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호 이야기-40화 (40/234)

40화

“선배, 진짜 미안하다니까요? 그만 풀고 잠깐 고개만 들어 봐요, 그럼. 뒤에 수건만 깔아줄게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속으로 계속 되뇌었다. 진호야 참아라. 참자. 참아야 한다. 하지만 정새빈이 힐끔 째려보며 내뱉은 짤막한 말에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저리 가.”

“소파 젖는다고요! 이거 젖어서 못 쓰게 되면 선배가 새로 사줄 거예요? 아니, 이 소파가 어떤 소판데! 내가 아까부터 때린 거 미안하다고 했죠?! 나도 누군가를 때린 건 처음이었다고요! 그리고 사실 지금 선배가 이럴 자격이 있어요? 선배가 다짜고짜 그런 망측한 짓을 하니까 그런 거잖아요! 그러니까 누가 싫다는 사람한테 그런 짓 하래요?!”

내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든 말든 정새빈은 여전히 입을 댓 발 내밀고 옆을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열 받아서 쥐고 있던 수건을 내팽개쳤다.

“맘대로 하세요, 그럼!”

소리치고는 얼굴 보고 있기도 싫어서 방으로 돌아와 혼자 씩씩대며 문을 쾅 닫았다. 어이가 없어서 진짜. 다른 건 몰라도 그 소파는 내…. 이 씨.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애꿎은 방문만 째려보는데 밖에서 “코피!” 하는 정새빈의 목소리가 들렸다.

코피?! 얼른 나가봐야…. 아니지. 아니지, 김진호. 니가 지금 뛰쳐나가면 진짜 벨도 없는 거야. 나는 방문을 열어젖힐 뻔한 손을 반대 손으로 꽉 잡으며 되뇌었다. 쟤가 너한테 무슨 일을 하려고 했는지 생각해 김진호! 나는 걱정이 되는 마음을 애써 접으며 문을 등지고 앉았다.

“쫑쫑이 나빠.”

깜짝이야. 갑자기 바로 뒤에서 들리는 투덜거리는 소리에 돌아보니 정새빈이 서 있었다.

“…….”

쟨 또 왜 여기까지 와서 저래? 몸을 반만 내놓고 눈물 고인 눈으로 열심히 째려보는 모양새가 웃겼다.

“얼음주머니는 어디다 뒀어요.”

“…저기.”

저기가 어디냐, 저기가. 정새빈의 눈엔 내가 관심법이라도 쓸 줄 아는 것처럼 보이나 보다. 나는 밑도 끝도 없이 말로만 저기라고 말하는 정새빈을 올려다봤다. 깊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저기가 어딘데요.”

참을 인 자를 속으로 새기고 다시 한번 물으니 놈이 주춤주춤 옆으로 움직인다. 어깨가 올라간 것으로 봐선 이번엔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는 것 같았다. 근데 문제는, 들어 올린 팔이 벽에 가려진 쪽이라는 것이다. 문가에 서서 몸의 반쪽만 빼꼼 내밀고 있는 녀석은 자기가 지금 반만 보인다는 것을 깜박했나보다. 나는 다시 한번 깊은 한숨을 쉬며 이마를 짚었다.

“치사해.”

“…뭐가요.”

“나한테만 달라.”

정새빈은 울기까지 한 아까와는 다르게 전혀 아파하는 기색 없이 말을 했다. 이제 괜찮나? 내 눈에는 아직 벌건 것 같은 볼을 유심히 보며 이쪽으로 슬그머니 걸어오는 정새빈을 모른 척해줬다.

이런 저런 일이 너무 폭풍처럼 있어서 지치기도 했고, 눈치 보는 폼을 보아하니 아까 같은 상황은 더 이상 일어날 것 같지 않아서 긴장을 푼 것도 있었다.

그나저나 뭐가 다르다는 거야? 침대에 앉아 있는 내 앞에 우뚝 선 정새빈을 올려다보며 다음 말을 기다리는데 정작 놈은 입만 꾹 다물고 있다. 날 향해 숙어져 있는 고개와 달리 눈의 초점은 미묘하게 빗겨 나가 있다.

생각하는 건가? 아니면 내가 뭐라도 질문하길 바라는 건가. 나는 말을 하다가 만 녀석에게 눈빛으로 다음 말을 재촉했지만 당연하게도 녀석은 그 눈빛을 알아주지 않았다. 아 모르겠다. 정리 끝나면 말하겠지. 나는 부디 아까와 같이 미친 소리만 아니길 빌면서 조용히 침묵을 즐겼다. 그러자 얼마 뒤 다시 또렷해진 눈으로 마주봐 온 정새빈이 말을 하기 시작했다.

“들었어. 똥강아지도, 나비도, 곰돌이도. 근데 쫑쫑이는 달라. 못됐어.”

한국말을 외국말보다 더 알아듣기 힘들게 구사하는 네가 더 못됐어.

“인간 말종이 까불긴 해도 제법 깜찍해서 참을 만하다고 했단 말이야. 소시오패스는 기어오르긴 해도 미묘하게 순종적이라 봐줄 만하다고도 했어. 그리고 가식덩어리들은 쓸모없어 보여도 웃겨서 나름 정 간다고 그랬었는데…. 나는 하나도 아닌 것 같아.”

“…….”

“차별은 나빠. 나도 자지에 구슬 박았으니까 차별하지 말고 빨아줘야 해.”

…나는 도대체 어디서부터 따져야 하니…?

떼쓰는 아이 같이 입술을 삐죽대던 정새빈은 곧 내 옆에 걸터앉아 상체만 침대에 눕혔다. 벙찌는 데에 점점 익숙해지는 것 같다.

뭐부터 물어봐야 하나. 앞서 들었던 의미 모를 호칭들은 기분 나쁘게도 낯설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네 놈이 모일 때마다 따질 새도 없이 슥 스쳐 지나가곤 했던 것들이었다. 어렴풋이…. 아니, 사실 확실히 그게 날 지칭하고 있는 단어들이란 걸 알고 있었지만 애써 무시했는데, 이제 그만 인정해야 할 때인가 보다.

말의 어순이 좀 이상해서 그렇지, 해석하자면 다른 네 명한테서 내 얘길 들었다는 걸 텐데 내용이 영 거슬렸다. 나는 몇 가지 질문을 떠올리고 고개를 돌렸다.

망할 정새빈은 가만히 눈을 감은 채 쥐 죽은 듯이 누워 있었지만 자고 있진 않았다. 아까 이런 짓 하다 맞아서 엉엉 울어 놓고, 지금은 남의 엉덩이나 주물러 대는 놈이 자고 있을 리가 없다.

“선배. 그만 만지라 그러면 어떻게 할 거예요?”

“으음-. 그만 만질 거야.”

“아 진짜요? 그럼 그만 만….”

“나도 옷 위로 만지는 거 재미없어. 너도 옷 만지는 게 싫지?”

그냥 입을 다물었다. 여전히 자는 듯한 얼굴로 입만 움직여서 하는 말인데 왜 살벌하게 느껴지는 걸까?

하…. 기 빨려. 앞에 있는 사람이 정새빈이라 다행이다. 아니면 가짜 미소라도 걸쳐야 했을 테니까 말이다.

“선배. 인간 말종이랑 소시오패스랑 가식덩어리들이 누구예요?”

사실 묻지 않아도 대충 누가 누군지 감이 왔지만 굳이 물은 이유는 왜 그들이 정새빈 머릿속에 그렇게 저장 되어 있는지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

쓸데없는 건 잘만 말하면서 정작 진짜 궁금한 질문엔 답이 없었다. 나는 엉덩이를 옆으로 움직여 놈의 손에서 살짝 벗어나며 다시 한번 물었다.

“태혁 형이 인간 말종, 소시오패스가 선우 형, 후 형하고 호 형이 가식덩어리들인 거 같은데 맞아요? 근데 왜 그렇게 불러요?”

그러자 정새빈의 눈이 뜨였다. 바로 뭔가 말할 듯했던 놈은 한참을 천장만 보더니 답지 않은 비웃음을 걸치고 내게 되물었다.

“왜?”

헛웃음과 함께 나온 물음표가 빈정거림을 한껏 담고 있다. 나는 지금 왜냐고 묻는, 다소 어이없어 보이는 질문이 당황스러웠다. 네? 하는, 반사적으로 나온 되물음이 흐릿했던 건 그래서다.

“그럼 달리 뭐라고 불러?”

인간 말종이니까 인간 말종이라고 부르는 거고, 소시오패스니까 소시오패스라고 부르는 거야. 가식덩어리들은…. 글쎄, 둘을 표현하기엔 좀 귀여운 말이지만 거기에 가장 가까우니까 그렇게 부르는 거고.

이제껏 멍한 모습 아니면 어린애 같은 모습만 보여주던 정새빈이 갑자기 어른 같아 보였다.

“쫑쫑이는 내가 이상해?”

갑작스레 변한 분위기가 영 불편하고 무서워서 방금 전까지만 해도 망설임 없이 네, 하고 답했을 질문에도 꿀꺽 침만 삼켰다. 이쪽을 보고 있지도 않고, 얼굴은 아까와 같이 멍한데 목소리가 좀 다르다.

하지만 빌어먹을 호기심은 맘대로 내 주둥이를 움직여 아직도 풀리지 않은 제 욕구 해소를 꾀했다. 정새빈은 눈동자를 한 번 굴리더니 다시 천장에 시선을 박고 입을 열었다.

“펠라 하게 해주면 말해 주지로옹-.”

잔뜩 긴장된 공기가 한 번에 풀어졌다. 성희롱이 반가울 줄이야. 나는 다시 징징대는 말투로 돌아간 정새빈에게 장난치지 말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정새빈은 이젠 아예 제 침대인 양 다리를 뻗고 엎드려 누우며 생긋 웃었다. 알았다-, 하는 의미 모를 말을 중얼거리는 놈 몰래 손에 잔뜩 찬 땀을 바지에 슥 문질러 닦았다. 에이 씨, 괜히 정색해서 사람 놀라게 하고 있어.

“누구부터 얘기해 줄까?”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 질문이 심기를 거슬렀다는 것처럼 굴어 놓곤 참 대책 없이 밝다. 정새빈은 얌전히 놓여있던 베개를 끌어안고 침대 위를 뒹굴기 시작했다.

“내가 다 얘기해 줄 거야.”

나한테 하는 소린지, 아님 혼자 하는 소린지 참 옹골찬 다짐이다. 내가 이런 놈한테 쫄아서 배트를 꼭 안고…. 하, 진짜 쪽팔리네. 나는 정말 어린아이 뺨치게 감정 기복이 심한 놈의 모양새를 빤히 쳐다보다 뒤로 털썩 누웠다.

저만치 굴러갔던 정새빈은 금세 이쪽으로 굴러왔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눈동자를 마주 보는 덕분에 사팔이 될 것 같았지만 참고 기다렸다. 시야 끝에 걸친 놈의 입술이 열렸기 때문이다.

“쫑쫑아, 나도 걔네들도 이상해. 근데 그래도 나는 정상이야.”

그렇게 정새빈은 아무리 들어도 뭔가 많이 생략된 것 같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실 나는 괜찮아. 아, 괜찮다보단 알 수 있어. 걔네들하고 나는 정상이야. 그냥 좀 다를 뿐. 우리는 그걸 아니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그걸 모르는 사람들은 이상하다고 할 거야.”

들으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얘는 한국어를 할 줄 아는 게 맞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었다. 뭐가 괜찮다는 거야, 도대체. 아니 그리고 괜찮다고 하다가 갑자기 뭘 안다는 건데. 나는 ‘걔네’라고 지칭하는 사람들이 대충 최태혁, 민선우, 남궁후와 남궁호라는 것만 파악할 수 있는 녀석의 어법에 어지러워졌다.

“우린 그것도 알고 있어서 대부분 괜찮지만, 가끔 멍청한 것들이 우릴 화나게 할 때가 있어. 그럴 때 우린 좀 다른 방법들을 쓰지. 그러니까 나는 그게 걔네답다고 생각하지만, 보통 사람이 보면 태혁이는 인간 말종일 거고, 민선우는 소시오패스, 쌍둥이들은 가식덩어리들이지.”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40)============================================================

2