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연필을 잡지 않은 손으로는 호의 팔을 잡고 밀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지만, 그는 자극에 커진 젖꼭지를 더 비틀었다 살살 쓸어내렸다 하며 계속 괴롭혔다. 그럴 때마다 진호는 도리질을 치며 자극을 피하려는 것인지 어깨를 움츠렸다 폈다 하며 이리저리 움직였다.
“진호야, 곰돌아. 집중해야지.”
호는 스스로 생각해도 얄미운 소리를 하면서 상황을 실컷 즐겼다. 그러면서도 그는 진호의 움찔거림이 심해지면 허리를 잡아 제대로 앉혀주고 연필을 놓치려고 하면 제대로 말아 쥘 수 있도록 손을 고쳐주었다. 자세를 고쳐줄 때마다,
“그, 으응, 그만-.”
하고 웅얼거리는 진호의 귀에 친절히 속삭여 주었다.
“여기까지 다 풀면 그만해 줄게. 그러니까 어서 풀자.”
그 말에 진호는 호를 한 번씩 흘겨보았다.
“흐…. 흐으…, 읏….”
정말이지, 왜 이런 재밌는 녀석을 이제야 알았을까. 호는 즐겁게 웃으며 생각했다. 솔직히 진호가 온 힘을 다해 반항하면 그로서도 조금은 애를 먹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결국 제압할 자신은 있었지만, 어쨌든 여러모로 성가시게 할 수는 있었다. 거기다 호는 진심으로 싫어하는 상대를 억지로 취하는 취미는 전혀 없었다. 그는 새빈과 달랐다.
하다못해 자존심이 좀 상하더라도 그가 알려준 세이프 워드를 외쳤다면 그는 깔끔하게 물러섰을 것이다. 그러나 진호는 언제나 조금 저항하는 듯하다 금세 순응해 왔다.
호는 진호가 참 알다가도 모를 녀석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대체적으로 무른 성격인 듯하면서 이상한 데서 자존심을 세우고, 대담하다 싶으면 매우 순종적이다. 호는 진호의 그런 엉뚱하고 모순적인 점이 재밌고 귀여웠다. 지금처럼 분한 듯 씨근덕대면서도 그의 손을 쳐내지 않고 신음을 흘리며 문제를 푸는 모습은 정말이지, 참을 수 없게 귀여웠다.
쪽-.
그래서 호는 녀석이 문제를 풀 때마다 상을 내리듯 보이는 곳에 키스를 해 줬다. 진호는 키스를 받을 때마다 움츠러들었다가도 은근히 그에게 더 기대왔다. 마치 더 해 달라는 것처럼.
호는 진호의 이런 점 때문에 그들이 더 제어하지 못하고 그에게 손을 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다른 녀석들에게 이런 행동을 보이는 진호를 상상하자 기분이 나빠졌다. 진호가 이렇게 매달려 오면 새빈은 말할 것도 없고, 선우나 태혁, 자신의 쌍둥이 형마저도 고삐가 풀릴 수 있을 것 같다. 호는 생각만으로도 열이 뻗쳤다.
“아, 아파…. 흐….”
분노 때문에 힘이 들어갔는지 쥐고 있던 연필을 놓은 진호가 양손으로 호의 손을 잡으며 울먹였다. 호는 아차 싶은 마음에 손의 힘을 풀고 마사지하듯 다정하게 어루만졌다. 그러나 아픔이 쉬이 가시지 않는지 진호는 움츠린 자세를 펴지 않고 계속 끙끙댔다.
호는 드러난 뒷목에 입술을 뭉개며 손가락을 들어 진호의 입에 물렸다. 단단한 이에 마디를 걸치고 말랑한 혀를 이리저리 몇 번 누르니 손가락에 삼키지 못한 타액이 흥건히 묻는 것이 느껴졌다. 호는 충분히 젖은 손가락을 빼며 팔을 진호의 허리에 둘렀다. 그리고 타액에 젖은 손가락을 방금 전 세게 꼬집었던 젖꼭지에 가져다 대었다.
“진호야. 아팠어?”
어르는 듯한 말투에 진호는 순순히 대답했다.
“네, 으, 에,”
호는 그 모습에 순간 머리가 화끈할 정도로 치미는 성욕을 느꼈다. 그는 당장 넘어트리고 싶은 본능을 내리누르며 진호의 허리에 두른 팔에 힘을 주었다. 진호의 등과 호의 가슴이 빈틈없이 밀착되었다. 그 덕에 몸의 떨림이 더 적나라하게 전달되었다.
쪽.
“쉬-. 미안해. 형이 안 아프게 해줄게.”
“응, 으응.”
다정한 말투에 약한 건지 이번에도 진호는 착한 아이처럼 고개까지 끄덕이며 순하게 대답했다. 호는 정말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거, 이대로 일 한번 쳐…? 시기상조인 느낌은 들었지만 어떻게 잘 구슬리면 가능할 것도 같았다.
호는 본능과 이성 사이에서 갈등하느라 진호가 이를 악물고 문제를 풀기 시작한 것을 뒤늦게 알았다. 그가 아무래도 그냥 덮쳐야겠다고 결론을 내린 순간, 진호가 두 손을 번쩍 들고 외쳤다.
“다 풀었다!”
호는 아쉬움에 입맛만 다셨다.
호가 보기에 진호는 모범 학생은 확실히 아니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산만함 그 자체였다. 조금만 설명이 길어지면 다른 생각을 하기 일쑤고, 문제를 풀다가 막히면 갑자기 포기한 듯 책 구석에 낙서를 하기도 했다.
자기 딴에는 집중하려고 ‘안 돼. 집중해야 해.’ 하고 중얼거리며 정신을 다잡으려는 것 같다가도, 얼마 못가 다른 것에 정신이 팔리곤 하는 모습은 기가 찰 정도였다. 신기한 것은, 진호가 정말 멍청한 것인가 의심이 들 때쯤에 갑자기 천재에 빙의라도 된 양 방금 전까지 고전했던 문제를 막힘없이 푸는 점이다. 호는 그를 보면 볼수록 정말 이상하고 웃긴 녀석이라고 생각했다.
호는 전에도 심심풀이로 과외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었다.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족집게 과외 선생님으로 소문이 났고, 그에게 과외를 맡기고 싶어 하는 학부모와 자발적으로 연락하는 학생들로 인해 핸드폰 번호를 바꿔야 했을 정도로 인기가 많아졌다.
솔직히 그때 그는 진호와 같은 종류의 학생을 가장 싫어했다. 산만하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학생은 그를 피곤하게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가 진호의 이런 점이 조금 거슬리긴 해도 재밌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같은 이유로 매몰차게 거절당했던 학생들이 들었다면 통곡할 만한 일이었다.
“형, 다음엔 진짜 숙제 다 해 올게요. 정말 약속해요.”
진호에게 학생으로서 기특한 점도 있긴 있었다. 스스로 노력하려는 모습과 어른이라고 뻗대지 않고 진심으로 반성한다는 점이었다. 조금이라도 정색하는 기색을 보이면 풀이 팍 죽어서 눈치를 살살 보는 모습은 정말 학생 같았다.
산만하고 엉뚱하면서 우수하지도 않은 학생은 귀찮지만, 열심히 하려는 학생은 좋아하는 편이었다. 사실 그걸 다 차치하고서도 호 역시 그때처럼 선생님 노릇만 할 생각이 전혀 없었기에 이러나저러나 봐 줄 생각이긴 했다.
그래도 다음에 또 숙제를 안 해 오면 그땐 따끔하게 혼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놀리면 부들부들 떠는 진호의 반응을 즐기는데, 대화를 이어 갈수록 호는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특히 ‘아이들이 행복했으면 좋겠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랬다. 호는 진호처럼 말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
그의 경험상 사람들은 보통 아이들을 보면 귀여워하거나, 행복해 보인다는 말을 많이 했다. 진호의 말은 언뜻 들었을 땐 문제가 없어 보였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어딘가 이상했다.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말은 행복하지 않은 상태나 행복이 보장되지 않은 상태를 전제한다. 그러니까 아이가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것은, 진호는 아이라고 해서 행복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단 의미였다.
진호는 매우 가볍게 지나가듯 말했지만, 이상하게 그 한마디가 호를 거슬리게 했다. 그래서 그는 말없이 계속 진호의 표정을 관찰했다. 진호는 침묵이 길어질수록 조금씩 불편한 티를 냈다. 그러다 갑자기 목이 붉어질 정도로 세게 긁어 대던 녀석이 숙제 이야기로 말을 돌렸다. 호는 그런 진호를 보며, 문득 진호에 대해 조사했던 파일에서 본 항목 하나가 떠올랐다.
호는 떠오른 내용을 곱씹으며 집 안을 둘러봤다. 잘 정돈된 느낌의, 평범한 가정집이었다. 구조부터 인테리어까지 별로 특이점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굳이 이상한 점을 꼽자면 온 집안을 통틀어 액자에 담아 꺼내 놓은 사진이 딱 두 장이라는 정도였다.
하나는 조그마한 아이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브이를 하는 사진이었고, 다른 하나는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 두 명이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사진이었다. 그 사진 속 작고 평범한 아이는 여전히 누가 시켜서 웃는 것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누구든 따라 웃게 될 정도로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물어보지 않아도 누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호는 사진을 보고 예령이 어렸을 때도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겠다고 생각했다. 깔끔한 이목구비에 생기 넘치는 표정을 가진 아이를 누가 싫어할 수 있었을까. 아이 특유의 사랑스러움은 사진을 통해서도 충분히 느껴졌다. 그리고 호의 예상은 진호의 이야기를 통해 정확히 확인 받았다.
“그때 예령이가 마지막 주자였거든요. 꼴찌로 바톤을 받았는데도 기적처럼 다 제치고….”
어렸을 때부터 사람들과 어울리기 좋아하고 성격이 활달해 이런저런 일들이 많았는지, 예령의 에피소드는 끊임없이 나왔다. 진호는 밥 먹던 숟가락도 내려놓고 열심히 떠들었다. 예령이 얼마나 공부를 잘했고 예체능에 뛰어났으며, 친구도 잘 사귀고, 학교생활은 또 얼마나 잘했는지.
호는 그 모습이 귀엽게 보이면서도 이상했다.
“예령이가 자기가 있는 한 그런 건 못 본다면서 못을 딱 박아서, 걔가 있는 반엔 왕따 같은 게 전혀 없었어요. 저도 그런 건 당연히 싫어하긴 하지만 녀석처럼 나서진 못하는 성격이라 예령이가 그럴 때마다 진짜 대단해 보이더라고요.”
애초에 그가 물어본 것은 진호의 어린 시절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들었던 이야기 속 진호에 대한 이야기는 어렸을 때 작았다는 것과 별로 특별한 점이 없던 아이라는 것. 사람과 어울리지 못했고, 공부나 운동을 잘하지도 못했다는 것 등 좋지 못한 이야기뿐이었다.
그나마도 이야기의 대부분이 예령이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진호는 예령의 비교 대상으로 언급되는 것이 다였다. 누가 들어도 그의 추억 속의 주인공은 진호 당사자가 아니라 예령이었다. 호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사람은 예령이 아니라 진호임에도 불구하고.
호는 이야기를 듣느라 잠시 제쳐 두었던 서류의 내용을 다시금 되새겼다. 아까 ‘아이들의 행복’에 대해 언급한 건 아마도 첫 번째 장에 있었던 ‘그’ 항목하고 연결이 되어 있을 거 같은데, 이건 어떤 것 때문이려나.
아무리 자세히 조사한다고 한들 자료만 가지고 한 인물을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서류에 적힌 사항들이 실제로 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는 추측의 영역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호가 받은 서류에는 진호에 대한 주변 평판도 첨언의 형태로 중간중간 적혀 있긴 했지만 그것 역시 어디까지나 겉으로 드러난 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간단히 말하자면, 호는 서류를 통해 진호의 가족 구성에 대해서는 알 수 있지만, 그 가족들이 그를 어떻게 대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초등학교 때부터 예령과 친구였음을 알지만 그게 진호의 인생에 어떤 작용을 했을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진호는 호가 더 이상 맞장구를 치지 않고 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열심히 친구의 일대기를 재잘대고 있었다. 호는 그런 진호의 모습 위로 그가 아파서 횡설수설했던 때가 겹쳐 보였다. 전혀 상반된 상황임에도 어딘가 겹쳐 보였다.
상기된 얼굴 때문인가? 모르겠다. 호는 그저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스스로가 없는 어린 시절의 추억도, 그 추억 얘길 마치자마자 본인보단 그의 숟가락에 맛있는 반찬을 올려 주며 슬쩍 눈치를 보는 모습도. 그는 진호에게 무언가 다정한 행동을 해 주고 싶었다. 그래서 최대한 다정해 보이도록 웃으며 물었다.
“뽀뽀해 줄까?”
그러나 돌아온 답은 상상을 초월했다.
“웩.”
호는 기껏 다정하게 대해 줬더니 대뜸 헛구역질을 하는 진호가 매우 괘씸했다. 그래서 안타까웠던 마음은 고이 접어 두고 하던 대로 잘 데리고 놀 생각이나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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