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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호 이야기-49화 (49/234)

49화

“손 멈췄잖아. 다음 문제도 풀어야지.”

“읏…. 잠, 잠깐. 이게 뭐하는….”

진짜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젠장, 젠장!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펜을 고쳐 잡았지만 문제는 풀리기는커녕 잘 읽히지도 않았다.

문제를 풀라고 해 놓고 뒤로 가서 안길래 왜 이러나 싶었고, 옷 속으로 손이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뭔 수작인가 했다. 차가우니까 빼라는 말이 미처 나가기도 전에 녀석의 긴 손가락은 천천히 젖꼭지 주변을 더듬거리며 살살 간지럽히기 시작했다.

나는 다급하게 펜을 잡지 않은 손으로 남궁호의 한쪽 팔을 옷 위로나마 잡아챘지만, 녀석의 손가락은 내가 팔을 잡든 말든 계속해서 나를 간지럽히며 움직였다.

“으…. 기분 이상…, 하니까 그만….”

“집중해, 고미야. 안 그럼 틀린다?”

빌어먹을. 고미는 또 뭐야. 이 새끼 또 날 이상한 애칭으로 부르고 있네. 말하는 투를 보아, 그가 말한 문제의 개수를 채우지 않으면 멈춰 주지 않을 것 같아 나는 눈을 한 번 꾹 감았다 떴다. 털이 곤두서는 느낌을 눌러 참으며 최대한 문제에 집중하는데,

사락-.

“읏…! 잠…, 잠깐…!”

망할 놈…!

유륜을 쓸던 손가락이 갑자기 확 젖꼭지를 꼬집는 바람에 문제집 위로 쓸데없는 선이 찍 그어졌다.

“책에 낙서하면 안 되지.”

속삭이며 귀에 바람을 부는 놈에게 너 때문이잖아! 하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남궁호는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할 때마다 두 젖꼭지를 조금 더 잡아당기며 말을 못 하게 했다.

내가 아무리 성경험이 없다고 하지만, 젖꼭지를 좀 꼬집힌 정도로 이렇게까지 반응을 하는 게 맞는 거야? 이젠 눈앞이 흐릴 정도로 느껴지는 자극을 외면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눈을 깜박이고 입술을 깨물며 남아 있는 문제를 풀기 위해 노력했다.

“끝…. 흐읏…, 끝냈어…! 흐응-. 끝냈다…, 앗…. 구요!”

“어? 벌써? 아아-. 우리 대학 나온 게 맞긴 하구나?”

아쉽다.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가 진짜 얄미웠다. 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슬쩍 고개만 돌려 남궁호의 옆얼굴을 째려봤다.

“이제 그만 떨어지세요.”

그 말에 놈은 입맛을 다시며 일어나 맞은편으로 가서 앉았다.

“고미야, 알지? 싫으면 언제든 외치면 돼.”

“이상한 애칭 붙여 부르지 말라고요. 그럴 거면 이름 부르라고 몇 번을 말해요! 그리고 안 외쳐! 내가 미쳤다고 그런 단어를 외치겠냐!”

아니, 말이야 바로 하라고, 그딴 단어가 세이프 워드인 게 어딨어?

“다음에도 숙제 안 해 오면 또 할 거야. 알았지?”

갑작스럽지만 나는 남궁호와 영어 공부를 시작했다. 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그냥 놈이 봐 준대서 그렇게 되었다. 뭐라도 해 두면 나중에 도움이 되겠지 싶어 받고 있다.

우리 집에 다섯 명이 모두 모였던 날 이후 녀석들은 내 집에 갑자기 들이 닥치던 행위를 전면 중단했다. 녀석들 사이에서 무슨 대화가 오간 건지는 몰라도 놈들은 이제 막 쳐들어오는 대신 미리 연락을 하고 한 명씩 돌아가며 만나러 온다.

자기들 말로는 내 호감을 살 만한 공평한 기회를 얻기 위해서라는데, 그런 거치곤 내 의견은 똥구멍으로도 들어 처먹지를 않았다. 특히 세이프 워드에 관해서는 진짜 쌉소리 범벅이었다.

나랑 스킨십 하는 걸 포기하기 싫었던 놈들은 나에게 제안의 탈을 쓴 통보를 해 왔다.

그들의 요구는 총 세 가지였는데, 첫 번째는 내가 말했던 것을 반영하여 강제로 하기보다는 ‘자연스럽게’ 진행될 수 있도록 노력할 테니 조금은 열린 마음을 가져줄 것.

두 번째는 내가 만약 원하는 스킨십이 있다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말해줄 것.

세 번째는 혹시 정말 싫을 때는 그들이 제안한 단어들 중 하나를 외쳐줄 것, 이었다.

첫 번째, 두 번째도 솔직히 할 말이 없는 건 아니었는데, 세 번째는 정말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냥 사람이 싫다고 하면 싫다고 알아들으면 되지 않느냐, 그렇게까지 필요한 거면 정상적인 단어를 가지고 와라, 아니면 차라리 으아악- 하고 소리를 지르겠다. 끝끝내 투쟁했지만 결국 지들 맘대로 ‘정하지 못하겠다면 그냥 그중에 아무거나 외쳐라.’로 결정했다. 진짜 좆같은 놈들이었다.

아무튼 나는 알바 3개, 4개씩 뛰었을 때도 생전 써 본 적 없는 캘린더까지 써 가며 월요일은 이놈, 화요일은 저놈, 수요일은 그놈, 이런 식으로 번갈아가면서 녀석들과 만나게 되었다.

내가 무슨 선착순 예약제 상품이 된 느낌이었지만 뭐, 첫 주를 무사히 보낸 결과 매일 사람을 만난다는 것 자체는 나쁜 경험은 아니었다. 거기다 호감을 얻니 마니 했던 것이 어느 정도는 진짜였는지 따로 만난 녀석들은 훨씬 정상적이고, 뭐랄까, 좀 더 얌전했다.

매일 다른 사람을 만나는 만큼 같이 시간을 보내는 방법도 다양했는데, 그중 남궁호는 첫날 만나자마자 나한테 하고 싶은 건 없냐고 물어봤다. 그때 나는 마침 이런 식이면 학원은 어떻게 하지, 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놈의 질문에 아무 생각 없이 영어 점수를 높이고 싶다고 해 버렸다.

말하고 나서야 실수를 깨닫고 수습하려 했는데, 의외로 녀석은 덥석 알았다고 대답하고는 같이 문제집을 사러 가자며 서점으로 향했다.

얼떨떨하게 서점을 다녀온 후 남궁호는 자기가 고른 문제집을 탁자에 올려놓으며, 내가 알려줄 테니까 이번 달은 학원 끊지 말고 그 시간에 나랑 만나, 라고 말하며 씩 웃었다.

나는 그때까지도 얘가 진심으로 하는 소리인가, 반신반의했지만 녀석은 진짜 수업을 시작했다. 거기다 놀라운 것은, 남궁호의 수업이 의외로 정말 알아듣기 쉽고 공부가 잘 되었다는 점이다. 그렇게 정상적인 첫 수업이 끝나고 오늘이 두 번째 수업인데….

“고, 아니 김진호. 네가 성적 올리고 싶다고 해서 하는 거잖아. 그럼 좀 더 열심히 해야 하지 않겠어?”

잠시 딴생각을 하는 새에 채점을 마친 남궁호는 결과가 맘에 안 든 건지 어느새 장난기 있던 표정을 싹 거두었다.

“현직 의사가 과외 해 주는 거 흔치 않아. 거기다 나 옛날에 취미로 과외 했을 때 목표 점수 못 채워 본 학생이 없는 선생이었다? 만약 점수 못 받아오면, 그건 네가 공부 안 한 탓인 거야.”

“아니 그게…. 어제 약속이 너무 늦게 끝나서요…. 죄송해요.”

“숙제 덜 해 온 건 뭐, 벌 받았으니까 넘긴다 쳐도. 너 저번에 푼 거 오답노트도 안 썼지?”

나는 손가락을 꼼지락대며 고개를 숙였다. 진짜 안 했기 때문에 할 말이 없었다.

나도 나름 바빴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내가 생각해도 그건 핑계였다. 옛날 대학 다닐 때 시간 없었던 걸 생각하면 이번엔 노느라 바빴던 거라, 저녁에 혼자 시간을 내서 할 수도 있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힐끔 눈을 올려 훔쳐본 녀석의 표정에 불만이 가득이다. 아까 숙제를 덜 했다고 했을 때 씩 웃으면서 그럼 벌 받으면 되겠네! 하고, 남은 숙제를 다 할 때까지 유두를 만지작댔던 남궁호가 낫다고 생각하게 될 줄이야.

문득 스스로에게 충격을 받았다. 나, 이런 분위기일 바에야 내 유두나 만지게 해 주는 게 낫겠다고 생각한 거야? 와-. 미쳤네, 김진호. 참나….

“뭐? 참나아-?”

“예? 아, 아뇨! 그건 혼잣말, 아니, 형한테 하는 게 아니라 나한테요! 와, 나 참. 첫 숙제를 안 한 것도 어이없는데 오답노트도 안 했네! 참나! 어이없네! 할 때 참나, 예요!”

“하-. 진짜. 김진호 너는…. 어휴, 말을 말자. 곰돌이한테 화내 봤자 나만 속 터지지. 고미 너 딴생각 그만하고 일단 이 문제부터 봐.”

“아니, 저 고미 아니라니….”

“어허!!”

“…네….”

내 죄지, 내 죄야. 나는 다음부턴 숙제고 오답노트고 철저히 해서 저 놈의 고미 소리 또 하면 당당하게 따져야지, 라고 생각하며 펜을 쥐었다.

그러나 막상 몇 문제를 푸니 집중이 잘 안 되고 아까 일만 머리에 맴돌았다. 유두를 만져질 바에야 그냥 세이프 워드 중에 하나를 외치는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고, 내 몸은 주인의 의지와는 다르게 너무 잘 느끼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잘 느낀다는 문제가 떠오르자마자 다른 녀석들이 만졌을 때의 내 반응도 하나둘 떠올랐다. 나는 샤프 꼭지를 입에 물며 그놈들이 잘 만지는 건지, 내 몸이 너무 잘 느끼는 건지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다.

솔직히 놈들이 날 만졌을 때마다, 싫거나 혐오스럽기보단 그저 곤란한 정도였고, 신체적으로는 사실 매우 기분이 좋았다. 그러다 문득 정색하고 화내느니, 그냥 야하게 화내는 쪽이 마음은 편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던 것을 떠올렸다. 이쯤 되니 그냥 내가 욕구불만인 건가 싶다.

“고미야, 너 집중 안 하는 것 같다?”

나는 자꾸 드는 자괴감을 떨쳐내기 위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민감한 곳을 작정하고 자극하는데 기분 좋은 게 당연하지. 그렇게 애써 스스로를 위로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현타가 찾아왔다. 이거 전형적으로 ‘안돼돼돼…, 돼.’ 하는 성인물 전개가 아닌가.

‘싫지 않았다.’라니, 제정신인 건가 나. 첫 경험에 대해 생각할 때면 언제나 사랑 받는 분위기를 상상했기 때문에 나는 당연히 ‘사랑하는 사람’과 스킨십을 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들과의 기억은 딱히 ‘사랑 받는 느낌’은 아니었지만 싫지 않았고, 오히려 매우 좋았다. 나는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쉬었다. 아니, 나 왜 싫지 않은 건데.

“어이, 곰돌이! 집중 안 하냐?”

매우 생소한 성적 자극에 잠들어 있던 성욕이 깨어나서 도덕성이 좀 옅어진 거라고 치자. 꼭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싫어하기까지 할 필요는 없고, 충분히 기분 좋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요즘 자 보고 만남을 추구하는 것도 유행이라고 하니, 감정보다 먼저 몸정이 들고 그러다 맘정도 들고 하는 관계. 백번 양보해서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문제는 대상이다.

지금 내가 ‘싫지 않은’ 대상은 나에게 관심을 표현하고 있고, 시간을 같이 보내고 싶어 하며, 심지어 스킨십까지 하고 싶어 하는 최태혁, 민선우, 남궁후와 남궁호, 정새빈. 총 다섯 명이다.

그들이 이상한 놈들이고 진지하게 만나기엔 부담되는 사람들이라는 것도 문제긴 한데, 진짜 문제는 녀석들이 나한테 진심이 아니라는 데 있었다. 아무리 관심 어쩌고 해도 나는 녀석들이 진심인 상대에겐 어떻게 구는지 회귀 전에 채예령한테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과 나한테 보여 주는 모습은 매우 심각하게 달랐다.

심지어 최근에 채예령한테서 들었던 모습과도 다른 것을 보면 딱 답 나온다. 쟤네한테 나는 지금 ‘좋아하는 사람’보단 ‘재밌어서 건드려 보고 싶은 사람’인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 배려 없는 모습들이 설명된다.

“어쭈, 이젠 문제 푸는 척도 안 하네.”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시간이 지나 진심이 될 가능성이 있긴 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진심으로 만들 자신이 없었다. 나는 뭘 해도 채예령 발끝도 못 쫓아가는 애니까. 그게 아니더라도, 나라는 사람은 놈들의 본래 이상형과 억 만 광년 정도 떨어져 있을 거다.

삶은 인터넷 소설처럼 낭만적으로 굴러가지 않는다. 적어도 나한테는 그런 기적이 일어난 전례가 없었다. 나는 앞으로 어떤 일이 있어도 저들에게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피하지 못하면 즐기라고, 이왕 이렇게 된 거 즐길 것은 즐기되 절대 진심이 되지 말자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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