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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호 이야기-47화 (47/234)

47화

…몰랐네. 이 새끼들 몰랐어. 표정을 보니 단번에 알겠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쟤네들은 내 성향 같은 것은 신경도 안 쓰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나한테 스킨십을 했다는 거다.

애초에 그들이 한 짓들도 내가 게이였기에 거부감이 덜했던 거지, 일반 성인 남성이었다면 진짜 온힘을 다해 때렸어도 할 말 없을 일들이었다. 물론, 내게 녀석들과 친해져야 한다는 강박이 없었다면 나 또한 게이고 뭐고 주먹을 날렸겠지만, 아무튼 더 그렇다는 말이었다.

나는 급격히 몰려오는 피로를 느끼며 그냥 솔직한 심정을 얘기했다.

“물어보시니까 하는 말인데요. 제가 지금까지는 이런저런 사정으로 본의 아니게 형들이랑 우정만으로는 할 수 없는 접촉까지 했었지만, 저는 기본적으로 그런 건 사랑하는 사람이랑 해야 한다는 주의여서요. 굳이 말하자면 손잡는 것도 불가능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은데요.”

“…싫어.”

열 받는 마음을 내리누르고 소신 발언을 했더니 말 끝나기 무섭게 정새빈이 찡찡댔다. 어이가 없어서 살짝 째려보려고 눈을 치켜뜨는데 나머지 네 놈도 정새빈과 똑같이 말했다.

“싫어.”

너네 단체로 정새빈 물 끓여 먹었냐? 뭐가 싫어, 뭐가!

“난 나비랑 하고 싶은 게 많아요.”

“강아지는 많은 관심과 애정이 필요한 법이지.”

“야, 곰돌이는 안고 자야 제 맛인 거야.”

“안고 자다보면 물고 빨기도 하는 거고.”

“쫑쫑이….”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얘기하는 내용들이 참 가관이다. 사람이 진지해지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어, 진짜. 아까 도망치고 싶을 만큼 저릿했던 감동은 어느새 사라지고 갑갑함만 남았다.

뭐 어쩌라는 거야. 스킨십이 어디까지 가능하냐기에 이미 이런 말 하긴 늦은 거 같지만 굳이 내 의견을 물어본다면 나는 당신들하고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니까 손잡는 것도 좀 그렇다고 한 건데, 뭐 어떡하라고.

“진호 씨. 그 스킨십이란 거 꼭 애인 사이여야 한다, 그런 기준이 있나요?”

민선우는 ‘꼭’에 굉장한 강조를 넣었다. 그래서 그런지 맞다 답하기엔 좀 극단적인 느낌이 들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음…. 그거야 관계가 발전해 가면서 상호 합의하에 자연스럽게 진행되는 거면 애인 사이가 아니어도 뭐….”

“애인 사이여야 한다는 제약은 없는 거군.”

어? 아니, 거기에 포인트를 둔다고? 여기서 중요한 건 ‘관계 발전’과 ‘상호 합의하에’라고, 이 녀석들아!

“일단 곰돌이 의견을 들었으니 나머지는 우리가 정할게.”

나는 교묘하게 말을 바꿔 하는 최태혁에게 당황하여 반박할 타이밍을 놓쳤다. 입만 벙긋대고 있는 사이 쌍둥이까지 합세해서 지들 맘대로 그냥 결론을 내버렸다.

“옆에서 듣고 있다가 정 맘에 안 들면 말하든지.”

하…. 머리 아파. 나는 이게 대화인지 통보인지 영 헷갈렸다. 분명 나도 말을 하고 있기는 한데, 그냥 허공에 대고 이야기하는 기분이었다.

어이없는 말에 반박도 못하고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고 있는데 눈이 마주친 최태혁이 손을 까닥인다. 옆으로 오라는 손짓에 미적미적 무릎걸음으로 가까이 다가가니 겨드랑이 밑으로 손이 쑥 들어와 나를 덜렁 들어 올렸다. 순식간에 녀석과 마주 보고 다리위에 앉게 된 나는 당연히 일어나려고 했지만 커다란 손이 허리를 잡고 끌어당기는 바람에 그대로 푹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피곤해 보인다.”

최태혁은 짧게 한마디 하면서 내 머리를 자기 어깨에 기대게 했다. 얼떨떨하게 있자니 어느새 양옆으로 자리 잡은 쌍둥이들이 머리를 꾹꾹 눌러주고, 등을 살살 쓸어주기 시작했다.

뭐야 이거 갑자기. 나는 일어나야 하는데, 뿌리쳐야 하는데 생각하면서도 차마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고 가만히 전해지는 온기를 느꼈다. 오늘 하루 너무 많은 일이 있었긴 했다. 지금도 뭔가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지만 마주 안은 몸이 너무 따뜻해서인지 자꾸 정신이 몽롱해졌다.

* * *

잠에 든 얼굴은 평화로워 보였다. 흘러내리는 앞머리를 쓸어 넘겨주며, 후는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26살 남자 볼에 솜털이라니. 그냥 하얀색 털인가 싶어 자세히 봐도 아주 가늘고 보송해 보이는 게 확실히 솜털이 맞아 보였다.

하도 신기해서 방금까지 뭘 하고 있었는지도 깜박 잊고 집중하던 후는 정강이에 전해지는 고통을 느끼고 나서야 고개를 돌렸다.

“야, 틈타서 혼자 쪼물딱거리지마.”

반대편에 앉아 있는 제 쌍둥이 동생이었다. 열 받기는 했지만 지금 상황 상 그만해야 하긴 했다.

진호를 보기 위해 옆으로 비스듬히 앉아 있던 후가 똑바로 앉았다. 진호가 깨어 있을 때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여전히 손이 빠르네, 최태혁.”

무식한 일하는 사람치곤 머리가 돌아간다니까. 선우가 잔잔히 웃으며 뱉은 말은 비아냥이었다. 그러나 태혁은 코웃음을 칠 뿐 대거리를 하지 않았다. 다만 자기 품에서 잠든 진호의 등을 두어 번 쓸어내렸을 뿐이었다. 그때 멍하니 천장만 보고 있던 새빈이 관찰하듯 한 사람 한 사람을 주의 깊게 보더니 입을 열었다.

“쓸데없이 시간 끌지 않았으면 하는데. 귀찮으니까.”

말문을 연 그는 드물게 완성형 문장으로 말을 뱉었다.

“어떤 것부터 시작할 거야? 현재 상황이 얼마나 부자연스러운지부터 집고 넘어가?”

존재감이 없었던 동아리 후배 김진호. 스스로는 아무렇지 않게 보이는 줄 알았겠지만 쌍둥이까지 엮였을 때부터 여기 있는 모두는 어렴풋이 이상함을 느끼고 있었다.

언뜻 보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모두와 엮인 것 같았지만 확실히 이상한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이상한 것은 역시 진호의 적극적인 태도였다.

그는 여기 있는 다섯 명과 동아리 활동을 같이 했음에도 전혀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존재감이 없던 사람이었다. 비록 같이 활동했던 기간이 실질적으로 1년밖에 되지 않는다고 해도 그 1년 동안 동아리에는 총 7명밖에 없었다.

태생적인 평범한 외모와 성격도 어느 정도 작용을 했겠지만, 그 정도까지 기억에 없으려면 분명 본인 스스로도 그들의 눈에 띌 의지가 없었다는 얘기다. 근데 그랬던 사람이 지금에 와서 이렇게 적극적으로 어필하는 행위는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이상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는 각자 본인을 좋아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행위라는 생각에 어느 정도 감안해서 넘겼지만, 이제는 그렇다고 보기엔 그런 행동을 하는 대상의 수가 너무 많다는 걸 모두가 눈치채고 말았다. 재밌는 것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여기 있는 모두가 그를 ‘불쾌하다.’가 아닌 ‘흥미롭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건 넘어가도 상관없을 거 같은데. 일단 아무리 조사해 봐도 어떤 외부 접촉이 있다고 나오지는 않고, 개인으로 봐도 게이인 걸 제외하곤 별로 특이사항도 없었어. 뭐, 굳이 따지자면 몇 가지 있긴 한데 그건 가정사 관련이라 우리들한테 접근할 만한 이유는 아니고.”

“주변 평판을 보건대 다른 사람을 등쳐먹을 만한 인물도 아니었으니까 소위 말해 ‘위험 요소’는 확실히 없는 거지. 만에 하나 생긴다고 해도 여기 있는 사람들이라면 각자 선에서 컨트롤 할 수 있을 정도라고 본다, 나는.”

호는 올라간 바지 틈으로 보이는 진호의 매끈한 종아리를 만지작거리며 태평스레 말했다. 무모증인가 싶을 정도로 털이 없는 다리도 특이사항이려나,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면서.

“그럼 넘어가지.”

잠시의 침묵이 지나고 태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진호가 들었다면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을 만한 주제는 아무 문제도 없는 것으로 치부되어 가볍게 넘겨졌다.

“그럼 다음은 그건가? 충돌을 어떻게 최소화할지.”

나는 나비 옆에서 니들이 얼쩡거리는 꼴을 직접 보고 싶지는 않거든.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선우가 모두를 둘러보며 얘기했다. 그리고 말이 끝나기 무섭게 호가 이쪽도 그건 마찬가지라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비등한 권력과 경제력, 영향력이 있다는 것은 이런 점에서 참 불편하다. 찍어 누를 수도, 치워 버릴 수도 없으니. 여태껏 누군가한테 물러서 줄 필요가 없었던 다섯 명은 서로를 냉정히 바라보며 똑같은 생각을 했다.

성가신 것들. 각자의 입맛대로 진호를 홀랑 채갈 생각이었던 다섯은 함부로 할 수 없는 적수들 때문에 홀로 차지하기 위해서는 명분이 필요해진 상황이 짜증이 났다. 가장 그럴듯한 명분은 역시 대상, 김진호의 선택이겠지. 그 선택을 받기 위해선 그가 다른 사람보다 먼저 자신에게 빠지게 해야 했다.

새빈은 서로를 경계하고 있는 네 명을 보면서 코웃음을 쳤다. 김진호가 뭐라고 우리들은 이렇게 필사적으로 굴까? 저들도 이 생각을 한번쯤은 해 봤으려나.

심지어 본인은 명확히 호감도 있지만 승부욕 쪽이 더 크게 작용한 반면, 저들은… 글쎄. 자연스럽게 진호를 제 품에 안아 재우는 태혁과 그 옆에 붙어 계속 어딘가를 만지작거리는 쌍둥이, 그 셋을 평소와 다르게 무표정한 얼굴로 빤히 보는 선우는 무슨 생각을 하며 달려들고 있는 건지 궁금해졌다.

개인적으로 네 사람 다 선우가 말한 ‘흥미’의 단계를 넘어선 것 같아 보였다. 그러나 아직 그 감정을 깨달을 계기가 없었던 건지, 아니면 모른 척하는 건지 행동과 말이 계속 따로 놀고 있었다. 뭐, 이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다섯 모두 이미 진호를 서로에게 뺏길 생각은 추호도 없다는 점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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