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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호 이야기-50화 (50/234)

50화

나는 쟤네한테 그냥 일개 흥밋거리다. 재밌는 후배이자, 뭐더라…? 아! 멍멍이고, 냥냥이고, 곰돌이고, 쫑쫑이다. 그걸 늘 기억하자. 다시 한번! 나는 저 놈들한테! 멍멍이고! 냥냥이고!

“야! 김진호!”

“아닌데요! 전 곰돌인데요!”

“…뭐?”

……? 나 방금 뭐라고 했냐…?

나는 내가 방금 뱉은 말을 되새겼다. 믿기지 않았다. 남궁호도 놀랐는지 나를 멍하니 쳐다봤다. 그러다 상황 파악을 마친 나의 얼굴이 새빨갛게 불타올랐고, 이어서 남궁호가 박장대소했다.

“어이, 곰돌이 씨! 그 문제는 다시 한번 풀어 보는 게 어때?”

“…….”

“김진호가 아닌 곰돌이 쨩! 다음 문제도 한번 풀어 보세요!”

내 말실수에 실컷 웃어 댄 남궁호는 좋은 건수를 잡았다는 듯이 아까부터 저 지랄이다. 창피함도 어느 정도 놀릴 때 드는 거다. 1절, 2절 정도가 아니라 아주 돌림 노래를 하고 있는 남궁호를 보며 나는 점점 분노가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참자. 김진호 참자. 사람 때리고 사는 거 아니라고 도덕 교과서가 알려 줬잖아. 저 새끼가 아까 말실수 한 거 가지고 계속 저렇게 실실 웃으면서 승질 살살 건드려도, 사람 때리면 안 된다 진호야. 쟤 나보다 강하다. 강자한테 힘으로 덤비는 거 아니다. 정신 차리자. 정신.

“아뉜데엽! 전 곰도린뒈엑! 야! 악! 아파! 아프다고, 김진호!”

“그만하라고요, 그만! 말실수라고 몇 번을 말해! 그만하라고!”

때리면 안 되긴 개뿔! 이걸 어떻게 참아! 결국 참지 못하고 손이 올라갔다. 녀석은 내가 설마 때릴 줄은 몰랐는지 매우 놀란 듯 눈을 커다랗게 떴다.

초딩 같이 구는 상대에게는 똑같이 초딩 같이 대응해 줘야지. 나는 손을 휘두를수록 속이 시원해지는 것을 느끼며 녀석이 소리를 지르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손바닥을 날렸다.

“야, 등에 네 손자국 남겠다! 알았다고! 악! 야!”

나는 요리조리 피하는 등에 마지막으로 강스파이크를 친 다음에야 손을 내렸다. 너무 열심히 때렸나? 숨이 다 차네. 반쯤 일어났던 자세를 바로 하고 다시 연필을 쥐는데 남궁호가 손으로 맞은 데를 문지르며 뭐라고 구시렁거렸다.

저게 의사라니…, 쯧쯧. 쟤 진짜 사회생활은 어떻게 하는 거야.

속으로 혀를 쯧쯧 차는데, 남궁호가 대뜸 말했다.

“나 그래도 인기 많아, 병원에서.”

“예?”

우쭐대는 미소가 얄미웠던 나는 잘못 들었나 싶어 귀에 손을 올려 놓으며 되물었다.

“모르나 본데, 나 잘생기고 친절한 선생님으로 특히 애들한테 인기 진짜 많아.”

녀석은 조금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 다른 건 몰라도 친절하다는 말엔 신빙성이 없었다. 나는 다시 한번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되물어 볼까 하다가 그걸 두 번이나 하는 건 좀 무례해 보일 것 같아서 참았다.

“형 내과 아니에요? 소아과였어요?”

“아니, 나 애들 좋아해서 시간 나면 가거든. 장난 몇 번 쳐 줬더니 좋아하더라고.”

전혀 그런 이미지가 아니었는데 놀랐다. 아이들을 좋아해서 굳이 찾아가기까지 하다니. 거기다 지금 남궁호는 처음 보는 어른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녀석의 의외인 모습에 놀라기도 했고, 어색하기도 해서 그냥 말을 돌려 버렸다.

“아아…. 근데 앞에 잘생기고는 좀 거슬리네요.”

“맞는 말이잖아. 나 잘생겼는데?”

내가 왜 이 주제로 말을 돌렸을까? 이래서 잘생긴 것들은. 잘생겼는데 나는 몰라, 이런 건 말이 안 된다니까? 현실은 이거지.

그러나 그 말이 틀린 건 아니어서 부정하기도 뭐한 나는 그냥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러자 씨익 웃은 녀석은 내가 풀던 문제집을 가져가 채점을 시작했다. 어디서 가져왔는지 빨간 펜으로 야무지게 동그라미를 치고 있는 모습이 참 낯설다. 우리가 이러고 있을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 말이지.

어느새 진지한 얼굴이 된 남궁호는 열심히 문법에 대해 설명해 주었고, 나는 그걸 열심히 듣고 있었다.

예전의 나는 공부를 죽을 만큼 싫어했지만,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성적으로라도 부모님에게 그들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그래서 어렸을 땐 정말 열심히 했었는데, 대학에 들어가고부터는 그게 잘 안 되었다.

결국 내가 있던 곳은 울타리 밖이었구나, 라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눈에 띄게 보이는 결과가 없어서 그랬나?

한창 열심히 했을 때도 받아 본 적 없던 과외를 받고 있자니 어색하고 신기한 기분이다. 내가 머리가 좋은 편은 아니라 학원에 다닐 땐 항상 조금 벅찼었는데, 이렇게 내 맞춤형으로 설명해주니 훨씬 이해가 잘된다.

나는 문득 무료 인터넷 강의를 붙잡고 혼자 고군분투하던 과거가 떠올랐다. 숫기가 없어서 담임선생님에게 물어보지도 못하고 이해하지 못한 건 그냥 외워 버리던 그때. 예령이네 어머님이 제안해 주셨던 그룹 과외를 받아볼걸 그랬나, 하는 후회도 들었다. 그랬다면 나도 예령이처럼 다른 것들도 좀 더 챙기면서 살 수 있었을까.

아니, 아니다. 이미 다 지난 일, 후회한다고 달라질 건 없다. 의도치는 않았지만 이렇게 공부할 시간이 많아진 것도, 과외를 받게 된 것도 회귀 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지금이라도 이런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거에 의미를 두자. 비록 선생님은 저 놈이지만, 그래도 뭘 가르쳐 줄 땐 제대로 하는 것 같으니 괜찮겠지.

“김진호, 너 말이야. 설명이 좀 길어지면 바로 딴생각하더라?”

“엇.”

들켰다. 나는 헤헤 웃으며 그래도 중요한 건 다 들었다며, 아까 헷갈려서 틀렸던 부분에 대해 남궁호가 설명한 것을 그대로 말했다. 설명을 듣던 녀석은 쯧, 혀를 차면서 내 머리를 흐트러트렸다.

“그래도 다음부턴 끝까지 집중해서 들어. 대강 들으면 나중에 더 헷갈린다?”

그건 맞는 말이지. 다음부턴 딴생각은 좀 줄이자.

“근데 형이 애들 좋아하는지는 몰랐네요.”

“넌 애초에 나에 대해 잘 모르지 않아?”

아니, 나 꽤 많이 아는데? 라는 말이 나갈 뻔했지만 꾹 삼켰다. 회귀 전 채예령을 통해 들어 녀석들에 대한 정보를 많이 알고 있는 것은 티 내 봤자 좋을 일이 없을 것 같아 철저히 숨기기로 했다. 만약 그걸 들켰다가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부터 시작해서 여러 가지로 추궁 받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저번에 정새빈이 내가 자신들한테 의도적으로 접근한 것을 간파했다고 말했을 때 소름이 끼친 걸 생각하면…. 더는 들켜선 안 된다. 사실 살아 보겠다고 앞뒤 안 가린 거지, 사람한테 의도적으로 다가가는 게 좋은 게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다. 그래서 마음 어딘가 아주 쬐그맣게 죄책감 비슷한 것도 있고.

물론 그 죄책감 비슷한 것은 놈들이 깽판을 칠 때마다 안드로메다로 날아가 버리긴 해도, 아무튼 대체적으로 있는 편이다.

다섯 놈들이라면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이미 눈치채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내가 그걸 인정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이기 때문에 나는 의도적으로 접근했다는 것도, 그 접근을 가능하게 만든 것이 작년에 내가 주워들은 정보들 덕분이라는 것도 티 낼 생각이 없었다.

내가 지금 그 다섯 명한테 어느 정도로 중요해졌는지는 모르지만 호감 어쩌구 하는 걸 보면 어쨌든 나의 친해지기 작전은 먹혔다는 소리고, 그렇다는 건 뭐든 감정이든 생겼다는 거잖아. 근데 그런 사람이 사실은 너희가 좋아서가 아니라 그냥 살려고 접근한 거랍니다! 라고 말하면 얼마나 기분이 더럽겠어.

나는 사람이 사람에게 실망했을 때의 눈빛이 얼마나 차갑고 아픈지 너무 잘 알기 때문에 그걸 또 보고 싶지 않았다.

“나 애들 좋아해. 귀엽잖아. 순수하고.”

“뭐…. 그렇죠.”

“너는? 너는 애들 별로야?”

“저도 좋아는 해요. 보거나 대화할 기회는 거의 없지만. 그래도 애기들 보면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항상.”

그 말에 다음 숙제를 내 준다며 다른 문제집을 뒤적거리던 남궁호가 고개를 들었다.

“그거 되게 희한한 생각의 흐름이네.”

그렇게 말한 녀석은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물었다.

“그냥 귀엽다, 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고?”

그 말에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말 어디가 특이한 거야? 그냥 정말로 애들이 행복하길 바라는 건데, 그게 이상한 건가?

남궁호는 고개를 기울인 채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마치 뭔가 알아내려는 것처럼. 나는 그게 묘하게 불편해서 목을 긁적이며 슬쩍 눈을 내리깔았다.

“이번 숙제는 어디까지인데요?”

묻는 말에 잠깐 생각하는 듯하던 녀석은 곧이어 고개를 똑바로 했다. 그리고는 다시 선생님 표정으로 돌아와서 다음 만남까지 해야 할 것들을 읊어주며 이번엔 꼭 해 놓으라고 당부를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귀퉁이 부분을 접어 다시 한번 표시해 놓고 책들을 덮었다.

“형 배고프죠? 밥 먹어요, 우리.”

“오늘은 뭐 해 줄 거야? 저번에 해 준 김치찌개 진짜 맛있었는데.”

“그냥 간단히 제육볶음하려고요. 매운 거 좋아하는 거 같길래.”

일단 재료를 꺼낼 생각에 냉장고로 걸어가면서 남궁호에겐 쉬고 있으라고 말했다.

고기랑 대파랑, 마늘이랑…. 대충 다 꺼낸 거 같으니 일단 고기를 굽자. 나는 달궈진 프라이팬에 고기를 올려두고 양념거리를 꺼냈다. 그러고 보니 집에서 제육볶음을 하는 건 오랜만이었다.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긴 하지만, 내가 만들기보단 주로 예령이네서 받아 왔기 때문이다.

이상하게 제육볶음은 아무리 연구해도 예령이네 어머님 손맛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최근엔 예령이네에 가는 횟수가 많이 줄어서 먹은 지도 오래됐다.

나는 음식 해 놨다며 연락하시곤 하던 예령이네 어머니를 추억하다 뇌리를 스치는 기억에 동작을 멈췄다. 기억났다. 회귀 전 그 날, 그 사건이 있던 날도. 어머님이 제육볶음을 해 놓았으니 가져가라는 예령이의 연락을 받고 녀석의 집에 간 거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일용직만 전전하며 사는 모습을 보이기 좀 그래서 잘 찾아가지 않다가, 제육볶음이라는 말에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받으러 갔었다. 왜냐면 예령이는 양념이 된 고기는 잘 안 먹어서, 그건 어머님이 날 위해 하신 거라는 게 너무 명확했기 때문이다.

“곰돌이. 너 이거 몇 살 때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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