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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호 이야기-48화 (48/234)

48화

“날을 정하는 수밖에. 지금처럼 서로 마주쳐 봤자 스트레스만 쌓일 거다. 이 녀석도 그건 힘들어 할 테고.”

“그래, 일주일 중 하루씩 나눠 갖는 게 좋을 거 같아. 근데 나랑 후는 일정한 요일에 쉴 수 없으니까 매주 선착순으로 정하자. 김진호한테 먼저 연락해서 잡은 사람이 그 날은 가지는 걸로. 다들 불만 없지?”

그 말에는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논제 하나당 실제로 의견이 모이는 시간은 비교적 짧은 편이었다. 다만 그 의견을 내기까지 마땅찮은 마음에 침묵이 길 뿐이지.

이렇게 재밌는 것도 참 오랜만이다. 새빈은 속으로 웃음을 삼키며 또 다른 주제를 던졌다.

“스킨십은 어떻게 할 건데? 그때와는 달리, 김진호는 게이잖아. 우리를 충분히 연애 대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상대라고. 나는 이번엔 물러서 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후는 옛날 일을 잠시 떠올렸다. 그래, 그때는 다섯 모두 물러나기로 합의를 봤었다. 누가 봐도 아름답고 빛나던 채예령. 그들은 어느 순간 그에 대한 감정이 생각 이상으로 커진 것을 알고 각자 경쟁적으로 접근하려고 했지만, 곧 모두 알게 되었다. 예령은 노골적인 호모포비아였음을.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신기했다. 호모포비아가 이상할 정도로 옆에 끼고 돌아다니는 친구가 게이였다니. 어쨌든 처음으로 그런 감정을 가진 사람에게 스트레스를 주거나 부담을 느끼게 하기 싫었던 그들은 서로 합의하에 예령에겐 좋은 형 그 이상은 되지 않기로 결정했었다. 언제 폭주할지 모르는 서로에게서 그를 지켜주기 위해 했던 합의였다.

“힘으로 밀어붙이지는 말자. 애 팔목이 이게 뭐야, 정새빈. 너 또 힘써서 애 울렸지?”

“하, 씨발. 나도 아직 못 남겨 본 흔적을 감히 네가 먼저 내…?”

아까부터 멋대로 만지작거리는 것도 거슬렸던 선우는 후가 소매를 걷어 올리며 드러내 보인 손목에 저도 모르게 욕부터 내뱉었다.

진호의 몸에 자국이 남는다면 그건 당연히 본인에 의해서일 거라고 생각했다. 근데 하얗지 않은 피부 위로도 명확히 보일 정도로 붉은 손자국이라니. 선우는 급격히 끓어오르는 화에 이성을 잃을 것만 같았다.

새빈은 그런 선우를 마주 보며 두 손을 들어 올려 항복을 표했다. 물론 눈은 실실 웃고 있었지만.

“아, 미안 미안. 나도 순간 눈이 돌아서 제어가 안 됐지 뭐야. 아 근데 어쩌냐 사이코? 쫑쫑이는 아픈 게 싫은가 보더라. 너, 네 취향 드러내면 가장 먼저 팽 당할 수도 있겠던데?”

제 3자가 봐도 때려주고 싶을 만큼 얄미운 태도였다.

“한국에 들어왔으면 성병 검사부터 받으러 가봐, 새빈아. 여기서 얼쩡대지 말고.”

내가 진짜 걱정돼서 그래, 진호한테 쓰레기 냄새 밸까 봐. 고개를 살짝 숙였다 다시 들어 올린 선우의 얼굴에는 그린 듯한 미소가 떠 있었다. 뱉은 말과는 전혀 매치되지 않는 얼굴이었지만 새빈은 그가 여전하다고 생각하며 낄낄 웃었다. 그리고 스스로 생각해도 본인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제안을 했다.

“김진호가 원하지 않으면 멈추는 걸로 하자. 그게 가장 깔끔하잖아?”

후가 보기에 지금까지의 경험상 진호는 스킨십을 무작정 싫어하지는 않았다.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빠른 전개에는 거부감을 느끼는 것 같았지만.

특히 포옹은 좋아하는 듯 보였다. 지금 태혁에게 안겨 세상 편안한 얼굴로 자고 있는 걸 봐도 알 수 있듯. 뭐, 어떤 이유에선지는 몰라도 그들의 비위를 맞춰야 한다는 생각에 비굴하게 구는 것도 있겠으나 그것도 본질적인 거부감이 없기 때문에 참을 수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일례로, 예령은 누구에게나 살갑게 굴었고 특히 그들에겐 정말 잘했지만 동성과 포옹은커녕 어깨동무를 하는 것도 미묘하게 불편해하며 적당한 타이밍에 쓱 빠져나가곤 했었다.

그와 비교했을 때 본인 스스로 게이라고 자각하고 있으면서, 그들이 자신에게 포옹 이상의 행위를 원하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격렬한 저항 없이 저렇게 폭 안긴 상태로 덜컥 잠들어 버리는 진호는 잘만 구슬리면 꿀꺽 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이긴 했다.

“하, 원하지 않으면 안 한다고? 다른 사람도 아닌 네가? 여기 그 말이 믿기는 사람 있어?”

“너희 설득 시키려고 쓸데없이 말 길게 하긴 싫은데, 남궁호. 여기서 더 귀찮아지면 협의고 뭐고 내 맘대로 할 수도 있어.”

“정새빈. 선 넘지 마라.”

안겨 있는 진호가 깰까 봐 최대한 말을 아끼던 태혁이 결국 입을 열었다.

“여기서 아예 하지 말라고 한다고 납득할 녀석은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미 어느 정도 관계가 진행된 녀석들도 있을 테니까. 아까 김진호가 얘기했듯 자연스러운 흐름이라면 마냥 거부하진 않을 것 같으니 그건 재량껏 하도록 하지. 다만, 오늘과 같이 진짜 거부 의사를 뱉었을 때는 본인의 욕구가 어떻든 멈추는 것으로 정하자. 괜히 경계심을 높여 다른 사람에게까지 피해 입히지 말고.”

“그래서 말인데, 세이프 워드를 정할래? 기본적으로 안 돼, 싫어가 거절이기는 하지만, 왜인지 김진호는 너희들에겐 그 ‘거절’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 말이야.”

근데 나한테는 유독 잘 표현하더라고. 그래서 그걸 거부 의사로 친다면, 나 진짜 짜증 날 거 같아서.

호는 새빈의 말을 들으며 진심으로 생각했다. 정새빈은 닥치고 있을 때만 재밌다고. 그러나 그 생각과는 별개로 세이프 워드에 관한 제안은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본인도 본인이지만 여기 있는 녀석들이 언제 욕구를 주체하지 못하고 달려들지 모르기 때문에, 확실히 그 고삐를 제어할 수단을 만드는 건 나쁠 것 없었다.

그럼 그 세이프 워드를 뭘로 해야 하나. 이런 것까지 머리 맞대고 정할 필요는 없었지만, 그들은 세이프 워드를 정하기로 하자마자 각자 진호의 입에서 어떤 단어가 튀어나오면 더 귀여울 것 같은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진호가 외치기 힘들 것 같으면서 외쳤을 때 듣기에 만족스러울 만한 단어. 세이프 워드라면서 이딴 조건의 단어를 찾던 그들 머릿속에서 나온 최종 선택지는 가관이었다.

* * *

오랜만에 꿈도 안 꾸고 자고 있는데 자꾸 누가 나를 부른다. 진호야, 나비야 이제 일어나자, 하는 다정한 목소리에 눈을 뜨니 누군가의 무릎과 민선우가 보인다.

맞다. 이놈들 다 우리 집에 와 있었지. 아…. 또 무슨 어이없는 얘기를 했을지 들어봐야 할 것 같긴 한데…. 눈꺼풀이 너무 무겁다. 그냥 잘래. 지금 내 정신 상태로는 감당이 안 될 거 같아. 자고 다음에 들을래.

기분 좋게 이마를 쓸어 넘겨주는 손길을 느끼며 다시 눈을 감았더니 또 누군가가 몸을 흔든다.

진호야, 잠깐만 일어나 봐. 잠깐이면 돼. 응? 부드럽게 어르는 소리에 인상을 찌푸리며 살짝 눈을 뜨니 이번엔 쌍둥이가 보였다.

착하지 우리 진호, 그냥 맘에 드는 거 하나만 골라주면 돼. 알았지?

“자, 편하게 숫자로 얘기해. 일 번 야옹, 이 번 멍멍, 삼 번 뀨, 사 번 크앙, 오 번 짹짹.”

잠결에 듣기에도 별 이상한 쌉소리를 늘어놓고선 이 중에서 뭐가 좋아? 하며 묻는 얼굴이 매우 해맑았다.

…그냥…, 너네 다 꺼져주라 제발…. 진심으로 눈뜨기가 싫어졌다.

* * *

게이인 것이 부끄러웠던 적은 없었다. 이유를 묻는다면, 게이라는 점이 나에게 주는 상처보다 혜택이 많았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나도 남자를 좋아하는 것 같다는 조심스러운 고백에 엄마가 보여 주었던 환한 웃음을. 그래서 처음 자각했을 땐 이게 나쁜 점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오랜만에 만난 아버지 역시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으니까.

이게 사회적으로 지탄 받을 만한 일이라는 것을 알았던 건, 내가 게이라는 걸 채예령에게 말했을 때였다.

‘더러워. 그건 더러운 거야. 진호야.’

그때 채예령의 표정을 나는 오랜만에 보았다. 실망하고, 한심해하는 표정. 나에 대해 어느 정도 체념하고부터는 어느 순간 보이지 않았던 그 표정을 실로 오랜만에 봤었다.

채예령은 나에게 제발 평범할 수 없느냐고 물었다. 왜, 너는 왜 자꾸 엇나가냐고. 우리는 남들보다 더 잘해야만 평범해질 수 있는 걸 왜 모르냐며 처음으로 내게 소리를 질렀다.

뭐든 타고난 줄 알았던 녀석의 필사적인 모습을 엿볼 수 있었던 날이었지만 나는 전혀 기쁘지 않았다.

채예령은 그 주 주말에 내 손을 잡고 자기 가족들이 다니는 교회로 데려갔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다행인 점은 채예령이 그때 어른들에게 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다만 큰 잘못을 저질러 죄를 뉘우쳐야 한다고 했다.

아이들끼리 장난을 좀 심하게 쳤나 보다 생각했던 어른들은 귀엽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며 열심히 기도하면 될 거라고 얘기했다. 나는 그 사실을 알고 격노한 아버지가 금지할 때까지 한동안 채예령의 손에 이끌려 교회를 다녀야 했다. 이때를 기점으로 채예령은 호모포비아가 되었고, 그걸 숨기지 않았다.

세상 모든 것을 포용할 것만 같았던 녀석이 딱 하나, 게이를 혐오하게 된 것이다. 내 탓이었다.

‘야, 쟤가 걔야. 사회복지학과 게이.’

나는 채예령과 그런 일이 있은 뒤로는 내가 게이라는 사실을 아무에게도 먼저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질문을 받았을 때 굳이 숨길 생각은 없었다. 사회적으로 지탄 받을 만한 일이면 어때. 나는 여전히 그게 왜 부끄러운 건지 모르겠는데. 나는 그런 마음을 먹고 있었는데, 내게 게이냐고 물어보는 사람은 없었다. 아니, 없었었다.

나의 첫 커밍아웃은 의외로 별거 아닌 계기로 벌어졌다. 채예령이 또 억지로 끼워 넣다시피 해서 가게 된 MT 자리에서였다.

‘와, 너는 우리 대학 김태희 옆에 앉았는데 표정 하나 안 바뀌네! 너 혹시 게이 아니야?’

‘맞아. 나 게이야.’

쓸데없이 웃으면서 마음에도 없는 부끄럼을 떨기 싫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어딘가 쌓여 있던 답답함이 터진 건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공식적으로 커밍아웃을 했고, 온 대학에 소문이 나는 건 순식간이었다.

채예령 말고는 이렇다 할 친구 한 명 없었기에 잃을 인간관계도 딱히 없어서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다. 거기다 내가 워낙 화젯거리가 될 만한 사람이 아니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생활고로 인한 휴학 덕분인지 소문은 금방 가라앉았다.

그래도 나름 온 대학에 소문 날 정도의 소동이었긴 해서 다섯 놈들도 알고는 있을 줄 알았다.

참고로 나는 게이인 걸 일찍 자각한 것과 달리 26년 살면서 연애 관련 에피소드는 한없이 영에 수렴했다. 그럭저럭 호감이 가는 녀석들이 좀 있기야 했지만 상대방이 게이인 걸 모르는 상태에서 막 대시할 수는 없었고, 위험을 감수할 만큼 좋았던 사람도 없었다.

다섯 놈들이랑 엮이기 전까지는 성적인 접촉이라고는 내 오른손과 한 게 전부였다. 거기다 나는 성욕이 그렇게 들끓는 편은 아닌지 남들은 난리난다는 청소년기에도 막 왕성하게 해 보고 싶다거나, 그런 욕구를 느껴 본 적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몰랐다. 내가 이렇게 쾌감에 약한 몸을 가졌을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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