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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호 이야기-43화 (43/234)

43화

연주는 매우 흡족했다. 그의 취향을 잘 아는 어머니가 골랐으니 좋을 거라곤 예상했지만, 그 이상으로 좋아서 몰입해서 들었다. 그래서 그는 연주가 끝나고 나서야 이상함을 느꼈다.

어깨에 느껴지는 이질적인 묵직함. 옆을 보니 의자 등받이 위로 고개를 젖히고 자던 남자 아이가 어느새 그의 어깨에 머리를 얹어 놓고 있었다. 덕분에 완전히 마른 다른 곳과는 달리 어깨 부근은 아까의 남자가 흘린 물로 축축했다. 거기다 남자 아이의 입가에 희미한 선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의 침까지 묻은 것 같다.

새빈은 잠시 고민했다. 아까 쌓였던 짜증을 다 분출했기 때문에 이정도 일 가지곤 화도, 짜증도 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상태가 아닌 이상 어떤 대처를 하기엔 너무 귀찮았다. 그래서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집에 가기로 했다.

아무리 섹스중독자라 해도 취향이 아닌 사람한테는 손을 대는 걸 싫어하는 그였기에, 정말 말 그대로 그냥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때 타이밍 좋게 직원이 그들에게 다가왔다. 일어날 생각으로 꼬고 있던 다리를 풀던 새빈은 다가오는 사람을 보고 잠시 행동을 멈췄다.

“저, 저기요. 손님. 손님…!”

지척으로 다가온 직원은 새빈의 눈치를 보며 남자 아이를 깨우기 시작했다. 그 간절한 부름에 응답이라도 하듯 감겨 있던 눈이 스르르 떠졌다.

잠시간 눈만 깜박이던 그는 갑자기 벌떡 허리를 세우고 새빈의 얼굴을 한 번, 그의 어깨를 한 번 번갈아 보며 경악했다. 새빈은 그제야 온전히 마주한 남자 아이의 얼굴을 보며, ‘표정이 다양하네.’ 하는 생각을 했다.

“어…. 그러니까, 그…. 여기서 이야기하긴 좀 그렇고, 시간 괜찮으시면 밑에 있는 카페라도 잠깐 가실래…. 아니, 가시겠습니까?”

더듬거리는 말에 새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새빈은 아주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은 이상 굳이 카페라는 곳을 가지 않는 편이었지만, 아직 이런저런 피로가 완전히 가시지 않은 상태라 어딘가 좀 앉아 있다가 움직이고 싶었다.

새빈은 카페까지 걸어오는 내내 눈치를 보던 남자 아이가 앉는 것을 보고 맞은편에 앉았다. 의자에 깊숙이 기대앉은 그는 대충 듣는 척하며 멍이나 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적당히 쉬다가 일어나면 그만이었다.

열심히 변명을 떠드는 모습을 멍하니 보던 새빈은 문득 그 얼굴이 어딘지 모르게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무언가 그가 아는 어떤 생명체랑 닮았는데, 정확히 뭔지 떠오르지 않았다. 새빈은 남자 아이, 진호가 하는 말은 하나도 듣지 않고 진호의 얼굴에 그가 아는 모든 생물을 대입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갑자기 선우가 등장했다.

새빈은 그린 듯한 미소를 짓고 있는 선우를 보며 쟤가 왜 저기 있지, 생각했다. 그 의문은 곧이어 진호가 해결해 주었다. 아까 자신의 얼굴을 보고 지나치게 경악한다 했더니 역시 그는 새빈을 알고 있었다. 정확히는 새빈 역시 그를 알았어야 했지만, 원래 필요 없는 것은 금방 잊는 새빈이기에 그의 기억에 진호는 없었다.

어쨌든 선후배 관계였던 진호는 자신의 친구 선우와 음악회가 끝나는 시간에 맞춰 데리러 올 정도의 사이인 듯했다. 새빈은 남자 아이의 이름이 ‘김진호’라는 것을 듣자마자 전에 했던 태혁과의 통화를 떠올렸다.

선우와 친한 것을 보니 그 진호가 이 진호가 확실해 보였다. 그럼 쌍둥이의 통화에서도 등장했던 ‘놀잇감’ 역시 얘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 한번 그의 얼굴을 요목조목 뜯어보았다.

평범한 얼굴에 커다랗고 순한 눈동자, 부리 같은 입술. 무엇을 닮았는지 드디어 떠올랐다. 진호는 참새를 닮았다. 그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낸 순간, 참새를 닮은 진호가 지은 표정은 참 볼만했다.

“아예 들어온 거야?”

“응. 왔어.”

“여전히 내키는 대로 생략하면서 말하는구나.”

새빈은 운전석에 앉은 선우를 보며, 그도 참 변함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다정한 눈매, 자상한 미소, 부드러운 운전 실력까지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그는 다시 창으로 고개를 돌리며 선우의 저런 모습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는 데에 다시 한번 감탄했다. 아수라 백작이나 지킬 앤 하이드 속 지킬 박사처럼 아예 이중인격자거나, 차라리 한쪽은 연기인 편이 더 이해하기 쉬울 텐데 다정해 보이는 선우도, 소름 끼치게 냉정하고 차가운 선우도 모두 그의 본모습이라는 게 참 신기했다.

“잠꼬대가 엄마를 찾는 거라니…. 하하, 귀엽네.”

“너는 왜 온 거야? 볼일 있어, 참새한테?”

음악회 내내 그렇게 잤으면서 카페에서도 잠들어 버린 진호는 이제야 조금씩 뒤척이더니 눈을 뜨기 시작했다. 새빈으로선 밤을 보내지 않은 상대의 잠에서 깬 얼굴을, 그것도 두 번이나 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는 선우와 이야기 중인 진호를 물끄러미 관찰했다. 다시 봐도 참 평범한 얼굴이었다. 아니, 사실 평범보다는 조금 나은 면도 있었다. 서 있던 모습을 떠올려 보면 키와 비율도 나쁘지 않았던 것 같은데, 문제는 그냥 전체적으로 존재감 자체가 옅었다.

특징이라고 할 만한 게 있다면 참새를 닮았다는 정도. 그래서 새빈은 궁금해졌다. 그의 독특한 친구들이 왜 이 아이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지가.

마침 심심하기도 하고, 만난 김에 좀 더 관찰해 볼까, 하는 생각을 하는 순간 진호가 인사를 하더니 차에서 내렸다. 당연히 새빈도 같이 내리기 위해 잠금장치를 풀려는데, 문이 열림과 동시에 다시 잠겨 버렸다. 새빈은 천연덕스럽게 차를 출발 시키는 선우를 향해 물었다.

“왜?”

“오랜만에 왔는데 애들 모아서 환영회나 하자.”

선우는 그가 진호를 따라갈 생각임을 눈치챈 듯했다.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안타깝게도 새빈은 독단적인 그의 성정에 어울려 줄 생각이 없었다.

“나 내려.”

말과 동시에 해제되는 잠금 버튼에, 새빈을 힐끔 곁눈질하던 선우는 기어코 차 문을 열어 버리는 그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새빈은 그 상태로 선우가 차를 세울 때까지 버텼다. 당연하게도 차는 정차했고, 새빈은 오랜만에 보는 무표정의 선우에게 살랑살랑 손을 흔들어 주고는 왔던 길을 거슬러 갔다.

새빈은 말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머릿속으로 생각을 하는 것과는 달리 속도가 느려 답답하기도 하고, 정확한 설명을 위해 생각해야 할 것이 더 늘어나기에, 말을 하는 것은 그 자체로 너무 귀찮은 행위였다. 그래서 그는 정말 필요한 말 외에는 잘 하지 않았고, 말을 할 때엔 그 단어가 아무리 속되거나 혹은 저급하더라도 직설적인 의미 전달을 위해서라면 거리낌 없이 사용하는 편이었다.

반대로 듣는 것은 꽤 좋아하는 편이었다. 그건 가만히 있어도 할 수 있는 최고의 취미 생활이었다. 새빈은 무엇이든 들었다. 그중 재밌거나 필요한 것은 기억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한 귀로 흘렸다. 그리고 듣기 위해서라도 더욱 말을 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새빈은 남들에게 항상 말없이 멍하니 있다가 입만 열면 상상도 못했던 말을 하는 이상한 사람으로 보였다.

사람들이 자신을 이상하다고 여기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에게 맞춰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사실 애초에 신경을 쓰지도 않았다. 그것은 그의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누군가의 행동이 자신들, 즉 일정 다수와 다르면 틀린 것이라고 인식하는 경우가 곧잘 있다. 특히 자신과 많은 부분이 달라 이해되지 않는 이들은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한다. 새빈은 사람들의 그런 자기중심적인 사고가 재미는 있으나 귀찮음을 자초하는 짓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해와 인정은 다르다고 생각했다. 이해를 할 수 없거나 공감이 되지 않더라도 제 행동으로 남에게 피해를 입히는 게 아니라면, 그리고 자기 인생을 알아서 잘 살아가고 있다면 그냥 인정하는 것. 나는 나, 너는 너, 쟤는 쟤. 그게 새빈이 생각하는 가장 효율적이고 평화롭게 살기 위한 사고방식이었다.

왜냐하면, 자신과 다르다고 옳지 않다는 생각을 하며 배척하는 마음을 저도 모르게 행동으로 분출해 버렸을 때, 잘못하면 역으로 호되게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 혹은 그의 친구들로 인해 인생이 파탄 난 몇몇의 사람들처럼 말이다.

아무튼 그렇기에, 새빈은 세상에 존재하는 매우 다양한 성향과 성격을 가진 사람들을 관찰하고 탐구하는 일에 흥미를 느꼈다. 기본 4대 욕구의 해소와 듣는 것 외엔 만사를 귀찮아 하는 그가 가끔 매우 심심할 때 꺼내 드는 두 번째 취미라고 할 수 있었다. 그 취미가 진호를 대상으로 발동되었다.

악몽을 꾸는 것 같던 진호는 심심함에 못 이긴 새빈이 그의 허벅지를 주무를 즈음에야 일어났다. 그리고 겁도 없이 옷을 벗어 젖혔다. 새빈은 조금 놀랐다. 전혀 그의 취향이 아니었던 이도 저도 아닌 몸을 보고, 왜인지 한번 핥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신기함에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일단 진호에게 욕구를 있는 그대로 표현했다.

“…진짜 또라이….”

돌아오는 답은 당연히 거절이었다.

진호와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새빈은 그가 자신을 꽤 만만하게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상대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을 굳이 숨길 필요성을 못 느낄 정도로 중요하지 않은 사람’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 빤히 보였다.

게다가 그는 우발적인 상황이긴 했지만 어쨌든 새빈을 때리기까지 했다. 너무 아파서 절로 눈물이 났던 것을 떠올리며 다시금 볼을 문지르던 새빈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이런 행동들은 그의 친구들에게 들었던 이야기들로 유추했던 진호와 크게 동떨어진 모습이었다.

여기서 의심해 볼 수 있는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새빈이 떠나 있는 사이에 그의 친구들의 취향이 매우 많이 변해서 저런 모습의 진호에게 흥미를 느꼈다는 가설인데, 이건 그다지 신빙성이 있지 않았다. 물리적으로는 떨어져 있었지만 나름 꾸준히 연락을 주고받았기 때문에 새빈은 그들이 그대로인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고, 그들은 저런 태도에 흥미를 느끼는 편이 아니었다.

진호가 만약 그에게 하는 것처럼 태혁을 대했다면 친해지긴커녕 어디 한군데가 부러져 지금까지도 병원 신세를 지고 있었을 것이고, 선우에게 그랬다면 그는 존재 자체를 무시해 버렸을 것이다. 그럼 자연스레 쌍둥이는 그에게 흥미를 느끼지 못했을 것이고. 그래서 이 가설이 맞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다른 하나의 가설은 지금 진호는 다른 친구들과 달리 그만, 새빈만 이런 태도로 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새빈은 이 가설이 맞을 확률이 매우 높다고 생각했다. 굉장히 불공평한 일이었다.

새빈은 여러 정황을 종합해 보았다. 그 결과 진호는 그의 친구들과 친분을 쌓고 싶은 듯했다. 특히나 자신을 대하는 태도를 고려하면, 진호가 그들의 기분을 얼마나 맞춰 주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으므로 새빈은 이에 관해선 100퍼센트 확신하고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왜 그 대상에 자기가 빠졌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들을 아는 사람들은 보통 다섯 명을 묶어서 생각하고는 했다. 그러니 그 네 명이 진호의 ‘이유는 모르겠지만 친해질 필요가 있는 대상’이 되었다면 새빈도 당연히 그 안에 들어가 있어야 했다. 거기서 자신만 빠졌다면 나름의 이유라도 있을 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마땅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애초에 그들 다섯 명이 친구로 엮이게 된 이유는 간단했다. 모든 면에서 비슷했기 때문이다. 경제적인 배경뿐만 아니라 개인의 능력과 외모도, 다르긴 하지만 어쨌든 비슷한 수준으로 지니고 있었다. 때문에 다섯을 두고 취향에 따라 더 좋고 덜 좋고로 나누는 경우는 봤어도 진호처럼 한 명을 쏙 빼고 좋아하는 경우는 본 적이 없었다.

새빈은 ‘네 사람이 진호를 왜 마음에 들어 하는가.’ 뿐만이 아니라 ‘진호는 왜 나만 필요 없어 하는가.’에 대한 궁금증까지 생겼다. 새빈이 한 사람에 대해 이렇게 연속으로 알고 싶은 것이 생긴 것은 예령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새빈은 우선 그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선 그 스스로가 진호의 마음에 들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지금처럼 기회만 있으면 쫓아내려고 하는 상대와는 알아가기는커녕 같이 시간을 보낼 기회를 잡는 것도 어려울 것이 뻔했다.

새빈은 경계심이 강한 진호를 고려하여 천천히, 효과적으로 접근할 방법을 모색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 전에, 이미 ‘굉장히 이상한 사람’으로 자신을 인식한 진호에게 나머지 네 명도 그 못지않게 독특한 인간들이란 것을 알려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새빈에 대한 경계가 조금 낮아짐과 동시에, 어쩌면 네 명 중 한 명이 떨어지고 그가 들어갈 자리가 생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새빈은 문득 이것 또한 진호가 노린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 가능성은 희박했지만, 만약 그의 관심을 얻기 위해 계획된 행동이었다면 새빈은 진호에게 기립 박수를 쳐 줄 용의가 있었다. 그 계획은 새빈으로 하여금 아주 오랜만에 승부욕까지 느끼게 할 만큼 매우 성공적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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