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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호 이야기-44화 (44/234)

44화

“걸을 수 있을 때부터?”

살인. 저게 엄청난 소리인 줄은 아는데 전혀 놀랍지 않다. 왜냐하면, 애초에 최태혁이라면 적어도 한 번쯤은 해 봤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태혁의 살인 역사는 별로 와 닿지 않았다.

사실 한 번이고 두 번이고 백 번이고, 살인이라는 건 그저 공감해줄 수 없는 딴 세상 얘기다. 단순히 누군가 살인을 했느냐, 하지 않았느냐, 에 대한 이야기라면 집중했을 텐데, 최태혁에 한해선 그 질문은 이미 오래 전에 ‘했다.’ 쪽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그래야 회귀 전 최태혁의 태도가 이해되니까.

놈은 그날도 아무 망설임 없이 사람을 겨냥했다. 정말이지, 표정 어디에도 망설임이라곤 털끝만치도 없었다.

“응. 난 참 행운이야. 나라서. 태혁이는 꽤 오래전부터 아무렇지도 않아. 사람을 때리는 거나 죽이는 거나 똑같은 느낌일걸? 아주 옛날엔 사람을 딱 두 종류로 나눴대. 죽일 사람, 아직 안 죽여도 되는 사람. 으음, 사실 나는 아버지가 그랬고, 선우는 자기가 그랬고, 후랑 호는 누나가 있으니까 그랬는데 태혁인 없잖아? 그리고 아저씨가 되게 자상하거든.”

여전히 말은 말대로 하는데 뭐가 자꾸 빠진 듯한 문장들의 나열이다. 앞뒤 문맥으로 대충 알아들을 순 있지만 이왕이면 조금만 더 듣는 사람을 배려해줬으면 좋겠다. 하긴, 그게 가능했으면 얘가 미친놈일 리가 없지만….

나는 최태혁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살인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자기들과 달리 유일한 후계자였기 때문, 이라는 정새빈의 말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며 그를 빤히 쳐다봤다. 친구가 살인을 밥 먹듯 한다는 걸 싱글벙글 웃으며 말하는 놈도 이상하고, 그런 사람을 친구로 두는 것도 이상하고, 이런 놈을 친구로 두는 최태혁도 이상하다.

아니, 그 전에…. 암호인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암호가 아닌 것도 아닌 괴상한 말들을 끝까지 듣고 해독까지 해 주고 있는 내가 제일 이상했다.

“태혁이가 알고 나선 못할 거 같으니까 그 전부터 시켰어. 그러니까, 태혁이는 몰랐던 거야. 살인이 범죄라는 걸. 나중에 학교에서 배우고 나서 그랬어. 사람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동물을 죽이는 건 당연해. 중요한 건 사람도 역시 동물이란 사실이야.”

놈은 얌전히 잘 말하다 갑자기 일어섰다.

“다시 앉아요.”

왜 저러나 몰라. 나는 정새빈 덕분에 한쪽 다리만 쭉 뻗은 채 쭈그려 앉은 폼을, 아래서 올려다보면 아무리 잘생긴 사람이 해도 존나 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 시야에선 팔꿈치에 가려 놈의 코끝밖에 안 보인다는 걸 쟤는 알까? 아니, 모를 거다. 정말이지, 더 이상 같이 있다간 내 성숙하고 정상적인 사고가 유치하고 비정상적인 방향으로 물들까 무섭다.

나는 고개를 내젓고 몸을 일으켰다.

“어디 가?”

“밥하러요. 배고프죠? 시간도 늦었는데 밥 먹고 얼른 가요.”

“어? 어?”

어? 어? 는 무슨 어어- 야? 이놈은 아무래도 가는 사람 붙잡는 게 취미인가 보다. 또 가려는 내 손목을 붙잡고 놓을 생각을 안 한다. 뭐야 그 배신당한 듯한 표정은. 맞은 데도 이젠 좀 괜찮아진 것 같고, 물어본 거에 대한 대답도 끝까지 들어 줬고, 이상한 개인기에도 욕 안 해줬는데…. 뭐야?

“약속했잖아.”

“뭘요.”

“펠라 하게 해준다고.”

구멍도 핥게 해 준댔어. 놈은 엄청나게 억울하단 표정이다. 물론 나는 저 말을 듣는 순간 돌이 되고 말았다. 내가 언제 그런 약속을 했어?

“저… 기요, 선배…?”

나는 점점 다가오는 녀석의 손을 피해 조금 뒤로 물러섰다.

“응. 바지부터.”

허리춤이 잡힌 것은 순식간이었다.

“아아아악! 손 떼요! 뭐하는 짓이에요, 이게! 잠, 잠깐…! 이건 아니잖아요! 어어? 벗기지 말라고! 저기요! 듣고 있어요?!”

끓어오르는 분노를 가라앉히고 말로 타이르려고 했던 계획이 순식간에 엉망이 됐다. 방심한 새 달려든 정새빈은 반항에도 아랑곳 않고 바지를 벗겨냈다. 정말 어마어마한 힘이다.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힘에, 나는 그의 손을 풀어내거나 뿌리칠 수가 없었다.

“서, 선배! 선배! 팬티는 잠깐만요. 아 진짜 제발, 선배! 잠깐! 잠….”

“…….”

진짜 안 되겠다 싶어서 박치기라도 하려는 순간, 정새빈은 거짓말처럼 움직임을 멈췄다. 기회다!

“저기, 선배. 이, 이거 좀 잠깐 놔 봐요. 제가요, 아직 안 씻어서 그래요. 씻고 나서 해요, 네? 제가 얼른 씻고….”

나는 녀석에게 애원하듯 말했다. 우선 달래서 이 상황을 모면하고 저번처럼 최태혁한테 전화를 하든, 아니면 이번엔 그냥 경찰한테 신고를 하든 할 생각이었다.

“정말?”

“네, 네?”

“정말 씻고 나면 반항 안 할거야?”

“당연하죠! 약속할게요! 제가요, 얼른 씻고 나와서….”

다행히 내 작전이 먹혔는지 정새빈의 손이 완전히 멈췄다. 나는 녀석의 손가락 끝에 걸린 팬티를 빼내려고 애쓰며 거짓 약속을 남발했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정새빈은 사차원 어린애 같으니까 이 정도 거짓말에도 속을 거라고 생각했다.

놈의 손에서 힘이 빠지는 게 느껴졌다. 휴우-. 수고했어, 나. 잘했어, 나! 역시 김진호 너는 천재야!

“…하하하.”

“팬티도 예쁜 걸로 갈아입….”

나는 마지막까지 방심하지 않고 주저리주저리 녀석이 좋아할 말을 하다가 말끝을 흐렸다. 방금까지 어딘가 어린애 같았던 녀석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도망가야 한다는 것도 잊은 채 조심스레 녀석을 불렀다.

“선배…?”

“하하. 참…. 안 되겠다.”

갑자기 뒤로 털썩 주저앉은 정새빈이 얼굴을 가리고 피식거렸다. 난 놀라서 입을 헤 벌렸다. 얘가 또 뭘 하려고 이러나. 엉덩이에 반쯤 걸쳐 있는 팬티를 슥 올리고 몸을 조심스레 웅크렸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제일 조용하고 움직임 없이 뒷걸음… 아니, 뒷엉덩이질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가는 사람 못 붙잡으면 죽는 병 걸린 정새빈이 턱, 얼굴을 가렸던 한 손으로 내 손목을 잡았다.

화들짝 놀라 내려다본 내 손목은 금세 새하얗게 질려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잡혔다. 무슨 상황인진 모르지만, 그걸 본 순간 내 머릿속엔 온통 그 생각만 들어찼다.

“쫑쫑아. 내가 그렇게까지 만만해?”

녀석의 얼굴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무표정했다.

“우리 쫑쫑이는 아무래도 날 너무 멍청이로 보는 것 같은데. 아닌가? 내가 존나 약해 보여서 이러나? 아니면, 쫑쫑이 너 혹시 대가리에 뇌가 없어? 그것도 아니면 뭐야. 내가 틀린 건가?”

나는 정새빈이 속사포처럼 내뱉는 말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무언가를 빠른 속도로 말하고 있긴 한데, 너무 당황스러운 나머지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다 그의 다음 말에 나는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띵해졌다.

“너, 우리가 필요해서 접근한 거지? 맞는 거 같은데,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네가 별 접점도 없던 우리 다섯한테 다시 존재를 드러낼 이유가 없단 말이지, 김진호. 근데 왜 이럴까, 응?”

왜 갑자기 이야기가 이렇게 흘러가는 걸까. 거기다 얘는 어떻게 그걸 알고 있는 걸까. 나는 씨익 웃으며 되묻는 녀석에게 아무런 말도, 심지어 고갯짓도 하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 마주친 눈까지 피하면 그 말을 인정하는 꼴이 될 것 같아 시선만 겨우 유지하고 있었다.

“네가 접근한 이유가 궁금한 게 아니야. 분명 돈도 아니고 사랑도 아니고 섹스도 아니겠지만 뭐, 그딴 건 내가 알 바 아니거든.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잖아. 한 번에 네 명이나 노릴 만큼 중요한 이유가 분명 있는데, 나만 제외시키는 이 상황이. 방금까진 좀 재밌었는데, 네가 끝까지 이렇게 나오면 나, 씨발 미치도록 짜증이 나. 아차. 내가 내 얘길 안 해서 그래? 나는 말이지 쫑쫑아. 네가 볼 때 난, 미친 새끼야.”

그건 이야기하지 않아도 이미 충분히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분위기가 바뀌기 전까지는 위험하지만 구슬릴 수 있을 것 같은 미친놈이었다면, 지금은 위험해서 무조건 피해야 하는 미친놈처럼 보였다. 조금 바뀌긴 했지만, 아무튼 나에게 녀석은 언제나 미친놈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내가 원하는 걸 원할 때 해야 직성이 풀리거든. 남 배려 같은 거 안중에도 없어. 내가 원하지도 않는데 하라고 하거나 내가 원하는데 못 하게 하면 나는, 쫑쫑아. 나는 중간이란 게 없어. 내 감정엔 말이지, 남들처럼 중간 과정이란 게 없단 소리야. 알아들어, 김진호?”

그냥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정새빈이 잡고 있는 손목이 으스러질 것 같이 아프다. 놈의 소름 끼치는 무표정이 무서워 눈물이 날 지경이다. 말을 할 수 있다면 잘못했다고 싹싹 빌고 싶은 심정이다.

조폭인 최태혁도 이렇진 않았다. 그렇게 똑똑하다는 쌍둥이들도 저런 말은 안 했다. 무서워 미칠 것 같았다. 처음 느껴 보는 뼈가 부러질 것 같은 악력도 무서웠고, 아무 표정 없이 내뱉는 미친 말들도 너무 무서웠다.

어떻게 알았지? 아니, 어떻게 저기까지 추측할 수 있었던 거야? 아파. 진짜 부러질 것 같아.

“혀, 형들한테 말할 거예요. 나 때리면 다, 다른 형들한테 다 말할 거예요…!”

나는 너무 겁이 나서 아무 말이나 나오는 대로 뱉었다. 그나마 정새빈을 말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되는 사람을 거론하며 녀석에게 어깃장을 놓았다.

“하하하하-. 쫑쫑아, 너 지금 나 협박해?”

그런 내 모습이 우스웠는지 정새빈은 자기 머리를 쓸어 올리며 거실이 떠나가라 웃어댔다. 그러나 다시 나를 보며 말하는 정새빈의 표정은, 기괴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내가 지금 여기서 네 아가리를 틀어 버리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말해도 돼. 근데 네가 말할 때쯤엔 아마 말해 봤자 아무것도 달라질 게 없는 상태일 거 같은데. 내가 네 후장 뚫겠다는 것도 아니고, 네 자지 뽑아 버린다는 것도 아니잖아.”

한 마디 한 마디 짓씹듯 말하는 정새빈은 나사가 하나 빠져 보였다. 나는 녀석을 더 이상 자극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난 존나 귀찮은 거 무릅쓰고 친절하게 설명해 줬는데, 겨우 그거 갖고 왜 그래. 얌전히 벗자. 난 민선우가 아니라서 섹스할 때 아프게는 안 해. 아니면, 쫑쫑이 아픈 거 좋아해서 그래? 그럼 내가 죽을 만큼 아프게 해줄 수도 있어. 그걸 원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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