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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호 이야기-42화 (42/234)

42화

진호의 첫인상은 평범했지만 들었던 것보다 재밌었다.

새빈은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텅 빈 가방 하나만 든 채 여행을 떠났다. 아버지와 약속했던 최소한의 학력을 마친 뒤였기에 가족들도 떠나는 그를 말리지 못했다. 금고에 보관하고 있는 계약서대로, 이제 그는 모든 속박과 굴레를 벗어던지고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아도 재산을 물려받을 자격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저 같은 곳에 계속 머무는 것이 질려서 시작했던 여행은 몇 년간 이어졌다. 그러나 새빈은 가끔 본인이 한국에 있는 것인지 외국에 있는 것인지 헷갈릴 때가 있었다. 그의 친구들의 지속적인 연락 덕분이었다.

편의상 친구라고 부르지만 사실 그들의 사이는 친구와 타인 그 어디쯤에 있었다. 그래서 그들의 대화는 보통 ‘필요에 의한’ 것일 때가 많았다. 하지만 그들도 사람이기에 그저 아무 얘기나 하고 싶어질 때가 있는데, 그럴 때 공통적으로 새빈을 이용하는 편이었다.

새빈이 웬만한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렇지 않더라도 저희들의 정보를 이용해 먹으려는 의지나 열정이 전무하다는 것을 같이 지낸 시간을 바탕으로 완벽히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사자인 새빈으로선 약간 귀찮기는 했으나 지루한 일상에 재미를 제공하는 경우도 왕왕 있었으므로 굳이 거부하지 않았다. 그렇게 그는 암묵적으로 네 명을 위한 대나무 숲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새빈은 어느 날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어느 순간부터 그의 친구들이 공통된 주제를 떠들기 시작한 것이다. 이를 모를 소년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전해 들은 것은 미국에서였다.

새빈은 막 샤워를 하고 나온 참이었다. 아직 방에 남아 있던 여자가 진동이 울린다며 핸드폰을 내밀었다. 액정을 보니 후였다. 그는 자기 앞에 무릎을 꿇는 여자를 보며 핸드폰을 건네받았다. 그리고 바로 전화를 받으려고 하자 다가오려던 여자가 멈추더니 괜찮냐는 듯 눈썹을 치켜떴다.

그의 친구들은 그가 섹스중독자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럼에도 이렇게 사전에 얘기도 없이 자기들 내킬 때마다 연락을 한다는 것은, 이런 상황도 감수한다는 뜻이겠지. 새빈은 머뭇거리는 여자를 손짓으로 부르면서 액정을 쓸었다. 전화가 연결되자마자 잔뜩 들뜬 목소리의 후가 소리를 질렀다.

-야, 우리 재밌는 거 하나 발견했어. 민선우랑 엮여 있는 거라 잘하면 걔 일그러진 표정 볼 수도 있을 거 같아. 보고 싶으면 조만간 한국 한번 들러.

새빈은 그 말에 조금 흥미가 동했지만 그것만으로 한국을 가기엔 귀찮았다. 새빈이 대답을 하든 말든 새로 발견한 놀잇거리에 대해 몇 마디 덧붙이던 후는 이번엔 확인하듯 한국에 언제 올 건지 물었다. 새빈은 그의 허벅지 사이에 있는 여성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됐어. 더 할 말은?”

-없어.

새빈은 바로 핸드폰을 던지고 여자의 유혹에 응했다.

두 번째는 새빈이 영국에 있을 때였다. 공교롭게도 그때 그는 한창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중이었다. 드물게 알람 때문에 핸드폰을 소리로 설정해 뒀던 것이 문제였다.

커다랗게 울리는 벨소리에 순간 흥이 깨져 버린 새빈은 욕을 퍼부으려는 생각으로 전화를 받았다.

상대는 선우였다. 막 거친 말이 나가려는데 건너편에서 심상치 않은 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그의 친구가 플레이를 위해 자기를 이용한 것 같았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새빈은 자기의 신음이 들리기라도 할까, 수치심에 소리를 죽이고 있을 건너편의 누군가를 상상하며 살짝 시들었던 곳을 다시 세웠다. 덕분에 밑에 있던 남자도 몸을 바르작댔다.

다시 허리를 움직이려고 하는 찰나, 타이밍 좋게 말을 시작한 선우 덕분에 새빈은 또 멈춰야 했다.

-최근에 우연찮게 길고양이 한 마리를 발견했어.

그렇게 얘기하는 선우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새빈은 천천히 허리 짓을 하며 대꾸했다.

“마음에 드나 보지?”

-응. 처음이라 조금 애를 먹이긴 하지만, 가르치는 보람이 있는 사랑스러운 녀석이야. 대드는 모습도 귀엽다고 생각할 정도라니까.

새빈은 그 말에 조금 놀랐다. 철저히 복종 시키는 것을 좋아하던 녀석이 웬일이지 싶었다.

그러나 그들의 대화는 그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선우의 상대가 감히 그의 허락도 없이 사정을 해 버리는 바람에 전화가 끊겼기 때문이었다. 새빈은 조용해진 핸드폰을 침대 구석으로 던지고, 제 앞에서 혼자 움직이고 있는 남자에게 박자를 맞춰 주며 그날 밤도 실컷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세 번째는 새빈이 아랍계 나라에 있을 때였다. 그는 푹신한 소파에 앉아 있었고, 역시나 그의 다리 사이에는 매우 아름다운 여자가 자리하고 있었다. 기분 좋은 자극을 즐기고 있던 새빈은 진동하는 핸드폰을 나른하게 들어 올렸다.

화면에 뜬 이름은 최태혁으로, 여행 기간을 통틀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새빈은 그도 대나무 숲을 찾을 때가 다 있네, 생각하며 여자를 멈추게 하고 전화를 받았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그는 새빈에게 정말 용건이 있었다,

-피에로라는 남자랑 만났었나?

“…누구?”

-하…. 금발에 파란 눈의 이탈리아인 남자.

“……?”

새빈은 그가 이탈리아에 있을 때 만났던 남자들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그중 금발에 파란 눈을 가진 남자가 세 명 정도 있었는데, 이름이 뭔지는 아무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대답이 없는 새빈의 반응에 대충 예상이 된다는 듯 태혁은 긴 한숨을 쉬며 상황을 설명했다.

-그 피에로라는 남자, 어머니 가문이 운영하는 조직 간부의 애첩인 모양이다. 그 간부가 널 찾아 죽여 버리겠다고 날뛰고 있으니 당분간 이태리는 가지 마.

그 말에 새빈은 어깨를 으쓱였다. 어차피 유럽은 당분간 다시 갈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별로 아쉽지 않았다. 그는 통화를 시작하자마자 그에게서 한 발자국 떨어져 얌전히 기다리고 있던 여자에게 손짓했다. 그녀는 활짝 웃으며 새빈에게 걸어갔다.

“더 할 말은?”

-없어. 아, 혹시 너, 김진호라는 이름 기억하나?

“아니. 처음 들어보는데.”

-…알겠다.

대화는 싱겁게 끝나 버렸고, 새빈은 중천에 떠 있던 해가 자취를 감출 때까지 즐겼다.

그로부터 얼마 뒤, 새빈은 아프리카 어딘가의 공항에서 다음 행선지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이미 웬만한 항공사의 직원과는 다 만나본 후라 딱히 타고 싶은 항공사가 없는 것이 고민의 원인이었다. 그렇다고 불편하게 저가항공을 이용하고 싶진 않았던 그가 멍하니 공항 천장을 보고 있는데 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호의 전화였다.

-오, 받네. 야, 채예령 기억 나냐? 지금 우리, 그때랑 비슷한 조약 맺을지도 모르겠다. 뭐, 그 경우랑은 좀 다르지만, 어쨌든 곰돌이 이게 장난이 아니야. 나도 내가 왜 이러나 싶을 정도로 엄청 평범한 놈이거든. 다른 애들도 그렇게 진심으로 갖고 싶어 하진 않는 거 같은데, 이게 또 넘겨주긴 싫단 말이지. 우리가 차지하고 나면 다른 애들 얼굴 볼만해질 것 같으니까, 어떤 꼴을 할지 궁금하면 알려줄게. 한번 들어오든가.

매우 신이 난 듯한 호의 말을 대충 흘려듣던 새빈은 언젠가 들었던 말과 똑같은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궁금하면 한번 들어오든가. 이 말은 저번에 후가 했던 말이었다.

그걸 인지하자마자 새빈은 그동안 연관 지어 볼 생각을 하지 않았던 대화들이 묘하게 이어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민선우와 엮인 재밌는 것’, ‘우연히 발견한 길고양이’, 갑자기 튀어나온 이름 ‘김진호’와 네 명이 채예령과 비슷한 조약을 맺게 한 ‘곰돌이’. 새빈은 상황이 재밌게 돌아가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어차피 어디로 갈지 고민하는 참이었던 그는 망설임 없이 한국 항공사 쪽으로 걸어갔다.

새빈은 집에 오자마자 바로 잠이 들었다. 언제인지도 모르는 새 잠들었던 그가 눈을 뜨고 가장 먼저 본 것은 여행을 떠나기 전과 전혀 변함이 없는 방 풍경이었다. 대충 상황 파악을 마친 새빈의 시선이 문득 생각난 곳으로 향했다. 예상한 대로 깔끔하게 정리된 책상에는 여러 장의 티켓들이 놓여 있었다. 새빈의 어머니가 그가 없는 동안에도 음악회 티켓들을 모아 두신 모양이었다.

그는 나른한 몸을 억지로 움직였다. 책상에서 원하던 것만 집어 다시 침대에 누워 버린 새빈은 그 상태로 가져온 티켓 몇 장을 넘겨보다가 또다시 수마에 빠져들었다.

다음날, 마침 전날 본 티켓에 적혀 있던 음악회 시간에 맞춰 눈을 뜬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새빈은 이왕 일어난 김에 오랜만에 음악이나 들으러 갈까 싶어 대충 씻고 옷을 입었다. 아직 피로가 남았지만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듣다 보면 싹 없어질 것도 같았다.

하지만 새빈은 회장에 도착하자마자 예상치 못한 물벼락을 맞았다. 덕분에 옆머리부터 한쪽 상체가 다 젖어 축축한데, 그를 그렇게 만든 놈은 사과는커녕 그를 알아본 건지 얼굴을 붉히며 추파를 뿌려 대었다.

평소 같으면 그 꼴이 귀여워서라도 엎어 놓고 박아 줬겠지만, 그는 피곤함과 귀찮음을 무릅쓰고 음악을 들으러 간 상태였다. 새빈은 끈질기게 따라오는 남자를 무시하며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그가 들어가야 하는 관의 문은 닫혀 있었다. 남자가 붙잡고 늘어지는 바람에 몇 번 걸음을 멈춰, 결국 시작 시간을 놓친 것이다.

새빈은 닫힌 문을 보자마자 짜증이 확 치솟는 것을 느꼈다. 그는 아직까지도 옆에서 알짱거리고 있던 놈의 머리채를 잡고 화장실로 향했다. 싸움이 난 줄 알았던 직원들이 쫓아 왔지만 새빈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들어가자마자 잡고 있던 놈을 화장실 칸에 집어 던졌다. 새빈을 유혹하려던 남자는 겁에 질려 그에게 사과했다. 그러나 새빈은 이미 짜증이 난 상태였고, 그의 관점에서 쓰레기로 전락한 남자를 봐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화장실을 나왔을 때는 때마침 1부 공연이 끝났음을 알리는 안내 방송과 함께 회관의 문이 열리고 있었다. 짜증을 마음껏 발산한 뒤라 새빈의 얼굴은 다시 평소의 나른한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는 티켓에 적혀 있던 번호를 떠올리며 좌석을 찾았다. 겨우 앉은 그의 옆자리엔, 어색한 세미정장 차림의 남자 아이가 정신없이 잠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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