들어 올렸다.
손? …민선우?
“숨 쉬어야지, 나비야.”
녀석이 뭐라고 말하는 것 같은데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냥 모든 것이 너무 무서웠다. 살기 위해 당장 도망가야 할 것 같았다. 벗어나야한다는 생각에 횡설수설 아무 말이나 나오는 대로 뱉으며 발버둥 쳤지만 계속 제자리였다.
손으로 귀를 막았는데도 들리는 발소리에 소름이 끼쳤다. 그 소리에서 멀어지기 위해 뒤돌아 가려고 하는데 나를 옭아맨 단단한 줄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냐, 아니야. 시야 가득 들어오는 민선우의 얼굴이 보기 싫어 도리질을 쳐 보지만 그럴수록 턱에 가해지는 힘이 강해진다. 너 싫어. 너는 가 버, 가 버릴 거야. 알아, 나, 나는. 나는….
결국 할 수 있는 건 눈을 감는 것이었다. 눈앞이 어두워졌다. 숨이 가빠졌다. 귓가에 탕- 하는 소리가 환청처럼 들리고, 시야가 암전되었다.
* * *
‘진호야, 이거 가질래?’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가 주는 것은 받아야 했고, 받고 싶었다. 내 세상에서 가장 다정했던 사람. 그러나 가장 미워해야 했던 사람.
왜 그를 미워해야 했는지 나에게 말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나는 언제나 눈치가 빨라야 하는 아이였으니까. 살아남기 위해, 사랑받기 위해.
물론 결과적으로 사랑을 받을 정도로 눈치 빠른 아이가 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어쨌든 살아남았으니 그렇게 없는 편은 아니었나 보다, 생각할 뿐이다.
‘나도 디즈니 영화 중에 이게 가장 재밌더라. 우리 취향이 같나 보다, 그치?’
나는 더없이 해맑은 얼굴로 내 머리를 흐트러트리는 그를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저 사람은 행복해 보인다. 자기 취향에 공감해 주는 사람이 있어서일까, 아니면 내가 더 이상 그를 피하지 않아서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그는 선물을 매개로 죄책감을 덜어 내어 마음이 편해진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 테이프를 손에 쥐는 순간 두 사람의 얼굴에 떠오르는 표정을 보며 또 한 번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무언가를 받는다는 것은 나 또한 무언가를 내 줘야 한다는 것.
그는 나에게 비디오테이프와 티 낼 수 없는 기쁨과 인정하면 안 되는 행복을 주었다. 그 대가로 나는 그에게 약간의 면죄부와 안도, 그리고 티 없는 행복을 주었다.
어린 내가 생각하기에도 지극히 부당한 거래였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가 손에 쥐고 있는 패는 내가 어찌 해 볼 수 없는 매우 강력한 조커였기 때문이다.
무기력함에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내 머리에 닿아 있는 온기가 낯설고도 따뜻해서 웃음이 나왔다. 내가 가장 미워해야 했던, 내 세상에서 가장 다정했던 사람.
채예령은 그 사람을 ‘여우 새끼’라고 불렀지만 나는 그를 그렇게 부르고 싶지 않았다. 그게 못내 화가 나면서도 서러웠다.
* * *
추워.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몸이 들리더니 온기가 느껴지는 무언가 위에 올려졌다. 품안에 가득 안기는 따뜻한 기운. 무언가 아련하면서도 서러운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는데, 이젠 안개가 자욱이 낀 공간에 갇혀 있는 느낌이다.
지금 나는 자고 있는 건가, 아니면 깨어 있는 건가.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며 따뜻한 곳에 볼을 비비적대고 있는데 엉덩이께를 토닥이는 손길이 느껴졌다.
괜찮아, 나비야. 괜찮아.
나지막이 들려오는 목소리의 울림. 그 울림에 서려 있는 다정한 기운에 눈물이 난다. 아니, 원래도 흘리고 있었나? 움직여지지 않는 손을 억지로 들어 얼굴에 가져다 대니 온 얼굴이 이미 축축하게 젖어 있다.
아, 나 울었구나. 또 울었구나. 이상하게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서러움이 북받쳐 올라 더 눈물이 났다.
쉬-. 뭐가 그렇게 서러울까, 우리 진호.
그만 울자 나비야. 눈가 다 짓무르겠다. 그렇게 말하면서 눈을 비비는 내 손을 떼어 내는 손길에, 나는 저항하지 않았다. 그러자 칭찬하듯 쓰라린 눈가에 부드러운 입술이 닿아 왔다. 나도 그만 울고 싶어. 그만 슬프고 싶어. 아프기 싫어. 힘들기 싫어.
차마 입 밖으로 내뱉어지지 않는 말들이 헛구역질처럼 욱욱하는 소리가 되어 나왔다. 이러다 또 토하면 혼나는데. 화장실, 화장실에 가야해. 다급한 마음에 눈을 뜨니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던 안개가 걷히고 시야가 또렷해졌다.
눈앞에는 탄탄한 가슴이 있었다. …가슴?
“일어났어?”
“우욱….”
어찌 된 일인지 나는 민선우의 무릎 위에 앉아 있었지만, 지금은 거기에 놀라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일단 화장실에 가야 해. 그 일념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커다란 두 손이 내 허리를 잡고 일어서지 못하게 막았다.
아니, 놓으라고. 나 지금 진짜 토할…!
“우웨에에에엑-.”
“…….”
나는 시원하게 게워내자마자 맑아지는 정신을 느끼며 눈앞의 고급스러운 니트 위에 범벅된 토사물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봤다. 저질러 버렸다. 이 와중에 토했다고 또 명치는 더럽게 아프다. 하지만 아픈 걸 어쩔 생각도 못하고 쫄아서 눈치를 보고 있자니 아직도 내 허리를 잡고 있던 손이 움직인다.
순간 때리려나 싶어 크게 흠칫한 것이 무색하게, 큰 손은 내 명치 부근을 살살 둥글리듯 문질러 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른 한 손은 뒤로 허리를 감아 무릎 끝 쪽으로 슬금슬금 빼고 있던 엉덩이를 콱 쥐고 앞으로 잡아당겼다.
“아파요?”
당황한 것도 잠시. 묻는 목소리가 너무 여상스러워서 나도 모르게 홀리듯 고개를 끄덕이며 위를 올려다보니, 다정한 미소를 띤 민선우의 얼굴이 보였다.
뭐야, 왜 아무렇지도 않아 보여? 놔 달라고 했는데 지가 안 놔 준 거니까 화는 안 낸다고 치더라도, 난감한 표정 정도는 짓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괜찮아요. 옷이야 새로 사면 되고, 몸은 씻으면 되죠.”
그 말에 나는 문제는 이 상태로 집에 가야 된다는 거 아니냐고 말하고 싶었으나 따라붙는 말에 그냥 입을 다물었다.
“여기 프론트에 얘기하면 옷 마련해서 가져와 줄 거예요.”
너무 당연한 듯이 하는 말에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려다가 멈췄다.
“…카페에서요?”
“네. 카페에서요.”
내 의심이 가득 담긴 눈초리에도 녀석은 안색 하나 바꾸지 않고 대답했다. 나는 민선우가 어디까지 가나 보자는 심정으로 맞장구치듯 말을 이었다.
“어…. 그럼 말하는 김에 물티슈나 이런 것도 달라고 하는 게….”
“아-. 그런 것보단 나비 아픈 거 가라앉는 대로 씻을 생각이에요. 이 방에 구비된 샤워실이 나름 괜찮거든요.”
“…방…?”
“아, 실수. 방이 아니라 카페 개인실이요.”
그만해라, 이 새끼야…. 프론트라고 한 시점에서 이미 글러 먹었어, 인마.
* * *
선우는 오늘 정말 쇼핑만 할 예정이었다. 저번에 태혁에게 안겨 있던 진호의 모습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 내심 이런저런 짓을 하고 싶었지만 ‘그’ 협약 이후 처음 맞는 둘만의 시간이었으니 경계심을 심어줄 만한 행동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부러 실외에서 보자고 했다. 그러나 그 계획은 진호의 쇄골에 붙어 있던 수상한 반창고와 그 밑에 있던 키스 마크를 보는 순간 전면 수정되었다.
“어어, 왜 안 들어가지?”
주차를 마치고 진호가 있는 쪽 문을 열어 주기 위해 먼저 내리려는 선우의 귀에 진호가 당황스러운 듯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무슨 일인가 싶어 다시 자리에 앉은 선우가 미처 무언가를 하기도 전에 휘리릭- 하는 마찰음이 났다.
“아, 으…. 쓰라려.”
선우는 이제 완전히 진호 쪽으로 상체를 돌린 채 그가 손으로 감싸고 있는 부분을 주시하고 있었다. 안전벨트를 풀려다가 놓친 건가. 어디 한번 보자고 말하려는데 진호가 한발 빠르게 행동했다.
“여기 쓰라려서 그러는데 혹시 상처 났어요?”
선우에게 쓰라린 부위를 더 자세히 보여주기 위해 한껏 턱을 치켜든 진호가 귀여웠던 선우는 피식 웃으며 시선을 내렸다. 더 자세히 보기 위해 진호의 턱을 잡고 요리조리 돌리면서 봤지만, 특별히 상처가 보이지는 않았다.
흐음-. 어떻게 할까.
선우는 괜찮다는 말에 활짝 웃는 진호를 보고 싶은 마음과 상처가 있다고 했을 때 지을 울상을 보고 싶다는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여전히 한껏 치켜든 턱에서 더 시선을 내리며 목을 훑는데, 이상한 것이 눈에 띄었다. 반창고. 반창고는 진호의 쇄골 위에 붙어 있었다.
“왜 아무 말도 없어요? 상처 심해요? 혹시 피나요?”
한참을 조용한 선우의 반응에 불안해진 진호는 대답을 재촉했다. 그는 이제 근처에만 다가가도 통증을 느끼는 사람처럼 아픈 곳을 가리키느라 얹어 놨던 손가락도 떼 내고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선우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려 아까부터 거슬렸던 반창고를 떼어 버렸다. 역시. 그가 예상한 대로 반창고 밑에는 선명한 키스 마크가 자리하고 있었다. 선우는 서서히 올라오는 분노에 이를 악물며 상처 걱정에 호들갑을 떠느라 반창고가 떼지는 줄도 모르고 여전히 시끄러운 진호에게 질문했다.
그러자 우왕좌왕하던 진호의 손이 우뚝 멈추며, 들렸던 고개가 천천히 내려왔다. 진호의 흔들리는 눈이 선우가 들고 있는 반창고로 향했다. 그 순간 반창고가 붙어 있던 자리를 정확히 가리는 진호의 손을 보던 선우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턱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혀, 형. 아파요. 좀 놔 주, 세요.”
진호는 양손으로 낑낑대며 선우의 손을 잡아당겼다. 퍽 귀여워 보이는 행동이었음에도 머리끝까지 분노한 선우는 져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는 다시 한번 천천히 물었다. 못 알아들을 수 없는 속도와 또박또박한 말투에 진호는 입술을 한 번 깨물더니 눈을 질끈 감고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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