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호 이야기-56화 (56/234)

56화

반창고는 어느새 떨어져 민선우의 손에 들려 있었다. 약국에서 제일 싸서 샀던 반창고는 접착력이 그렇게 좋지는 않았나 보다. 뜯는 느낌도 나지 않다니….

나는 턱에 가해지는 힘이 점점 세지는 것을 느끼며 순간 무서운 마음에 양손으로 얼른 민선우의 손과 손목을 잡고 떼어 내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묻고 있잖아요, 나비야. 내가.”

민선우의 표정은 이상하게 미소를 띠고 있음에도 빡쳐 보였다. 큰일이다. 미쳤다. 나는 어떻게든 그를 진정 시키고자 그의 손과 손목을 살살 쓰다듬었다. 안 그러면 잡힌 턱이 당장이라도 박살 날 것 같았다.

“별건 아니고요, 이게 그러니까 어떻게 된 거냐면요….”

나는 진땀을 빼면서 그날의 자초지종을 아주! 아아주 간략하게 설명했다. 자세하게 말하지 않았던 건 상황의 급박함 때문도 있었고, 말을 할수록 미묘하게 민선우의 입꼬리가 부들부들 떨리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키스 마크라는 거네요, 이게?”

“네? 아, 그게 말하자면 그런 거긴 한데, 그렇게 부르기보다는 그냥 남궁호 같이 생긴 모기한테 물린 거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물린 게 아니라 빨린 거겠죠. 아니, 물리고 빨린 건가?”

아니, 그렇게 말하면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하냐고. 거기다 대고 내가 ‘그렇죠! 물리기도 하고 빨리기도 했으니까 엄밀히 말하면 그런 거죠!’하며 눈을 찡긋거릴 수는 없잖니?

나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고개라도 갸우뚱하려고 했으나 턱을 잡고 있는 민선우의 손이 허락해 주지 않았다.

난감한 상황에 식은땀이 다 나는 듯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문득 떠오른 생각에 반발심이 들었다.

…근데 잠깐. 나 왜 쫄아야 해? 얘랑 나랑 무슨 사이도 아닌데, 내가 이렇게까지 저자세로 눈치 볼 일인가, 이게? 생각할수록 억울해져서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그…, 형. 일단 이거 놓고 얘기를….”

“…오늘은 봐주려고 했는데.”

“에…. 네? 방금 뭐라고….”

“아뇨. 별말 안했어요. 일단 알았습니다. 이건 떨어졌으니까 저기서 새 거 꺼내서 붙이세요.”

치솟는 억울함에 소심한 반항을 해 보려고 하자마자 뭐라고 작게 중얼거린 민선우는 싱겁게 물러섰다.

내 턱은 자유를 찾았고, 더불어 비싸 보이는 반창고도 하나 얻었다.

차 안에 반창고 같은 걸 구비해 놓다니. 준비성이 철저하군, 민선우. 지나간 일에 연연하지 말자는 주의인 나는 방금 전까지 맴돌았던 싸늘한 분위기를 털어버리고 다시 신나는 마음으로 차에서 내렸다.

턱은 그 난리 통을 겪고 나니 쓰라린 게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가볍게 스친 거였나 보다.

후후, 백화점 쇼핑이라니. 물론 서민인 나는 하나도 사지 않을 예정이지만, 민선우 하는 거 옆에서 구경만 하더라도 재밌을 것 같다.

“오늘 뭐 살 거예요, 형?”

“음, 글쎄요. 필요한 거 있어요?”

“네? 저요?”

네. 나비요. 민선우는 태연히 답했다.

…쟤는 나를 나비라고 부르기로 정한 건가. 아니, 뭐. 곰돌이라고도 불리는 마당에 나비면 양반인 거 같긴 한데….

나는 옆에서 슬쩍 힐끔거리는 커플의 눈초리를 느끼며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려버렸다.

아씨, 쪽팔려. 여기 엘리베이터고 우리 둘만 있는 것도 아니라고! 얼굴이 붉어지지 않았기만을 바라며 커플이 내리길 기다리는데 갑자기 커다란 손이 손목을 잡고 당겼다. 여기서 나를 잡아당길 사람은 민선우밖에 없으니 순순히 이끄는 대로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후, 살았네. 민선우도 쪽팔려서 그냥 아무 데서나 내린 건가? 표정을 확인해 보려고 고개를 젖혔는데, 손목이 잡힌 채로 민선우의 뒤를 쫓아가는 중이라 아쉽게도 보이는 건 녀석의 뒤통수뿐이다.

뭐, 보지 않아도 성큼성큼 자기 집인 양 걸어가는 모양새를 봐선 원래 이 층에 내리려던 거였나 보네, 싶긴 하다.

아니, 근데 얜 어느새 깍지까지 낀 거야. 이놈이고 저놈이고 할 거 없이 손 엄청 빠르네, 진짜.

손목을 잡고 있던 손가락이 눈치채고 보니까 내 손가락 사이에 단단히도 얽혀 있었다. 나는 몇 번 놓으려고 꼼지락대다가 안 되겠다 싶어 그냥 포기하고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래. 어차피 얘가 가자는 데 갈 건데 그냥 편하게 끌고 가게 내버려 두고 나는 구경이나 하지 뭐. 넓고 조용한 층에는 한적할 정도로 사람이 없어서 한눈팔고 걸어도 부딪힐 일도 없을 것 같았다.

마음 놓고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는데 하나같이 유명한 브랜드의 이름만 보인다. 넓고 깔끔한 매장에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듯 공간의 여백을 살린 디피. 전시된 옷이나 가방 또한 번쩍번쩍해 보였다.

명품 같은 거에 전혀 관심이 없는 나도 알고 있을 정도면 진짜 어마어마한 브랜드일 텐데, 그 사이를 민선우는 아주 위풍당당하게도 걸어갔다. 이 녀석 옷은 다 이런 데서 샀겠지, 하는 생각과 동시에 그래서 옷 세탁법이 그렇게 까다로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진호 씨는 좋아하는 브랜드 있어요?”

“네?”

여기에서…? 있겠냐…? 나는 옷에 관심을 가져 본 적이 없다. 어렸을 때는 어머니가 사다 준 걸 입기만 했고, 성인이 되고부터는 가격 따져 가면서 사느라 지상에서 옷을 사 본 적이 없었다.

아, 그럼 내가 선호하는 브랜드는 지하상가인 건가? 아무튼 애초 옷에는 관심이 없었는데, 가격 생각까지 시작하고 나서는 소위 말해 이름이 붙어 있는 옷엔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런 내가 여기 있는 브랜드에 대해 좋아한다, 만다를 말할 수 있을 턱이 없다.

나는 그럴 필요 없는 걸 알면서도 왠지 민망한 마음에 슬쩍 눈을 다른 데로 굴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예상치 못하게 민선우는 반색했다.

“아, 잘됐네요. 특별히 선호하는 게 없으면 제가 몇 개 골라 줘도 될까요?”

“네?”

“진호 씨가 입어 줬으면 하는 스타일이 있었거든요.”

“네?”

나? 내 거 산다고? 나는 생각지도 못한 소리에 멍하니 되물었다. 그냥 쇼핑하러 가자길래 당연히 자기 옷을 산다는 소리인 줄 알았다. 한동안 집에만 있었기 때문에 나가자는 말에 혹한 것 반, 민선우는 뭔가 번쩍번쩍한 곳에서 옷을 살 거 같아 옆에서 구경이나 하려고 했던 마음 반으로 따라온 것이었다. 내 옷을 사려는 마음은 하나도 없었다는 말이다.

거기다 민선우가 골라 주는 옷이라면 분명 비싼 옷일 텐데 나는 그걸 살 만한 돈이 없었다. 최근 이런저런 일로 통장 잔고가 전에 없이 풍족하다고는 하지만, 지금 여기 있는 브랜드들의 옷을 살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나는 손이 땀으로 축축해지는 것을 느끼며 흔들리는 눈으로 민선우를 올려다봤다.

“하하, 그 표정은 뭐예요. 귀엽긴 한데 먼지 들어가니까 입은 다물도록 합시다.”

나도 모르게 당황해서 입이 벌어졌나 보다. 볼을 톡 치는 손가락에 파드득 정신을 차리고 얼른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아직 당황은 가시질 않아서 스스로 느끼기에도 손에 땀이 흥건해지고 있었다.

나는 메고 있던 크로스백의 끈을 꽉 쥐고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이 사태를 어쩌지. 도망갈까. 아니, 적어도 세일하는 상품 진열하는 데라도 찾아볼까. 이런 거 살 돈이 없다고 말하는 게 가장 빠르고 손 쉬우려나?

“응? 진호 씨 돈을 왜 써요. 오늘은 내가 진호 씨한테 선물하고 싶어서 온 건데. 당연히 제가 사야죠.”

“네?”

민선우는 자기 할 말만 하더니 다시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다. 나도 자꾸 ‘네?’라는 말만 하는 내가 바보 같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무슨 말인지는 이해가 되는데, 의도는 이해가 되지 않아서 나도 모르게 자꾸 되묻는 말이 나갔다.

갑자기 내 옷을 사 준다니,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쟤가 내 걸 왜 사. 이렇게 비싼 옷을 내가 너한테 왜 받아. 나는 민선우에게 끌려가던 것을 멈추고 놈의 손을 잡아당겼다. 민선우가 가던 방향 끝에 있는 매장에서 놈을 알아본 건지 직원이 나와 인사를 하던 참이었다.

와, 웃는 얼굴부터 친절해. 일단 들어가면 우리 옆에서 절대 안 떨어지고 잘해주려 할 것 같아서, 들어가기 전에 얘기를 해야 할 거 같았다.

“왜요?”

나는 뒤돌아서 묻는 민선우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숙여 달라고 했다.

“형, 내 거 산다고요? 왜요? 형이 살 거 있다고 해서 온 거잖아요, 여기!”

“살 거 있다고 그랬지, 내 거 산다고는 안 했어요. 나.”

“아니, 그러니까 왜 내 걸 사러 여기까지 오자고 한 거냐고요, 갑자기!”

“입혀 보고 싶은 옷이 있기도 했고, 다음 일정에 필요하기도 하니까요?”

연속적으로 던지는 질문에도 준비한 것처럼 답이 척척 나왔다. 나는 조금이라도 진지하게 응해주기를 바랐는데, 놈은 오히려 눈가를 접어 웃었다.

“근데, 이 말을 이렇게 속삭이면서 해야 하는 거예요? 귀 깨물고 싶어지는데.”

* * *

‘진호야, 너 이거 가져.’

그 말과 함께 놈은 내 앞에 최신 기종의 게임기를 들이밀었다. 어린 내가 생각하기에도 받으면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이 팍 오는 물건이었다. 근데 받았다. 채예령의 은근한 고집에는 이미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던 시점이었기 때문이었다.

안 받는다고 해 봤자 무슨 이유를 대서든 결국 내 손에 들려 보낼 거란 것을 수많은 사건을 겪고 체득했기에 소모적인 실랑이는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고맙다고 말하며 받은 게임기를 가방에 넣었다. 선물을 받는다는 것은 언제나 기분 좋은 일이긴 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라면 그 마음이 더 극대화 되고, 아니어도 가격이든, 타이밍이든, 분위기든 다양한 요소들이 작용하여 역시 기쁨을 준다.

‘대신 이거 나 주면 안 돼?’

문제는 이거다. 나에게 무언가를 준 상대는 그와 마찬가지로 무언가를 받길 원한다.

이렇게 말하면 되게 속물 같아 보이지만 사실 당연한 이치다. 이 사람에게 이걸 주고 싶어. 그 말 뒤에는 꼭 이유가 있기 마련이니까.

‘이 사람이 기뻐했으면 좋겠어.’라든가, ‘나를 더 좋아해줬으면 좋겠어.’라는 심리적인 보상을 원할 때도 있고, 그때의 채예령처럼 <라이온킹> 비디오테이프 같은 물질적인 보상을 원할 때도 있다.

사람들은 심리적 보상을 원할 때는 아무 말을 하지 않지만, 물질적인 보상을 원할 때면 자기가 받은 것에 대한 가치와 상대가 원하는 것에 대한 가치를 비교하기 시작한다.

나도 그랬다. 그래서 게임기를 다시 꺼내서 채예령에게 돌려줬다. 그걸 받은 채예령은 당황스러워 했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케이스도 없는 만화 영화 테이프보단 산 지 얼마 안 된 최신형 게임기가 더 값나가는 것이 맞았다. 보통은 땡잡았다고 생각하며 냉큼 바꾸겠지. 채예령도 그렇게 생각했던 게 분명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는 게임을 즐겨하지 않았기에 신형이고 뭐고 게임기란 것 자체가 매력적이지도 않았을뿐더러, 가격은 비싸건 싸건 테이프에 담긴 추억에 비하면 그냥 숫자일 뿐이었다.

집에 놀러 왔던 아버지의 친구가 선물이라며 남겨 놓고 간 그 비디오테이프는 누구에게도, 심지어 어머니에게도 드릴 생각이 없는 물건이었다.

그 뒤로도 채예령은 몇 번 더 다른 물건을 가져왔지만 나는 그때마다 거절했다. 그중엔 테이프 때문에 주는 거 아니니 그냥 가지라고 한 물건도 있었지만 나는 그것도 받지 않았다.

그리고 사실, 채예령한테만이 아니라 나는 남들에게 무언가 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나는 줄 것이 없었고, 그나마 가지고 있는 건 남들에겐 하찮을지라도 내겐 소중한 것들뿐이었다. 그것들을 내 줄 만큼 값진 것들을 가져온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56)============================================================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