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에이 씨…. 고춧가루…, 씨이….”
나는 기어코 입을 맞춘 남궁호를 흘겨보며 보란 듯이 입을 닦았다. 그 모습을 어이없다는 듯이 보던 녀석이 별안간 손을 뻗더니 내 코에 꿀밤을 날렸다.
“아! 왜 때려요!”
나는 아주 지 멋대로 구는 녀석이 짜증이 나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귀여워서 그런다, 귀여워서.”
아니, 그렇게 말하면 내가 넘어갈 줄 알고? 나는 실실 웃으며 입에 발린 소리를 하는 녀석을 한 번 더 강하게 째려봐주고 다시 숟가락을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우리의 대화 어디에 뽀뽀가 끼어들 가닥이 있었느냔 말이다.
나는 내가 질문을 했었다는 사실도 깜박 잊은 채 입술을 삐죽이며 숟가락으로 밥을 한가득 푸고 있었다. 얼른 다 먹고 남궁호를 보낼 심산이었다. 그러나 내가 막 입에 밥을 넣으려던 순간, 남궁호가 내 눈앞에 미역줄기를 흔들었다.
“어…?”
나는 순간 미역 줄기가 무슨 뜻이었는지 헷갈렸다. 그게 표정에 그대로 드러났는지 남궁호가 하, 하고 어이없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나는 네 녀석이 갑자기 뽀뽀해서 그렇다고 소리쳐 줄까 하다 참았다. 입술을 꾹 다물고 녀석에게 빨리 말하라는 의미로 고갯짓을 했다. 그러자 남궁호는 피식 웃더니 입을 열었다.
“별거 없어. 그냥 어렸을 때 열등감 때문에 그렇게 부르기 시작한 거거든.”
그러면서 녀석은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어렸을 때 말이야. 나는 내가 제일 똑똑한 줄 알았거든? 그래서 세상 잘난 맛에 살았는데, 더 커서 주변이 보이기 시작한 후에 알아버린 거야. 내 누나라는 사람이 정말 말도 안 되게 머리가 좋고, 잘난 줄 알았던 나는 그에 비하면 내가 무시했던 다른 사람들이랑 별다를 게 없는 인간이었다는 걸.”
첫마디를 워낙 장난처럼 하길래 또 대충 넘어가려는구나, 싶었던 나는 점점 무게를 더해 가는 내용에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근데 나이 차이도 별로 안 나는 사람한테 진다는 걸 인정하기가 너무 어려운 거야. 그래서 어떻게든 이기려고 죽어라고 노력했었어. 초등학생이 기절까지 여러 번 할 정도였으니 말 다 했지. 그렇게 몇 번 병원에 실려 갔을까, 부모님이 슬퍼하는 걸 참다못한 누나가 그렇게 몸 망가져 가면서 되지도 않는 짓 할 바엔 차라리 자길 사람이 아니라 괴물 취급하는 게 어떠냐고 말하더라.”
이 대목에서 남궁호는 못 말린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 표정에 공감한 나머지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참 못 말리는 동생에 더 못 말리는 누나였다.
“그 말을 어린 마음에 덥석 물었어. 그때부터 내가 못나서 못 이기는 게 아니라 쟤가 괴물이라 그런 거란 자기변명을 하면서 괴물이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지금은 그게 입에 붙어서 그냥 그렇게 불러. 실제로 누나한테 괴물 같은 면이 있기도 하지만.”
그러니까, 그의 누나를 지칭하는 ‘괴물’은 너무 뛰어나서 괴물 같다는 뜻의 괴물이었다. 나는 정말 별일 아닌 듯 가벼운 말투로 말하는 남궁호를 보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내가 물어봐 놓고 이런 생각을 하면 좀 모순적이라는 것은 알지만, 심각한 일이 아니라서 참 다행이었다. 그랬다면 나는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고르다가 결국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냥 식탁만 보며 침묵했을 것이다.
“아무튼 호칭만 그렇지 우리 관계는 그 전과 크게 달라진 건 없는데, 개인적으론 그 이후론 뭔가에 죽어라 매진할 맘이 싹 사라져서 이젠 뭐든 적당히 하면서 살고 있어. 근데 그러다 보니까 시간은 남아도는데 할 게 없어 심심하더라고. 그래서 이것저것 장난도 치면서 살고 있는 거야.”
그 말을 끝으로 나를 보며 씩 웃은 남궁호는 다시 밥을 먹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녀석의 얼굴을 잠시간 관찰했다.
나는 다른 건 잘 몰라도 괜찮은 얼굴과 괜찮은 척하는 얼굴만큼은 귀신같이 알아낼 자신이 있었다. 내가 쳐다보는 것이 신경 쓰이는지 밥을 먹다가도 힐끔 나를 보는 녀석은 정말 괜찮아진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아직 밥이 한가득 올려져 있는 숟가락을 집었다. 그리고 아까 들으면서 문득 궁금해졌던 것을 물었다.
“적당히 사는 거 힘들지는 않아요?”
“어?”
내가 물었으니 녀석이 대답하겠거니 생각하며 입안 가득 음식을 넣었건만, 돌아온 건 답이 아니라 되물음이었다. 나는 급하게 손으로 입을 가리고 말했다.
“아니, 적당히 살면서 남는 시간에 장난치고 그러는 거요. 나름 재밌어요, 아니면 힘들어요?”
남궁호는 멍한 얼굴로 나를 빤히 볼 뿐이었다. 나는 먹으면서 말해서 내 말이 잘 안 들렸나 싶어 음식을 삼키고 다시 한번 또박또박 말해줬다. 그래도 여전히 호는 조금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적당히 사는 게 힘들 수가 있… 나?”
그 말에 이번엔 내가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모든 삶의 태도엔 장단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 기준에서 ‘적당히 사는 것’ 또한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좋은 점과 그렇지 않은 점이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어떤 것이든 ‘적당히’를 지키는 게 가장 힘들다고 생각한다. 특히나 스스로 그걸 의식하게 된다면, 어떤 면에선 양극단을 목표로 하는 것보다 훨씬 더 힘들 것이다.
그래서 물어본 말인데 남궁호는 한 번도 그런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나 보다. 나는 인상을 찌푸린 채 식탁 한가운데를 멍하니 응시하는 남궁호를 놔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까 이런저런 일을 해서 그런지 영 허기가 졌다. 밥을 한 공기 더 퍼 와야겠다.
“어디 가?”
생각에 빠진 것처럼 보였던 남궁호는 내가 일어나자마자 바로 반응했다. 나는 빈 밥공기를 보여주고 밥솥을 가리켰다.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이는 녀석을 뒤로하고 걸어가면서 아까 녀석의 질문에 대한 내 생각을 말했다.
“적당히 사는 게 힘들지 않을 수도 있죠. 말 그대로 뭐든 ‘적당히’ 하며 산다는 거니까. 근데 저는 그 단어가 쓰기는 참 쉬운데, 생각하면 할수록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거든요. 대중이 없잖아요. 사람마다 기준이 너무 다르고.”
나는 놈이 내 얘기를 듣고 있는지 힐끗 뒤를 한 번 확인했다. 그런데 남궁호는 턱까지 괴고 내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렇게까지 집중할 얘기는 아닌데, 싶었지만 일단 시작했으니 말을 이었다.
“어떤 목표를 세울 때 말이에요. 저는 개인적으로 중간을 목표하는 게 가장 어렵다고 생각하거든요? 1등을 노리는 것보다 50등을 노리는 편이 신경 쓸 게 많은 것처럼. 하다못해 등수도 그런데, 삶을 적당히 살아간다? 얼핏 보면 참 속 편하게 살아간다 싶지만, 잘 생각해 보면 그 사람은 매일 나태와 부지런함 사이에서 줄다리기 중인 거잖아요.”
“…그냥 해야 할 건 하고, 필요 없는 건 안 하고. 그게 다야.”
나는 떨떠름하게 말하는 남궁호를 보며 다시 꽉 찬 밥그릇을 식탁에 놓고 앉았다. 앉자마자 똑같이 턱을 괴고 조금 위에 있는 놈의 눈동자를 올려다봤다.
“형, 근데 그거 알아요? 진짜 별생각 없이 적당히 사는 사람들은, 가끔 현타 올 때 빼곤 자기가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간다고 생각해요. 형처럼 그렇게 자조적으로 말하지는 않는다고요.”
남궁호는 어느새 웃음기 하나 없는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사실 저는 ‘적당하다.’의 기준은 스스로가 정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 형이 스스로의 삶을 그렇게 표현하면 그 또한 맞는 거라고 봐요. 근데 저도 사람인지라 저의 기준에서 생각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잖아요? 제 기준에 따르면, 내가 들은 형의 삶이나 평소 행동은 그 단어랑은 안 어울리는 것 같거든요.”
그냥 가볍게 던진 질문이었는데 어쩐지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이건 내 스타일이 아니다. 나는 타인에게 조언을 할 만한 사람이 아니고, 위로에도 재능이 없었기에 이런 유의 분위기는 피하는 편이었다. 그래서 대충 마무리 짓고 다른 얘기로 넘어가야겠다는 생각에, 나를 빤히 보고 있는 남궁호의 눈을 피하며 말했다.
“거기다 생각보다 그 단어 부정적으로 많이 쓰이기도 하고. 형도 말하는 뉘앙스를 봐선 적당히라는 거, 별로 좋게 생각하지도 않는 것 같은데 그렇게 살고 있다고 얘기하니까. 그래서 물어본 거예요. 자기가 살아가는 태도를 스스로 별로 좋다고 생각하지 않는 걸 봐선, 형의 삶이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재밌기만 하지는 않을 수도 있겠다 싶어서. 뭐, 힘들다 그래도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건 없지만요. 하하.”
그러니까 그만하고, 그냥 대충 그렇구나- 하고 이 주제는 넘어갑시다. 말을 끝맺으며 나는 작게 박수를 쳤다. 돌연, 어딘가 멍해 보였던 호의 눈에 생기가 돌아왔다.
“형. 좀 떨어져 주실래요?”
밥 맛있게 먹고 이게 도대체 무슨 짓인가 싶다. 아까는 분위기가 무거워서 문제였다면, 지금은 너무 가벼워서 문제다.
“한 번만. 응?”
“아니, 도대체 왜 그러시는 거냐고요.”
나는 내 옆에 붙어 계속 같은 것을 졸라대는 남궁호를 매우 한심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우리 양치질도 다 했잖아. 봐. 나 고춧가루 없어, 이제.”
남궁호는 보란 듯이 치아를 내보였다. 보고 싶지는 않았지만, 눈앞에 들이밀어진 치아는 확실히 하얗고 뽀얬다. 그래도 녀석이 아까부터 조르는 것은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게, 녀석이 바라는 것은 바로.
“진짜 딱 키스만 할게.”
키스였기 때문이다. 설거지할 때 뒤에서 키스하자고 속삭이는 녀석이 너무 방해돼서 양치나 하고 오라고 말했는데, 그걸 녀석은 양치하고 오면 키스를 하겠다는 말로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달려가서 양치질을 하고, 심지어 설거지를 마친 나까지 재촉해서 이를 닦게 하더니 계속 키스하자고 이 난리였다. 결국 나는 자꾸 달라붙어 오는 녀석을 밀치며 소리쳤다.
“아니, 도대체 왜 갑자기 뜬금없이 키스 타령이냐고요!”
남궁호는 밀친 보람도 없이 싱글벙글한 얼굴로 내 허리를 감싸왔다.
“우리 아까 제법 진지한 얘기도 하면서 서로를 더 잘 알게 됐잖아. 그 기념으로 신체적으로도 좀 더 가까워지자는 얘기지.”
개소리는 덤이었다. 녀석은 내 짜게 식은 눈길이 머쓱했는지 뒷머리를 긁으며 헤헤 웃었다. 나는 한 손이 풀린 틈을 타 남궁호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시도했지만 녀석이 얼른 다시 두 팔로 감싸는 바람에 실패해 버렸다.
꽁꽁 묶인 몸을 놔두고 고개만 들어 녀석의 눈을 마주했다.
“놔요, 진짜. 좋은 말로 할 때.”
남궁호는 그런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더니 처음 보는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갑자기 얘가 왜 이러나 싶은 마음으로 의심스럽게 쳐다봤다.
녀석은 한참을 그렇게 나를 보더니, 답답함에 못이긴 내가 팔을 빼내려고 하자마자 입을 열었다. 그 역시 처음 들어 보는 차분한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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