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갑자기? 밥 먹다가? 나는 갑자기 헛소리를 하는 남궁호를 향해 눈살을 찌푸렸다. 뜬금없이 뽀뽀 얘기를 꺼내는 것도 이상했지만, 꼭 제가 상을 준다는 듯이 ‘해 줄까?’ 하고 물어보는 모습이 참 아니꼬웠다.
나는 저 말이 그냥 할 말 없으니까 아무 말이나 내뱉은 것인지, 아니면 정말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인지 가늠하기 위해 눈을 가늘게 뜨고 녀석의 표정을 살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그냥 빨리 말을 돌려야겠다.’였다.
“하하하-. 형 개소리 하지 말고, 우리 이 제육볶음이나 더 먹으면서 이번엔 형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한번 해볼까요?”
좋아. 스무스 했어. 나는 녀석의 입에 제육볶음을 넣어주며 말을 돌렸다. 억지로 넣는 바람에 녀석의 입 주변에 양념이 묻었지만 알게 뭔가. 나는 그 웃긴 모습에 실실 웃으며 뭔가 불만 어린 표정의 남궁호를 재촉했다.
“형 어릴 땐 어땠는데요? 대학 때처럼 장난기 넘쳤어요?”
그렇게 묻자마자 호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내 머리를 가볍게 쥐어박았다.
“진짜 궁금해서 그래요. 형은 어렸을 때 어떤 애였는데요?”
제법 진지한 얼굴로 묻자 이번엔 녀석도 옛날을 떠올리는 듯 눈을 위로 굴렸다.
“그래. 장난치는 거 좋아하는 애였지, 뭐. 어른들 말 잘 안 듣고. 와, 그러고 보면 어릴 땐 지금보다 더 막 나갔었다, 나.”
스스로도 기억을 끄집어낼수록 대단했는지 감탄사까지 내뱉은 남궁호를 보며 나는 고개를 저었다. 어렸을 때는 더 대단했다니, 얼마나 심했을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나는 민선우의 집에 있을 때 당했던 것들과 우리 집에서 있었던 소동을 떠올리며 녀석의 말에 가볍게 반박했다.
“지금도 충분히 그렇게 사는 거 같은데요.”
그러자 또 꿀밤을 때릴 듯 다가오던 녀석은 내가 고개를 뒤로 쭉 빼자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다시 자리에 앉았다.
“아니야. 나 어렸을 때는 보다 못한 후가 가끔 말릴 만큼 고삐 풀린 망아지였거든. 교과서에서 쥐불놀이 보고 직접 해 보고 싶어서 정원 구석에서 몰래 하다가 집 태워먹을 뻔한 적도 있다니까? 마침 지나가던 괴물이 소화기 들고 와서 크게 번지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이야기를 시작한 남궁호는 자기가 어떤 장난들을 쳤는지 말했는데, 들으면 들을수록 가관이긴 했다.
반 애들 꼬셔서 학교 빠지고 단체로 놀이공원 가기, 고용인들한테 부모님이 시켰다고 뻥치고 다 휴가 보내 버리기, 과외선생님 누가 먼저 울려서 내쫓나 시합하기, 성별 다른 동생들 옷 바꿔 입혀서 학교 보내기 등등.
내가 애를 가질 일은 없겠지만 정말 저런 애가 나오면 맨날 눈물바람으로 키웠을 거 같다.
아니, 참 신기하단 말이야. 저렇게 열심히 사고치고 놀았는데 언제 공부해서 의사가 됐지?
“그렇게 장난치는 시간 빼곤 공부밖에 안 했어, 나.”
남궁호는 마치 내 속마음을 읽은 것처럼 답했다.
“네? 장난치느라 허구한 날 수업 빠지고, 과외선생님 갈아 치웠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거랑 공부랑 뭔 상관이야. 그냥 스트레스 풀려고 그런 거지, 공부하는 걸 싫어하지는 않았어. 굳이 말하자면 좋아하는 편이었지. 그리고 진짜 잘 가르치는 사람한테는 안 그랬어. 배우느라 시간 아까운데 장난치고 뭐 하고 할 틈이 어딨어.”
“아니…. 상관없다면 없는 건데, 어딘가 굉장히 언밸런스하네요. 결국 의사가 된 사람한테 할 말은 아니기도 하고, 선입견이긴 하지만. 보통 그렇게 까부는 애들은 공부 못할 거 같고, 안 좋아할 것 같고 그렇잖아요.”
“애초에 장난을 치기 시작한 것도 공부 때문에 스트레스 받아서 그런 건데, 뭘. 후만으로도 짜증 나는데 괴물이 딱 버티고 서서 사람 열 받게 하니까 숨 쉴 구멍이 필요했거든.”
“괴물이요?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얘기할 때 괴물이란 분이 등장하던데. 누구예요, 그게?”
“…아.”
갑자기 끊긴 대화에, 식탁 위에 턱을 괴고 무슨 반찬을 집어먹나 보면서 이야기를 듣던 나는 살짝 시선을 들어 올려 녀석을 확인했다. 남궁호는 어느새 인상을 확 찌푸리고 있었다.
“후 형은 아닌 것 같고. 다른 형들 중에 한명이에요?”
갑자기 표정이 달라진 남궁호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물어보자 녀석은 혀를 한 번 찼다.
“내, 누나.”
표정만 봐서는 무슨 철천지원수를 얘기하는 것 같았다. 왜 저러는지 궁금하긴 한데 워낙 똥 씹은 것 같은 표정이라 더 물어봐도 되는지, 아니면 그냥 다른 얘길 해야 할지 순간 망설여졌다.
아니, 뭔가 사연이 있는 거 같긴 한데 그걸 나한테 털어놓고 싶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잖아. 그런 얘길 물어볼 만큼 친한 사이가 된 건지, 아직인지를 내 감으로는 모르겠다. 나의 내적 갈등이 길어질수록 침묵도 길어졌다. 채예령은 듣는 사람이 부담스럽지 않게 대화를 참 잘 이어가는데, 나는 이런 데 영 재능이 없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망설이는데 고민 끝에 좋은 방법이 떠올랐다.
“형! 계속 이어 말하고 싶으면 미역줄기볶음, 다른 얘기하고 싶으면 감자볶음을 드세요.”
“…어?”
“아니, 형 표정 보니까 뭔 사연이 있는 것 같은데. 이걸 계속 들어도 되는 건지, 아니면 다른 얘길 해야 하는 건지 영 모르겠어서요. 그렇다고 너무 대놓고 물어보는 건 좀 그럴 수 있으니까 생각한 방법이에요. 지금 미역줄기볶음이에요 아님 감자볶음이에요?”
“…하하-. 곰돌이 너는 진짜….”
나름 야심차게 말했건만 남궁호는 바람 빠지는 듯한 소리를 내며 웃더니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이게 아닌가 본데? 그렇게 생각한 내가 민망함과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에 입을 삐죽이는데 드륵- 하며 의자 끌리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어떻게 반응할 새도 없이 녀석의 입술이 내 입술에 맞닿았다.
* * *
다섯 명이 동의하고 진호는 동석했으니 동의한 걸로 퉁친 협약이 맺어지고 첫 주. 호는 발 빠르게 첫 번째 날을 쟁취했다. 그리고 그는 확실히 점수를 얻기 위해 다른 놈들보다 먼저 진호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 줄 계획을 세웠다. 비싼 물건이 갖고 싶다면 사 주고, 가고 싶다는 장소에 같이 가 주고, 하다못해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고 싶다고 했어도 최대한 맞춰 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어떤 것을 하고 싶냐는 물음에 돌아온 답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어…. 공… 부요.”
호는 처음 그 말을 듣자마자 이게 무슨 뜬금없는 소리인가 싶었다. 그래서 자연스레 인상이 찌푸려졌었나 보다. 진호가 변명하듯 말을 덧붙였다.
“저 이래봬도 취업 준비를 해야 하는 나이라서요. 그래서 일단 남들 하는 준비는 해 둬야 할 것 같아서….”
그제야 호는 진호의 나이를 떠올렸다. 확실히 그는 막 대학을 졸업한 26살로, 취업을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닐 시기이기는 했다. 그걸 깨닫고 나니 원하는 것이 공부라고 말한 진호의 마음이 조금은 이해가 갔다.
그러나 현재 진호가 처한 특수한 환경을 생각하면 여전히 사서 고생을 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선우네 하우스키퍼 정규직 자리를 보장 받은 상태인 것을 알고 있는데, 굳이 다른 걸 준비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호는 다시 한번 진짜 원하는 걸 말해 보라고 물어봐야 하나, 생각하다가 진호의 표정을 보고는 그냥 고개를 끄덕여 버리고 말았다. 본인도 그 말을 할 줄은 몰랐는지 당황하면서도, 말을 취소하지 않고 호가 뭐라고 할지 눈치를 보는 모습이 귀여웠기 때문이다. 거기다 공부를 알려주기 위해선 근거리에 붙어 있어야 하는데, 이는 호에게 더없이 좋은 기회일 것이 분명했다.
“아니, 그러니까 이게 왜….”
호가 봤을 때 진호의 가장 재밌는 점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습관이었다. 가끔은 머리까지 절레절레 흔들며,
‘그만하자, 그만.’
이라며 혼자 진절머리도 쳤다. 그리고 그런 행동이 밖으로 나온 것에 놀랐는지 미어캣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 모습을 볼 때마다 호는 못 본 척해 주긴 하지만, 너무 웃겼다. 머릿속에 생각이 너무 많아서 튀어나오는 건지, 아니면 그냥 긴 시간 혼자 있다 보니 혼잣말이 는 건지.
진호는 언뜻 보면 별 표정이 없는 것 같다가도 가만히 지켜보고 있자면 이렇게 혼자 모노드라마를 찍는 것처럼 표정이 다양했다. 물론 이 상태에서도 재밌지만, 호는 어떻게 하면 진호가 더 다양한 표정을 보여주는지 알고 있었다. 바로, 자극을 줄 때였다.
“어…? 네? 형?!”
이렇게. 호는 문제를 풀고 있는 진호의 뒤로 바싹 붙어 앉아 티셔츠 속으로 손을 쑥 집어넣었다. 진호가 놀랐는지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 뒤를 돌아 호를 올려다봤다.
호는 속으로 진호가 정말 둔하고 맹하다고 생각했다. 똑 부러지는 성격이었다면 티셔츠 속으로 들어오자마자 손을 강하게 쳐냈거나 화를 냈을 것이다. 그러나 진호는 놀라면 반사적으로 굳어버리는지 어? 어? 하는 멍청한 반응이 먼저였다.
호는 진호가 방심한 틈을 타 손이 배에 닿을 듯 말 듯 약하게 쓸어내렸다. 진호는 몸을 움찔거리며 호의 손목을 잡았지만 한 힘 하는 호로선 그 정도 힘을 거스르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는 고개뿐만 아니라 몸까지 뒤를 돌리려는지 뒤척이는 진호의 귀 옆으로 입을 바싹 붙여 속삭였다.
“문제, 풀어야지.”
적당히 숨을 섞어 말하자 민감한 진호의 손이 밀어내는 것을 멈추고 매달리듯 그의 손을 잡았다. 호는 움츠러든 목덜미에 가볍게 입을 맞추면서 진호에게 잡히지 않은 손으로 귀여운 젖꼭지 주변을 꾹꾹 눌렀다. 그러자 진호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연필을 쥐었다.
“읏…. 흐….”
집중하려는 요량인지 심호흡을 한 진호가 지문에 삐뚤빼뚤한 선을 긋기 시작했다. 호는 막상 진호가 정말 문제를 풀기 시작하자 짓궂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예고도 없이 젖꼭지를 콱 잡아챘다. 간지러움에 가까웠던 자극이 야릇한 통증으로 바뀌자 진호는 반사적으로 그의 손을 피해 등을 굽혔다. 그러나 당연히 그의 손을 벗어나지 못했다. 호는 오히려 진호의 젖꼭지를 두 손가락으로 쥐고 빙글빙글 돌렸다.
“아, 하으….”
호는 잔뜩 움츠러든 진호도 귀여웠지만 문제를 푸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는 양손으로 진호의 젖꼭지를 한 쪽씩 잡고 그대로 앞으로 잡아당겼다.
“아, 아아…!”
“허리를 펴고 앉아야 바른 자세지, 곰돌아.”
진호는 호의 의도대로 그의 손길을 따라 허리를 폈다. 그러나 심술 맞은 손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더 앞으로 잡아당겼다. 허리가 젖혀지다 못해 진호의 고개가 뒤로 넘어가 호의 어깨에 걸쳐졌다. 호는 고개를 돌려 진호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고 검지로 젖꼭지의 정점을 살살 문질렀다.
“흐읏, 하, 아….”
“곰돌아, 문제 안 풀 거야? 계속 이렇게 있을까?”
“흐읍….”
그 말에 진호가 울상을 하며 입술을 꼭 깨물었다. 손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던 연필을 애써 다시 쥐는 것을 본 호는 오른손으로 진호의 배를 꾹 눌러 젖혀진 허리를 다시 펴 주었다. 진호는 그제야 다시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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