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아, 그건 제가 할게요. 주세요.”
여긴 어디. 나는 누구.
분명 아까 말도 안 되는 개소리를 속삭였던 민선우는 화들짝 놀라며 귀를 덮은 내 어깨를 감싸더니 자연스레 매장 안으로 들어와 버렸다.
저 멀리서도 민선우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네던 매장 직원은 정말 함박웃음을 지으며 우리를 반겨 주더니 우리 옆에서 세 발자국 이상 떨어지지 않을 기세로 쫓아왔다.
와, 망했네. 매장에 발을 들여놓은 순간 내 머리에 든 생각이었다.
“진호 씨, 팔 들어 볼래요?”
다리에 힘을 주며 그만 걸으려는 나의 어깨를 꾸욱 쥐고 마찬가지로 힘으로 밀어붙이던 민선우는 좋아하실 만한 디자인의 상품이 들어왔다는 직원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제 걸 사는 게 아니라서요. 우선 치수를 좀 재야 할 것 같은데 준비해 주시겠어요?”
그렇게 말하자 잠시만 기다리라던 직원은 줄자를 챙겨와 억지로 소파에 앉혀진 나에게 다가왔다. 아니, 정확히는 다가오려고 했다. 내가 도망이라도 갈 거 같았는지 옆에 장승처럼 서 있던 민선우가 그에게 손을 내밀며 제지하기 전까지는.
나는 줄자를 넘겨받는 놈을 보며 이마를 짚었다. 이게 대체 뭔 상황이야. 고집을 부려 볼까 생각했지만 조금 당황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상황 파악을 위해 눈을 굴리는 직원을 보고 있자니 차마 할 수 없었다.
그래, 일단 시키는 대로 하고 따지는 건 나가서 해야겠다.
“끈이 잘 어울리네요.”
줄자로 여기저기 치수를 재던 녀석은 나지막이 헛소리를 속삭였다. 뭔 소리야 저건 또. 할 말이 없던 나는 떨떠름하게 그거 좋은 거예요? 하고 물었지만 돌아온 대답은 ‘훗’ 하는 웃음소리였다.
이 새끼가 진짜. 사람을 이렇게 대놓고 비웃네. 뒤에서 민선우가 불러 주는 숫자를 받아 적던 직원도 웃겼는지 얼굴이 붉어진다. 그냥 웃어도 되는데 일이란 게 참 고되요. 그쵸?
“나비야, 집중해야지.”
아무래도 민선우의 수치심은 말라비틀어진 모양이다. 아까 엘리베이터에서도 그러더니, 또 다른 사람이 근거리에 있는 걸 알면서도 나를 ‘나비’라고 부르는 것을 보고 확신했다. 그가 말을 뱉자마자 옆에서 ‘풉’ 하는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도 민선우는 아주 천연덕스럽게 내 치수를 재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녀석과 달리 수치심을 너무 잘 아는 사람이라서 부끄러워 미칠 것 같았다. 말한 사람은 민선우인데 창피는 내 몫인 이상한 상황. 나는 웃음 참기가 영 힘든지 점점 얼굴이 빨개지는 직원분의 눈초리를 피해 고개를 숙여 버렸다. 내 시야에는 이제 내 치수를 재느라 허리를 잔뜩 굽힌 민선우만 있었다.
“그래, 그렇게. 자꾸 쓸데없이 다른 데 보고 그러면 신경 쓰이잖아요.”
나는 어이가 없는 마음을 가득 담아 녀석을 보고 있었는데 그게 좋았는지 녀석은 내 볼을 톡톡 치며 싱긋 웃었다. 얘가 다섯 명 중에 가장 친해지기 쉬웠다는 채예령 새끼 나와. 알면 알수록 도통 모르겠는데 뭐가 쉬워!
“오늘은 심플한 셔츠랑 바지, 구두 정도만 가져와 주실래요? 이거저것 입어 보긴 시간이 별로 없어서, 그냥 두 세 개씩만 보여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아, 선이 너무 드러나지 않는 것들로 부탁드려요. 직원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알겠다며 뒤에 서 있는 다른 직원에게 상품명으로 보이는 이름을 몇 개 말하더니 나에게 커피와 물 중에 어떤 게 좋은지 물어왔다.
와, 이런 데 오면 커피도 주는구나. 나는 드라마에서나 봤던 상황에 조금 들뜨는 것을 느꼈다. 이런 기회는 놓칠 수 없지. 나는 커….
“물 주세요. 진호 씨도 물 마실 거죠?”
아닌데, 이 새끼야. 아니라고. 나 커피 마실 거였다고. 나름 설레는 마음으로 커피를 주문하려던 나를 갑자기 민선우가 방해했다. 인상을 찌푸리며 항의하려는데, 민선우가 웃으면서 내 입을 톡톡 친다. 나는 이게 무슨 짓인가 싶어서 녀석의 손가락을 피해 획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녀석을 흘겨봤다.
“그런 걸 달고 온 걸 보니까 자제가 안 돼서 그래.”
“네…?”
“말씀하신 스타일로 가져왔습니다. 이쪽부터 입어 보실까요?”
“가서 입어 보고 와요.”
타이밍 무엇. 내용은 둘째 치고 갑자기 등골 오싹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민선우의 표정에 놀라서 되묻는데 직원이 마침 옷을 가지고 등장했다. 휴, 다행이다. 뭔지 모르겠지만 강하게 드는 안도감을 느끼며 냉큼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내하는 곳으로 들어가 옷을 입어 보는데 입어본 적 없는 정장 스타일의 셔츠와 바지였다. 약간 교복 셔츠 같은 느낌도 나고. 그러고 보니 나 취직 준비해야 한다면서 정장 한 벌 산 기억이 없네.
회귀 전에 면접을 보러 갈 때도 집에 방치되어 있던 아버지 정장을 입고 갔었다. 기억은 안 나지만 대충 붙고 나서 월급 받으면 제대로 된 걸 사자, 생각했던 것 같다. 그때의 나는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되게 돈에 쪼들렸으니까.
취직 준비한다고 일하는 시간을 줄여서 수입은 줄었는데 보내는 돈을 늘려 달라는 말에 차마 안 된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하고 싶지 않기도 했고.
“불편하지는 않으세요?”
“아…. 그렇지는 않은데요.”
셔츠를 입고 나오자마자 대기하고 있던 직원이 바로 와서 묻는 질문에 대답이 영 떨떠름하게 나갔다.
살에 닿는 촉감이며, 품도 적당한 게 절대 불편한 건 아니었는데 이상하게 좋다는 말이 나가지 않았다. 뭔가 불편해. 왜인지 슬금슬금 몰려드는 불쾌한 감정이 스스로도 당황스러워서 입술을 짓씹는데 민선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입어 보니까 어때요? 괜찮은 거 같아요?”
“뭐, 나쁘지는 않은데요…. 가, 아니라 좋아요! 딴 거 안 가져와도 돼요!”
와, 반사 신경 장난 아니네, 여기 직원. 나쁘지 않다고 말하자마자 다른 걸 더 보여 드릴까요- 하면서 뒤돌아서는 걸 겨우 멈춰 세웠다.
나는 직원을 보며 다시 한번 좋아요. 아주 매우, 하고 강조를 했다. 그 말을 들은 직원은 나를 보고 살짝 안도하는 것 같더니 내 뒤를 힐끔거리자마자 얼굴을 확 굳혔다.
응? 왜? 무슨 일인데? 갑작스런 표정 변화에 뭐야 싶어서 그 시선을 따라 뒤를 돌아보려는데 어깨에 뭔가 닿는 것이 느껴졌다.
“저희 짐 좀 정리해서 담아 주시겠어요?”
“형?”
“계산은 이미 했으니까 그대로 입고 갈게요.”
“잠, 잠깐만요. 형!”
역시 온기의 주인은 민선우였다. 내 뒤로 밀착한 녀석은 나긋한 목소리로 직원에게 지시했다. 하얗게 질려 가던 직원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잠시만 기다려 달라면서 사라졌다.
짐이래봤자 내 옷이랑 가방 정도인데 직접 챙기면 되는 걸 굳이 남한테 시키냐고 말하기 위해 뒤를 돌려는데 어깨에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몇 번 더 빠져나가려 시도했지만 그때마다 강해지는 아귀힘에 어깨가 점점 아파졌다.
신속하게 내 짐과 옷을 쇼핑백에 넣는 직원을 보고 있는데 한숨이 절로 나왔다. 문제는 이 옷만 산 게 아닌지 이쪽으로 다가오는 직원 손엔 쇼핑백 하나가 더 들려 있었다.
“가자, 나비야.”
그래…. 그냥 니 좆대로 해라, 그냥.
“여기가 카페라고요…?”
생각보다 빨리 쇼핑을 마치고 다시 차에 올라탈 때까지 민선우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내 안전벨트를 매 줄 때조차 아무 말도 안 하는 녀석 때문에 괜히 눈치를 보던 나는 그 어색함에 뭐라도 말해야할 것 같아 어디에 가는 거냐는 질문을 던졌다. 그때 민선우는 분명히 카페라고 답했다.
카페. 주로 커피 등의 음료를 마시러 가는 곳. 나는 그래서 아까 커피를 못 마시게 한 건가? 하는 속 편한 생각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는데. 이거 뭐야. 여기 뭔데. 이게 카페라고?
카페라고 하면 생각나는 이미지가 있다. 넓은 공간에 가지런히 있는 테이블과 의자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들려오는 밝은 톤의 인사. 탁 트인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 각자 할 일을 하거나, 같이 온 일행과 마주 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 그게 내가 생각하는 카페였다. 그런데 민선우가 카페라고 데려온 곳은 그런 게 정말 단 하나도 없었다.
밖으로 보이는 창문 하나 없는 새까만 건물에 들어올 때부터 이상하다 했다. 아니, 이런 건물에 카페가 있다고? 하면서도 거의 텅 빈 지하 주차장에 주차를 마친 민선우를 따라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렸는데, 내리자마자 머리 위에 물음표 백 개가 떠올랐다.
정말로 창문이 하나도 없는 것인지 햇살 대신 은은한 전등 빛이 맴도는 검은색 복도에는 작은 테이블과 종 하나가 놓여 있었다.
아, 이런 분위기 정말 별로인데.
“네, 카페예요.”
어딘가 마음에 들지 않는 분위기에 손에 땀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입고 있는 셔츠가 목덜미를 점점 조여 오는 느낌.
그냥 딴 데 가자고 말하려던 찰나 테이블로 걸어간 민선우가 종을 집어 들었다. 여긴 뭐 점원도 없나? 오소소 닭살이 돋아 오르는 팔을 쓸어내리면서 일부러 이리저리 기웃대는데, 진짜 뭐가 없다.
저 문들은 뭐람. 다 방인 건가? 카페가 아니라 그냥 호텔 같은데? 그것도 공포 영화에 나오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찰나, 맑은 소리가 들렸다. 민선우가 종을 울린 것이다.
“아무리 봐도 좀 이상한데. 카페 맞아요?”
“하하, 맞아요. 개인실만 운영하는 카페라서 다른 데랑 분위기가 좀 달라요. 이제 조금 있으면 점원이 와서 예약한 방으로 안내해 줄 거예요. 근데 진호 씨, 추워요? 왜 이렇게 떨어요?”
추운 게 아니라 기분이 나쁘다. 너무 어두워, 여기. 그러나 어둠이 무섭다는 어린애 같은 말을 할 생각이 전혀 없던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에어컨이 좀 빵빵한가 보네요. 이상하게 춥네.”
“그래요? 그럼 우리 방은 에어컨 꺼 달라고 얘기할게요.”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복도 끝에서 검은색 정장 차림을 한 사람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아, 씨발. 가까스로 가라앉고 있던 닭살이 다시금 돋는 게 느껴진다.
어두운 공간, 어두운 창고. 주황색 전등, 깜박이는 불빛. 귓가에 크게 울리기 시작하는 뚜벅뚜벅 소리에 숨이 가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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